진보정의연구소는 진보정의당의 정체성 및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6개 분야에 대해 <10문 10답>이라는 이름의 ‘작은’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활력 있는 당을 고민하는 모든 분들께 작은 보탬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해봅니다.
6개 분야는 ①사회민주주의 ②한반도 및 동북아 평화 ③경제민주화 ④노동 ⑤복지와 조세재정 ⑥녹색생태환경 등입니다. 분야별 10가지 핵심 이슈들은 집필을 맡은 전문가와 연구소/정책위원회 구성원들의 소통을 통해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1. 진보적 통일/외교/국방 개념과 전략은 무엇이 되어야 하나요?
진보적 대외 정책과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은 인류 보편적 가치인 평화, 인권과 평등, 복지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 가치를 바라보는 관점과 이를 달성하는 수단의 차이,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보편적 가치와 주권 및 국익 사이의 긴장 등도 함께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진보 정당이 국민들의 이해와 지지를 받아 재도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통일/외교/국방 분야에서도 실력과 비전을 갖추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국제관계이론에서 자유주의(이상주의)는 인류 보편적 가치와 외교정책의 도덕성을 강조하면서 교류협력과 제도를 통해 전쟁을 막고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진보 진영과 가장 친화성이 있는 국제관계이론일 것입니다. 반면 현실주의는 국익과 권력 추구를 최우선 목표로 놓고 이를 위한 유력한 방법으로 군사력을 강화하는 접근을 취합니다. 많은 나라들이 이러한 안보전략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신보수주의는 자신의 가치와 비전을 강압적인 방식을 통해서라도 다른 나라와 지역에 이식하고 확산하려고 합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대표적입니다. 이 밖에도 다른 국제관계이론도 있고, 또한 현실에서 어느 한 가지 이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역대 정부 정부의 대외 정책, 특히 대북정책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에는 자유주의와 현실주의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햇볕정책은 남북관계의 제도화 증진과 교류협력부터 시작해 까다로운 정치안보 문제의 점진적인 해결을 추구하는 기능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의 성격을 지닙니다. 동시에 대규모의 군비증강과 한미동맹을 통한 군사적 우위 및 대북 억제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현실주의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이명박 정부는 현실주의와 신보수주의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화와 교류협력보다는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대북 압박과 제재에 치우쳤고, 또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북한까지 확대하는 흡수통일을 추구했습니다. 아직 판단하기에는 이르지만 박근혜 정부 역시 이명박 정부와 유사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진보적 대외 전략은 국제관계 이론과 역대 정부의 정책의 장단점을 잘 분석해, 이상과 현실, 타당성과 현실성을 두루 갖추는 방향으로 설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사례를 참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부 이론가들은 진보적 현실주의를 제창하고 있는데, 자유주의(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화해를 통한 새로운 외교 패러다임을 추구하자는 취지입니다. 미국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은 타자의 이익과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가 번영할 때 미국도 번영하고, 타자가 안전해질 때 미국도 더욱 안전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스마트 파워론’도 있는데요. 이는 현실주의에서 중시하는 하드파워와 자유주의에서 중시하는 소프트파워를 적절히 배합하는 외교전략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서 한국의 진보 정당이 채택할 수 있는 비전으로 ‘스마트 안보’를 고려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보 정당이 안보를 무시한다는 편견을 극복하면서도 현명한 방식을 통해 안보를 튼튼히 하자는 접근입니다. 군사안보 중심에서 인간안보, 경제안보, 환경안보, 국제안보 등을 포함하는 포괄안보가 기본 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고비용 저효율 안보에서 저비용 고효율 안보로, 일방적 안보에서 협력적 안보로, 동맹에 의존하는 안보에서 다자간 안보로의 전환을 모색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2. 진보 진영은 군축을 말하는데, 우리의 현실에 비춰보면 오히려 자주국방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진보 정당의 대외 전략과 정책을 어떻게 표현하든 가장 중요한 분야가 바로 군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축은 ‘다른 수단에 의한 안보 증진’이라는 취지를 담고 있어 ‘스마트 안보’의 핵심이자 평화배당금 창출을 통해 국가안보와 인간안보 사이의 조화로운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핵심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어 대북 억제의 필요성도 있고,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 현실로 인해 국민적 지지를 받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군축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일단 군축은 무장해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저비용 고효율 안보를 달성하는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따라 ‘군축’이라는 표현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면서 실질적으로 군축을 이뤄나갈 수 있는 접근도 고려할 법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러한 접근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우선 한국의 국방비가 대단히 높다는 현실입니다. 현재 남한의 국방비는 북한보다 10-20배 정도 많고, 북한 GDP의 2배가 넘습니다. 또한 주변국인 일본 국방비의 70%, 중국 국방비의 30% 수준입니다. 그러나 경제력과 인구, 영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한국이 이들 국가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습니다. 1인당 국방비로 비교해보면 한국은 약 600달러, 북한은 약 100달러, 중국은 약 80달러, 일본은 약 350달러 수준입니다. 한국인이 북한이나 주변국들보다 훨씬 높은 국방비 부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군축은 우리에게 사활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북핵 해결에도 반드시 필요한 과제입니다. 북한의 핵보유 동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미연합군에 대한 군사력의 열세를 핵보유를 통해 상쇄하려고 한다는 것이 미국 정보기관의 일관된 평가입니다. 아울러 한반도 비핵화와 함께 달성해야 할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평화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군축은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입니다.
군축의 복지 효과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차세대 전투기 도입 사업과 대체 복무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F-35를 도입할 경우 이 전투기의 개당 가격은 최소 2천억원, 30년간의 걸친 운영유지비는 그 4배인 8천억원 정도가 소요됩니다. 대당 1조원으로 볼 수 있는 셈이죠. 그럼 이걸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노인 복지 수당과 비교해보겠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모든 노인들에게 20만원씩의 생활비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가 재원 부족을 이유로 후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F-35 전투기 개당 비용을 노인 복지비로 전환하면 약 1만5천명에게 30년 동안 매달 20만원씩을 지급할 수 있게 됩니다. 한국의 노령화 속도와 노인 자살율이 세계 1위라는 점을 고려할 때, 고가의 무기 사업 재검토를 통한 복지 재원 마련은 사회적으로 공론화해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겁니다.
대체 복무제 역시 인권과 복지 증진 효과가 대단히 급니다. 연평균 800명 안팎의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이 감옥에 갇혀 있고, 1인당 교도소 수용경비는 연간 2000만원 정도입니다. 양심을 감옥에 가두기 위해 연간 160억원 정도를 낭비하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정부는 장애인, 치매 노인, 독거 노인, 저소득 계층 아동들에 대한 돌봄 서비스를 강화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를 예산과 인력 부족을 이유로 외면해왔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면 예산상의 추가적인 큰 부담 없이도 사회적 최약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다 넓고 깊게 내밀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대체 복무기간을 30개월로 상정할 경우 연간 2천명 안팎의 돌봄이들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죠.
3. 진보 진영은 북한에는 눈을 감는다는 지적이 많은데요. 북한을 비판할 때에는 비판해야 하나요? 아니면 북한과의 평화공존을 우선해야 하나요?
당연히 북한의 잘못된 언행과 정책에 대해서는 비판을 해야 합니다. 진보 진영에서 중시하는 평화, 인권, 복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북한은 분명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보 진영도 북한을 비판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알리바이성 비판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진보 정당의 가치와 목표, 국민과의 눈높이를 함께 고려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또한 북한이 아프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날카로움을 갖추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팩트와 정보와 대안에 강해져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 그리고 토론을 통해서 조금씩 이러한 역량을 갖춰나갈 수 있을 겁니다.
핵문제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북한이 핵보유국 지위를 노리는 것에 대해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비판보다는 ‘조선반도 비핵화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유훈이 아니냐’는 북한의 논리에 따른 비판에 더욱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북한이 핵 선제타격을 운운하면 ‘부시 행정부의 핵선제공격론을 그토록 비난했던 북한이 부시를 닮아가는 거냐’는 비판이 효과적입니다.
동시에 핵문제에 대한 균형적이고 역사적이며 문제 해결 지향적인 접근도 중요합니다. 흔히 ‘북핵을 머리에 이고 살 수 없다’고들 합니다. 이는 한반도의 핵문제를 북핵 문제로만 환원시키는 편협한 접근입니다. 북한은 미국 핵을 60년 넘게 머리에 이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종북좌파'로 매도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리는 것이 효과적일 것입니다. “1950년대부터 오바마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반복적으로 북한에 대해 핵무기 사용을 고려해왔고, 계획해왔으며, 위협해왔다.” 이건 종북이나 친북도 아닌 미국의 <AP통신>이 미국 문서를 분석해 내린 결론입니다.
진보 진영의 아킬레스건처럼 거론되어온 북한 인권문제도 중요합니다. 우선 북한의 인권 상황이 대단히 열악하다는 객관적인 현실이 존재합니다. 동시에 국내외 보수파들이 북한 체제와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싸잡아 비난하면서 대북 강경책을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현실도 존재합니다. 이에 따라 진보 진영의 과제는 북한 인권 상황의 실질적인 개선에 기여하면서 인권문제가 대북 강경책으로 악용되는 정치적 현실을 견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가 필요합니다. 이는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정확한 비판과 합리적인 정책 대안 마련의 토대입니다. 국내 거주 탈북자들과의 대화와 소통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북한을 비판하면서도 ‘왜 대화를 하고 화해협력을 해야 하느냐’에 대해 설득력 있는 논리를 갖추려는 노력도 필요하겠죠. 기실 2012년 대선 때 잘 나타난 것처럼, 남한의 전반적인 여론은 북한과 안보 문제에 대해 갈수록 보수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 정치의 아이콘처럼 등장한 안철수 의원이 “나는 안보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다”라고 말한 것이 이러한 기류를 잘 보여줍니다. 이는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적 기류가 강해지고 있는 것과 분명 구별되는 특징입니다. 또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젊은 세대의 무관심도 갈수록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울러 종북 논란이 진보 정당 내부에서 본격화되었었고 민중민주계열(PD) 인사들의 북한에 대한 관심이나 전문성도 그리 높지 않습니다. 보수진영의 ‘종북좌파’ 딱지 붙이기도 여전하고 이는 국민들의 레드 콤플렉스와 맞물려 확대재생산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보수화, 무관심, 진보 진영 사이의 근친증오 현상, 보수 진영의 매카시즘이 맞물려 있는 상황에서 진보적 대북정책의 설자리를 넓히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결국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부로부터의 성찰과 역량 강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4. 한반도 문제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왜 이렇게 안 풀리는 걸까요?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입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갖고 있는 정보에 따라, 의도와 목적에 따라 백가쟁명식의 주장이 가능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알기 쉬우면서도 설득력 있게 설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한반도 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지나친 일반화일 수는 있지만 현상유지(status qua)와 현상변경 사이의 갈등에 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한반도 현상유지 체제는 분단과 전쟁과 휴전을 거치면서 공고화된 ‘코리아 냉전’일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반도 협상타파 시도는 비평화적인 방식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60년여 전에 김일성-스탈린-마오쩌둥의 전쟁을 통한 현상타파 시도는 엄청난 사상자와 후유증을 담겼습니다. 1990년 중후반에 한미 양국에서 유행했던 북한붕괴론도 허상으로 끝났습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북한 정권교체(regime change) 시도도, 이명박 정부의 흡수통일 시도도 북한의 핵무장에 대한 강한 집착의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무력을 통해서든, 제재와 압박을 통해서든 비평화적인 방식으로의 현상타파 시도는 더욱 악화된 현상유지로 귀결되어왔다는 것이 한반도 문제의 근본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분단은 차치하더라도 정전체제가 60년째 이어져오고 있는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고 또한 대단히 비정상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전체제 때문에 불편하고 불안하십니까’라고 한국인들에게 물어보면 어떤 답변이 돌아올까요? 정전협정의 또 다른 주체들인 미국인들과 중국인들에게 던지면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질문은 북한 사람들에게 던지면 어떤 답변이 돌아올까요? ‘미국의 위협 때문에 못 살겠다.’ ‘경제제재 때문에 경제 발전이 안 된다.’ 등등 아마 열변을 토할 겁니다.
바로 이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강대국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도 평화도 아닌 현상, 즉 정전체제 유지를 선호해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 주한미군 및 한미동맹의 안정적인 유지와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원활한 개입 토대를 구축하려고 합니다. 한국이라는 최대 무기시장도 불안한 정전체제에 힘입어 성장해왔습니다. 중국은 한국전쟁 당시 직간접적인 교전 상태였던 미국, 일본, 한국과 수교를 맺었고 이는 급격한 경제성장의 중요한 토대와 환경이 되었습니다. 한국 역시 정전체제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과 민주화, 그리고 냉전 시대 적대국이었던 소련(러시아) 및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했습니다. 미국, 중국, 한국은 정전체제가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별로 느끼지 않고 있는 셈이죠. 이를 ‘비정상성(abnormality)의 정상성(normality)'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다릅니다. 20년 넘게 미국 및 일본과 수교를 시도해왔지만 번번히 좌절되어왔습니다. 세계 최강 미국, 지역 강국인 일본, 중견국인 한국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경제제재의 수위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북한의 잘못도 있지만, 북한이 정전체제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가장 비정상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여 북한의 메시지는 아주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전체제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 이는 정전체제에 큰 불편이나 불안을 느끼지 않는 한국 및 미국과 근본적인 차이이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반도 위기의 핵심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겠죠.
2013년 북한의 행태 역시 이를 잘 보여줍니다. 4월까지는 정전협정 백지화와 전시 상태 선포 등 호전적인 언행에는 ‘그래, 정전체제가 얼마나 불안하고 불편한 지 너희도 느껴 봐’라는 의도를 깔고 있습니다. 이렇게 위기를 한껏 고조시킨 다음에 전방위적인 대화 제의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에게는 긴장완화,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대체, 핵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논의하자고 하고 있지요.
문제는 앞으로입니다. 대화와 협상이 재개되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포괄적으로 논의한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대화와 타협의 문턱을 높이면서 제 갈 길을 고집한다면 정전체제의 불안정성은 갈수록 고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북한은 대화를 통한 평화체제 구축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느낄수록 ‘핵의 위력’에 의지해 정전체제를 계속 뒤흔들려고 할 것입니다. 특히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총가동하면 2016년까지 50개 가까운 핵무기를 만들 수 있고, 전술핵 개발·배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또한 남한은 ‘능동적 억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요지는 북한의 도발시 ‘선 조치, 후 보고’, ‘도발 원점뿐만 아니라 지원세력과 지휘세력까지 응징’입니다. 사실상 전쟁불사론인 셈입니다. 봄철에 메마른 산에 담뱃불 하나가 큰 산불을 낼 수 있는 것처럼 한반도의 상황은 대단히 위험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평화체제에 대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가 절실합니다.
5. 한미 양국 정부의 대북 인식과 정책의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한반도 위기를 정확히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발생 원인 및 전개 과정, 그리고 대응책에 대한 객관적이고 실용적인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 관성적인 인식 구조가 여전히 만연합니다. 특히 대북정책의 핵심적인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한국과 미국 정부 내에서 이러한 경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습니다.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눠서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북한의 도발이나 벼랑 끝 전술이 있을 때마다, 그 원인을 북한 내부로 돌리려는 시각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2013년 상반기 북한의 위협적인 언행을 두고서도 김정은 체제 내부의 불안정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젊은 호기 및 통치 경험 부족을 도발의 원인으로 분석하는 시각들이 많습니다. 일각에서는 김정은 위원장이 초기에는 경제발전에 관심을 가졌다가 군부의 반발에 밀려 선군정치로 후퇴하고 있다고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인론은 김정은 체제가 빠르게 안정화되고 있다는 미국 정보기관의 평가와도 맞지 않을뿐더러, 2012년부터 북한의 경제 사정도 호전되었다는 사실관계와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또한 김정은이 군부의 눈치보기에 급급했다면 군 수뇌부 인사들의 세대교체를 단행하고 군부에 이익에 반할 수 있는 내각 중심제를 강조하고 있는 현실을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둘째, 북한이 도발과 벼랑 끝 전술을 통해 더 많은 경제적 지원을 받으려 한다는 분석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객관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북한이 지원을 원했다면 대북 지원 중단이나 취소, 그리고 경제제재가 강화될 것이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장거리 로켓 발사나 핵실험을 강행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또한 북한의 유력한 외화벌이 수단이라는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과 관련해서도 고자세를 고수하고 있는 것도 납득하기 힘들어집니다. 대북 경제제재 강화와 인도적 지원 중단이 북한 주민들에게 고통을 가중시킬 수는 있어도 북한 지도부의 정책 노선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북한 지도부가 민생보다는 자주권과 체제 유지를 우선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북한의 도발적인 언행이 있을 때마다 반복되어온 ‘중국 역할론’입니다. 중국이 북한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만큼, 중국이 강도 높은 대북 제재와 압박에 나서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거나 붕괴를 각오해야 하는 양자택일에 몰릴 것이라는 주장이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법은 북한에게 핵과 미사일(위성)이 ‘자주의 무기’라는 성격도 갖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입니다. 북한이 ‘자주권’을 가장 중시하는 한, 중국의 대북 압박과 제재 동참은 북한의 언행을 순화시키기보다는 더욱 거칠게 만드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중국이 북핵을 포함한 한반도 문제 해결에 건설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한미 양국이 대북 대화와 협상 의지를 분명히 하면서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이끌어내기 위해 중국의 협조를 구하거나, 협상 과정에서 이견을 좁히면서 중재와 대안을 제시할 때 비로소 나올 수 있습니다.
넷째, 한미 양국 내에서는 지난 20년간 북핵 협상을 ‘도발-대화-보상-도발’이 이어지는 ‘북한식 패턴’으로 규정하고는 이러한 패턴에 더 이상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이 대단히 강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북한이 먼저 변하지 않는 한 대화에 임할 수 없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의 대북 협상을 이러한 인식 틀에 가둬두는 것은 사실관계와 잘 맞지 않습니다. 북한도 약속을 위반하고 도발한 경우도 많았지만, 한국과 미국도 북한과의 약속을 충실히 지켜왔다고 볼 수는 없고 상황 악화 조치를 취한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직후 북미 공동 코뮤니케를 무시하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것이나, 이명박 정부가 남북 정상간의 합의인 6.15와 10.4 선언을 무력화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북한의 핵실험과 연평도 포격과 같은 명백한 도발과는 달리 인공위성 발사를 도발로 규정할 수 있느냐의 논란도 있습니다.
끝으로 ‘대북 협상 무용론’입니다. 현 시점에서 북한과의 협상이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을 ‘한미 양국이 충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는데 북한이 도발로 응수했다’는 일방적 인식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북한도 합의를 위반했지만, 한국과 미국도 북한과의 합의를 위반한 사례는 많습니다. 또한 합의와 위반에 대한 해석의 차이 역시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그 차이를 대화를 통해 해소하려는 노력보다는 한미 양국은 대북 제재로, 북한은 핵 능력 강화 등 도발적 언행으로 응수하려고 했던 것이 문제의 본질인 것입니다. 오히려 대북 외교의 실패 원인은 외교의 ‘결핍’에서 찾아야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평화체제 문제입니다. 2005년에 채택된 6자회담의 9.19 공동성명에서는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대체하기 위해 별도의 포럼을 열기로 했지만, 오늘날까지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6자회담도 2008년 12월 결렬 이후 한 차례도 열리지 않고 있는데, 한국과 미국이 6자회담 개최를 꺼려해온 것이 주된 이유입니다. 결론적으로 ‘외교 무용론’이 거론될 만큼 지금까지 외교다운 외교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근 수년 동안 한국과 미국이 대북 제재와 압박, 그리고 중국 설득을 위해 펼쳐온 외교적 노력의 수분의 일만이라도 북한과의 직접 대화에 쏟았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6. 북방한계선(NLL)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리고 해법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NLL를 해상분계선이나 영토선으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를 둘러싼 남남갈등, 남북한의 갈등, 미국과 중국 사이의 전략적 갈등까지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 차례의 서해교전과 천안함 침몰, 그리고 연평도 포격전을 거치면서 국민들 사이에는 정서적 영토선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대단히 커졌기 때문에 진보 진영의 대응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LL의 진실과 합리적인 해법을 알려나가려는 노력은 꾸준히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NLL 문제의 해결 여부는 평화체제 구축에 있어서도 핵심 관건입니다. 평화협정 논의시 핵심 의제 가운데 하나가 미획정 해상분계선의 획정 문제인데 이에 대한 남북한 사이의 타협과 이를 가능케 하는 국민적인 공감대가 이뤄지지 않으면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는 역류 현상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역사적 진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다양한 주장이 제기될 수 있지만, 1차적으로 중요한 건 NLL을 그은 당사자인 미국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NLL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1970년대 미국 비밀문서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적인 내용은 NLL을 영토선이나 해상분계선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밀문서들에 담긴 주요 내용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정전 협상에서 해상분계선 합의에 실패하자 1953년 8월 30일 당시 유엔군 사령관인 마크 클라크가 일방적으로 선포한 것이 NLL의 근원이라는 인식이 통념처럼 받아들여져 왔지만, 이를 뒷받침해주는 어떠한 문서도 발견되지 않았고 NLL은 1960년대에 설치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둘째, “남한은 1953년 정전 이후 북한이 NLL를 인정해왔다고 주장”하지만, 북한이 공식적으로 NLL를 인정했다고 볼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존재하지 않고 유엔사가 북한에게 설명이나 통보한 적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NLL을 사실상의 해상 경계선으로 간주하는 남한의 입장은 “국제법적으로도 어떠한 근거가 없고 NLL 길이의 일부는 영해에 관한 최소한의 조항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넷째, NLL를 해상분계선으로 간주하려는 한국의 입장을 미국이 지지할 수는 없으며, 이에 따라 NLL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서해 5도와 북한의 인접 수역 사이의 중간선을 대안으로 검토했었다는 것입니다.
NLL에 대한 남북한의 합의도 존재합니다. 1991년 합의되고 이듬해에 발효된 남북기본합의서가 바로 그것인데요. 내용은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불가침구역은 해상불가침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2012년 대선 정국과 2013년 6월 정국을 강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의 진상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국정원이 공개한 2007년 노무현-김정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보면, 노 전 대통령은 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현실론과 미래 비전을 가지고 김 위원장을 설득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룹니다. 그 내용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요. 첫째, NLL을 새로운 해상분계선으로 대체할지의 여부는 현 단계에서는 협의하기 어렵다. 둘째, 이 문제는 남북기본합의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앞으로 협의해나가면 된다. 셋째, 이에 따라 현 단계에서는 서해평화협력지대라는 큰 틀의 접근을 통해 평화를 정착시키고 공동 번영을 도모하자. 이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도 대체로 동감을 표했습니다.
그렇다면 서해평화협력지대는 현재에도 NLL 문제를 풀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우선 남북정상회담에서 큰 틀에서 합의는 이뤄졌지만, 한 달 뒤에 열린 남북국방장관회담에서는 공동어로구역 설치 합의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기준선을 NLL로 할 것인가의 여부, ‘등거리로 할 것이냐 등면적으로 할 것이냐’를 둘러싼 이견을 좁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NLL 문제를 전향적으로 풀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는 요인입니다. 예를 들어 2012년 대선 정국 때 NLL 문제가 불거지자 박근혜 후보뿐만 아니라 유력 야당 후보였던 문재인, 안철수도 ‘NLL은 영토선으로 사수하겠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세 차례의 교전과 천안함 침몰, 그리고 연평도 포격전을 거치면서 남북 양측의 군사화 수준도 크게 높아져 있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NLL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기본합의서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를 기초로 단계적 해법을 강구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보류의 원칙과 서해평화협력지대, 그리고 군비통제를 창의적으로 종합해 포괄적인 해법을 마련해야 합니다. 여기서 보류의 원칙이란 남북기본합의서의 내용을 재확인하면서 해상분계선 확정은 평화협정에서 논의하기로 합의하는 대신, 남한은 NLL을 영토선이나 해상분계선으로 주장하지 않고 북한은 잠정적으로 남한의 관할권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방안의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10·4 선언에 나온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와 함께 △비무장평화수역 지정 △사격 금지 구역 지정 △부대와 무기체계의 후방 이동 등 군비통제 방안이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상당한 수준의 신뢰가 구축되고 공동 번영의 기초를 닦는다면, NLL 문제의 근원적인 해법도 마련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해상분계선 확정 협상을 본격적으로 개시하거나 남북관계 특수론을 적용해 통일 때까지 보류의 원칙을 재확인하는 방안 등을 검토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북핵 문제를 비롯한 한반도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대화와 협상의 성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핵무장 배경과 동기를 검토하고 북한 지도부의 핵 포기에 따른 득실관계 판단에 대해 확실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북한이 핵 포기시 얻게 될 이익은 실현가능성이 불투명한 ‘그림의 떡’ 수준이었습니다. 제재와 압박으로 북핵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충분히 입증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북한이 핵 포기시 얻게 될 이익이 손실보다 확실히 크다는 것을 확신시켜야 하고 또 이익의 현재성과 지속성을 띠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대북정책의 패러다임이 전환되어야 합니다. 전환의 근본적인 방향은 평화적인 현상 변경에 있으며 이는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됩니다. 하나는 한반도 핵문제를 평화체제라는 커다란 용광로에 녹여내자는 것입니다. 9.19 공동성명을 비롯해 지금까지는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했고 이에 따라 ‘어느 것이 먼저냐’는 논란도 거셌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은 비핵화(혹은 비핵지대)를 평화체제의 개념과 목표에 포함시키는 융합적인 관점에서 접근해보자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북한의 NPT 복귀-비핵화를 포함한 한반도 기본 평화협정 체결을 동시에 이행하는 것이 골자입니다. 북한이 핵 폐기를 공약하고 ‘과도기적 지위(transitional status)’로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협정에 복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과도기적 지위란 북한이 NPT에 복귀하는 시점에는 핵 폐기가 완료되지 않았으나 비핵국가로서의 목표와 지위를 분명히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북한이 핵 폐기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내용에 해당됩니다. 이와 동시에 남-북-미-중 4개국이 정전협정을 대체할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평화협정에 북한의 핵 폐기 대상, 시한, 방식을 명시하는 것입니다. 평화협정 체결은 평화체제의 법적?제도적 기반으로 정전체제에서 평화체제로 가는 중대한 전환점에 해당됩니다. 또한 한미 양국이 북한을 적대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가장 확실히 보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핵문제 및 군사적 위기 해결에 결정적 추동력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평화협정 체결이 북한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라든지 북한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일각의 인식은 큰 문제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변화된 현실과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반영해 한반도 비핵화를 비핵지대로 발전시키자는 것입니다. 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한반도 핵문제 해결의 기본 목표를 담고 있지만, 일반적인 비핵지대화는 달리 핵보유국의 의무 사항이 명시되지 않았다는 한계도 있습니다. 또한 한미 양국이 요구하는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이 말하는 ‘조선반도 비핵화’에도 적지 않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과 가치를 고려해 한반도 핵문제의 해결 방향은 북핵 문제 해결과 남한의 비핵화 공약 유지, 그리고 미국의 대북 소극적 안전보장(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뿐만 아니라 핵보유국들의 의무 사항까지 포괄하는 형태로 해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조치로는 핵보유국들의 남북한에 대한 소극적 안전보장 제공, 핵무기 및 그 투발수단의 한반도 배치?경유?일시통과 금지, 북핵 폐기 완료시 미국의 핵우산 정책의 공식 철수 등도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한반도 비핵지대화를 동북아로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협정은 ‘본 협정+부속합의서(혹은 추가의정서)’ 방식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남북기본합의서 방식과 흡사한 것인데요. 상호 주권 존중, 한국전쟁의 공식적인 종식, 상호 불가침, 한반도 핵문제 해결 방안,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 등 원칙적이고 합의 가능한 항목들로 ‘기본 협정’을 체결하고, 북방한계선(NLL), 유엔사와 주한미군, 군축 문제, 평화체제 관리기구 구성과 운용과 같은 까다롭고 세부적인 내용은 추후 ‘부속 합의서’에 담는 방식을 취하는 방안을 검토해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문제 해결의 가능성과 속도를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8. 통일은 꼭 해야 하는 걸까요?
통일 문제에 대해서 세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꼭, 그리고 왜 해야 하는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가?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통일 방법론에 대해서는 백가쟁명이 있지만, 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은 상대적으로 저조합니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은 ‘왜 통일을 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데, 정부와 전문가 집단은 ‘어떻게 통일을 할 것인가’에 몰두하는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학생들과 얘기하다 보면 이런 얘기들이 종종 듣게 됩니다. “친구들하고 만나서 통일 얘기를 꺼내면 왕따 당해요.” “통일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도 살기 힘든데 통일되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아요.” “통일하지 않고도 남북한이 협력하면서 평화롭게 살면 되는거 아니에요?” “남한 사람들도 취직하기 힘든데 통일되면 일자리 찾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 같아요.”
물론 통일에 적극 찬성하는 입장도 들을 수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통일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는 데에는 ‘통일이 우리에게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지’에 대해 막연한 회의감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북한은 차치하더라도 남한이 통일 여건을 제대로 만들고 있는 지도 의문입니다. 남한 내 정착한 탈북자들이 2만명을 훨씬 넘어섰지만, 많은 탈북자들에게 남한은 희망의 땅이 아니라 절망의 땅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미 다문화 시대에 접어든지 오래이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여전하며, 이는 그 자식들에게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탈북자와 이주민에 국한되지 않아요. 같은 남한 사람들끼리도 빈부의 차이, 학력의 차이, 사는 지역의 차이, 심지어 외모의 차이에 따라 양극화와 갈등이 더욱 심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향이 개선되기는커녕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남한 주민은 북한 주민을 동등한 ‘통일 코리아’의 주민으로 대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명박 정부 5년은 말할 것도 없고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에 대해서도 성찰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두 정부 시기에 남북관계가 꾸준히 발전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10년 동안 한국의 빈곤율, 자살율, 아파트값, 대학 등록금, 사교육비, 실업율 등이 두 배 안팎으로 늘어났습니다. 남북관계는 좋아졌다지만, 한국 국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는 대단히 열악해진 것입니다. 물론 둘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DJ-노무현 정부 10년간 이룩된 남북관계 개선이 남한의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키는데 기여하지 못했다는 평가는 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평화배당금(peace dividend) 창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국방비가 정확히 두 배로 늘어났는데, 군비 증강을 다소나마 억제했다면 10년 동안 수십조원의 국방예산을 줄일 수 있었고, 이를 교육?복지에 투자했다면 우리의 삶은 조금이나마 나아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습니다. 과정으로서의 통일은 그 과정에서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과 병행되지 않으면, 그 통일의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고, 또한 보통 사람들의 관심도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진보 정당은 바로 이 점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통일의 의의와 과정과 목표를 국민들에게 제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기조는 ‘한반도 주민 모두가 행복해지는 통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미 많이 나온 얘기입니다만, 분단 비용이 통일 비용보다 훨씬 저렴하다는 점을 보다 설득력 있게 알려나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절실한 평화는 ‘통일로 가는 가장 바람직한 수단이자 통일을 통해 더욱 확고하게 실현해야 할 목적’이라는 점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통일 이후 북한 주민이 ‘2등 국민’처럼 취급되지 않기 위해서는 남북한의 화해협력을 통해 북한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것과 함께 남한 내부의 평등과 연대 문화를 확산시키려는 ‘과정’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또한 평화배당금 창출을 통해 통일 프로세스가 남북한 주민들의 행복 지수를 높이는, 그래서 ‘피부에 와 닿는 평화와 통일’ 담론과 정책을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9. 유일한 동맹국인 미국, 강해지는 중국,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러시아 등 주변국 관계는 어떻게 정립해야 할까요?
우선 거시적으로 한반도 문제와 동북아 국제정치의 상호 작용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구조적으로 볼 때 동북아에서 한반도의 딜레마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설명되곤 합니다. 이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만나는 접점에 한반도가 있고,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이 지난 수 세기 동안 한반도를 동북아 지역의 패권 확보의 발판이나 완충지대로 삼아왔다는 역사적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특히 1945년 한반도의 ‘분단선’은 한국전쟁과 정전체제를 거치면서 동북아의 ‘세력균형선’으로 작용해왔고, 이러한 특성은 앞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미-중-일-러 주변국들이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선호하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체제 구축과 통일 실현이라는 현상 변경에 대한 주변국들의 지지와 협력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히려 동아시아 권력 지도가 크게 바뀌고 패권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구한말의 비참한 역사를 되풀이 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북관계를 기본으로 삼아 양자 관계와 다자 관계를 아우르는 전략과 비전을 갖추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먼저 미국과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미국의 파워가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앞으로 상당 기간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해 보입니다. 또한 미국은 한국의 유일한 동맹국이면서 북한과의 적대관계에 있습니다. 중국과는 자웅을 겨루고 있고 일본의 유일한 동맹국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국의 양자 및 다자 관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라는 것입니다. 진보 정당은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면서 한미관계의 미래를 설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도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은 한국 안보의 중추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안보는 심리적 측면이 대단히 중요한데 대다수 한국인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만큼, 국민 정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따라 주한미군 철수를 앞세우기보다는 한미관계의 비정상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미국이 한반도 문제 해결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견인하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중국과의 관계입니다. 일단 중국의 국력이 급격히 신장되면서 관심 범위와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를 패권주의로 해석할 것인가 강대국화와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는 것이죠. 남한과는 최대 교역국이자 ‘전략적 동반자 관계’이면서도 때때로 대북정책 및 한미동맹에 대한 이견으로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북한과는 사실상 동맹국이면서 최대 교류협력 국가이면서도 핵문제 등 여러 가지 전략적?정책적 긴장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비핵화를 핵심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이 우호적으로 중국의 역할을 제고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진보 정당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중국이 민주주의, 평등, 생태?환경, 인권 등에 있어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의 충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볼 때, 진보 정당은 중국에 대해 ‘우호적인 조언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진보 정당의 한반도 문제에 대한 인식과 접근법이 중국과 공통점이 많고 한미동맹이나 한-미-일 3각 동맹이 중국을 겨냥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가능성은 존재한다고 봅니다.
일본과의 관계로 넘어가 보죠.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개념과 세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개념적으로는 국수주의적 우경화와 군사적 우경화가 있는데, 전자는 과거사를 부정하고 배타적 민족주의 언행을 통해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미일동맹 강화 및 평화헌법 변경을 통해 군사안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시각으로는 일본의 우경화가 과거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견제해야 한다, 정상(보통) 국가로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확대 해석할 필요가 없다, 일본의 군사력 강화 및 미일동맹 강화는 북한 및 중국 견제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한국에게도 이롭다. 또한 일본 우경화의 배경 가운데 하나로 한국의 국력 신장과 남북관계 개선이 있다는 해석도 우리로서는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일본이 한반도의 평화적 현상 변경을 의미하는 평화체제 구축과 통일에 가장 적대적인 반응을 보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일 정책의 과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진보 정당의 관점에서는 탈핵과 동북아 공동체 건설의 중요한 파트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끝으로 러시아와의 관계입니다. 한반도 문제를 지정학적 관점에서 보면 답답하지만 지경학적 관점에서 보면 기회가 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 가장 부합하는 나라가 러시아가 아닐까 합니다. 러시아는 10여년 전부터 한반도를 지경학적 관점에서 바라봐왔습니다. 사할린과 시베리아의 풍부한 천연가스를 파이프라인을 통해 남북한은 물론이고 잠재적으로는 일본에까지 공급하는 방안과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연결하려는 사업이 대표적입니다. 천연가스는 지구온난화 대비와 탈원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고, 철도 연결 사업은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평화적으로 연결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진보 정당의 가치 및 목표와도 잘 부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 동북아 공동체는 실현 가능하고 무엇을 해야 할까요?
경제공동체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 같고요. 평화안보 및 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에너지 문제에 초점을 맞춰보겠습니다. 일단 동북아 평화안보 체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같은 집단안보체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 기구는 냉전 시대부터 있었던 다자간 군사동맹이기 때문에 동북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오히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를 모델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구는 냉전 시대 헬싱키 프로세스를 발전시켜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 회원국들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북아 평화안보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6자회담을 발전시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회담의 9.19 공동성명에서는 동북아 다자간 평화안보 협력을 지향한다고 합의되었고 이를 위해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실무 그룹도 만들어진 상황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한반도 문제에 꽉 막혀 있고, 또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도 공백 상태에 있습니다. 동시에 한반도 문제 해결에 진전이 있으면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논의가 급물살을 탈 수도 있는 가능성도 잉태하고 있습니다.
‘탈핵’이라는 진보적 관점에서 볼 때, 두 가지 의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첫째는 한반도 비핵화 과정을 동북아 비핵지대와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이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으면서 북한에게 핵무기 폐기를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타당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북한의 핵폐기 완료 시점에 핵우산 정책을 공식적으로 철회하는 조치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남북한과 일본은 비핵화 공약을 명확히 하고 미국, 중국, 러시아 등 핵보유국들은 이들 나라에 대한 소극적 안전보장, 즉 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을 하지 않고 핵보유국 상호간에 핵무기 선제 불사용(No First Use) 정책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을 요구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론 탈원전을 위한 에너지 분야입니다. 이 역시 6자회담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동북아에너지협력기구(Northeast Asia Energy Cooperation Organization: NAECO)의 창설을 제안합니다. 북핵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에너지 제공이 필수적인데, 1994년 제네바 합의에 따라 만들어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이미 문을 닫았고, 6자회담의 실무그룹 가운데 하나인 에너지·경제 실무그룹은 제도화가 미미한 상황입니다. 이에 따라 6자로 구성되는 동북아에너지협력기구의 창설은 KEDO를 대체하면서 에너지·경제 실무그룹을 제도화하고, 협력의 범위를 양적·질적으로 확대함으로써 동북아가 안고 있는 에너지 문제를 다자간 협력으로 풀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구에서 할 수 있는 일로는 북한에게 비핵-재생 에너지 제공 및 북한 핵 관련 시설 및 인력의 전환 협력, 러시아 천연가스 활용 방안 강구, 재생 에너지 공동 개발 및 이용,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이 주창한 ‘아시아 슈퍼 그리드’의 타당성 검토 등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http://www.justicei.or.kr/10?category=637807 [정의정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