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나쁜 채식주의자의 외침
나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재수하는 청소년이다. 학교에서 급식을 안 먹게 된 이후로 채식을 시작했다. 나는 채식주의자 중에서도 계란, 유제품, 해산물은 먹는 페스코다. 채식을 시작한 지는 약 2개월 반 정도 되었다.
냉장고에 있는 콩 햄으로 흔히 채식주의자들이 단백질
보충 등 고기를 대신하여 먹는 것이다. ©오성용
어렸을 때부터 나는 동물을 좋아했다. 동물원에 가기를 좋아했고 천식이 있어도 강아지 키우는 게 꿈이었다. 반면 나는 고기를 매우 좋아했다. 밥 먹을 때는 고기가 꼭 있어야 했다. 나에게 고기는 단지 음식 재료일 뿐이었다. 소, 돼지, 닭이 고기가 된다고는 알았지만, 내 식욕을 위해 고기가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는지는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초등학생 때 고기를 위해 동물이 희생당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열악한 사육환경에서 죽는 날만 기다리며 눈물 흘리는 동물들을 보기가 힘들었다. 열등한 존재를 대표하던 소, 돼지, 닭도 감정과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고기를 먹지 않기로 선언했다. 고기 대신 두부를 구워 먹었다. 물론 고기는 항상 밥상에 올라왔지만 나는 먹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이성을 흔들어 놓는 냄새 때문에 가끔 먹기도 했다.
두부를 먹어가며 육식을 참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주변에서 나의 신념을 짓밟고 체중을 줄이기 위함으로 폄하할 때였다. 이 때문은 아니지만 결국 나는 채식을 포기했다.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개학이었다.
나는 학교를 다니며 급식을 먹어야 했다. 급식을 신청 안 해도 되지만, 도시락을 싸간다면 당연히 부모님은 싫어할 게 뻔하고 부모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 어떠한 권한도 없었다.
어떤 사람은 고기를 빼고 먹으면 된다고 한다. 채식주의자가 먹을 수 있는 건 진짜 별로 없다. 김치도 새우젓이 들어가기 때문에 해산물을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인 경우엔 먹지 못한다.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대신 식물성 식품으로 영양소를 대체해야 한다. 그래서 학교급식에서 동물성 반찬을 빼고 먹다 보면 영양 결핍이 우려된다. 이런 여러 이유로 채식은 학교를 다니면서 한동안 시작하지 않았다.
채식을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막상 시도하기가 꺼려졌다. 나는 문제는 고기를 먹는 게 아니라 비윤리적인 공장식 축산이라고 스스로 정당화했다.
시간이 지나 나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게 되어 급식을 먹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많아졌고 나는 다시 생태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고통과 감정을 느끼는 생명체가 고기를 만드는 기계 취급을 받는 게 싫었다. 고기를 위해,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좁은 틀에 갇혀 본능이 억압되고, 번식을 위해 강간당해야 하는 현실이 싫었다.
이것이 지금 인간 사회인 것도 같았다. 농장동물이 태어날 때부터 고기의 가치로서 여겨지고 평가되듯, 인간도 태어날 때부터 생산 가치로서만 평가된다고 생각했다. 농장동물이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착취당하듯, 사람도 경제성장을 위해 착취당한다고 생각했다. 암컷 농장동물이 번식해야 하는 존재로 여겨져 강간을 당하듯, 여성들도 사회적으로 자식을 낳아야 하는 존재로만 여겨지고 자식을 낳도록 사회적 억압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수컷 농장동물이 태어날 때부터 임신을 못한다는 이유로 처분당해야 하듯, 동성애자들도 임신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배척당한다고 생각했다.
힘 있는 자만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싫었다. 나는 이런 세상에 저항하고 싶었다. 나는 지구 생명체의 일환으로서, 소비자로서 채식을 시작했다.
분명 어떤 사람은 나를 위선자라고 비난할 것이다. 나는 위선자다. 공장식 축산을 반대한다면서 계란, 우유를 먹고, 동물의 고통이 싫다면서 동물실험으로 발전된 과학 문물을 누린다. 내가 반려동물을 위해 구매하는 사료에 공장식 축산으로 생산된 육류가 포함되어 있다. 분명 부정 못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이 조금이나마 더 나아지도록 발버둥을 치고 싶다. 위선자가 되어도 좋다. 비관적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소비를 충족하기 위해 공장식 축산을 하기 때문에 고기 소비를 줄이기만 해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아예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비건 채식을 하고 싶었다. 한국에서 비건으로 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아예 안 하는 것보단 의미가 있을 거 같다는 생각에 육고기만 먹지 않는 페스코로 시작했다.
채식을 하기 위해서 나는 스스로 요리를 해야 했다. 학교가 끝나면 나는 따로 시장에 가 장을 봐야 했었다. 인터넷에서 채식주의자가 결핍되기 쉬운 영양소를 찾고 보충할 수 있는 식재료를 찾아 장을 봐야 했었다. 나는 계란, 우유, 해산물은 먹었기 때문에 다행히 영양결핍이 우려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든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비건의 고통에 절실히 공감이 되었다.
장보기에서부터 위기가 찾아왔다. 아무리 찾아봐도 채식주의자를 위한 식품은 찾을 수 없었다. 물론 페스코는 영양결핍 위험은 적지만, 나는 고기를 좋아했던 사람이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대체 식품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인터넷으로 콩고기를 주문했어야 했다.
인터넷으로 인해 위기는 벗어났다. 해외 식품을 파는 쇼핑 사이트를 보니 채식주의자를 위한 베이킹용 계란 대체 파우더부터 치즈, 아이스크림까지 대체 식품이 비교적 많이 있었다. 해외에는 더 다양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부러웠다.
장을 보고 나서 무거운 짐을 힘겹게 들고 집에 도착했다. 과거 엄마가 장보고 짐 좀 들어달라고 하면 나가기 귀찮다고 거절했었는데, 엄마의 고통이 매우 공감이 되었다. 이제 요리를 해야 하는데 요리는 무슨 장보고 오느라 땀범벅이 되어있고 요리할 체력은 모두 고갈되었다. 좀 소파에 누워 쉬다가 요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부엌으로 갔다. 뭘 해 먹지라는 막막함만 맴돌았다. 그냥 볶아먹으려고 했지만 팬이 무겁고 커서 설거지하기가 싫었다. 결국 샐러드를 해 먹기로 했다. 채소를 씻어 큰 그릇에 두부와 함께 넣고 발사믹 드레싱에 뿌려 통밀 빵과 먹었다. 맛은 없었지만 처음에는 참고 먹을 만했다. 저녁엔 그냥 우유를 시리얼과 과일에 부어 먹었다. 비만이기 때문에 체중조절을 위해 운동을 간다. 운동 갔다 와선 요리가 매우 귀찮았다. 가사노동은 귀찮고 어렵고 힘들다.
약 2주일 동안 그렇게만 먹었다. 계속 그렇게만 먹으니 죽을 거 같았다. 채식을 시작하기 전 점심을 때우기 위해갔던 도시락 식당에 갔다. 메뉴를 뒤져보니 비건이 먹을 수 있는 건 오직 감자튀김 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페스코이기 때문에 참치 고추장 비빔밥과 감자튀김은 먹을 수 있었다. 비빔밥도 소고기 볶음 고추장이 들어가면 못 먹지만, 다행히도 그런 고추장은 아니었다.
채식주의자는 항상 골칫거리로 여겨진다. 밥을 먹으러 가면, 진짜 먹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분식집에 가서 김밥에 동물성 재료를 빼고 먹거나 비빔국수, 일부 전류, 감자튀김 정도나 먹을 수 있다. 나는 일부 동물성 식품을 먹어서 선택권이 상대적으로 좀 더 넓다.
다행히도 요즘은 예전보단 채식이 수월해졌다. 가끔씩 소셜미디어에서 소, 돼지, 닭들이 자유롭게 뛰어노는 영상을 본다. 그럴 때는 왠지 모르게 자기만족감이 들어 행복해진다.
사실 가장 힘든 점은 정신적인 면이다. 한국 사회에선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하는 거 같다. 정치에서도 국민대통합이란 말이 흔하게 흘러나온다. 학교에서는 단체 생활이라는 명분으로 단합 혹은 통합을 외치며 폭력을 가한다. 통합이라는 명분하에 영향력이 약한 사람들은 항상 희생당해야 한다. 채식주의자도 마찬가지다. 내가 채식주의자라고 해서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지 않는다. 피해를 입는 건 채식주의자들이다. 채식주의자들은 고기를 강요당하고 채식주의자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는다.
나는 매우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사이비 종교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전 세계 채식주의자 중 다수가 종교 때문에 채식을 한다고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사이비 종교라는 말은 흔히 비난의 용도로 쓰이며 누가 봐도 비난의 목적으로 썼기 때문에 매우 불쾌했다.
최근에는 집회에 가느라 광장에 자주 갔었다. 광화문 광장은 다양한 시민들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채식주의자도 있고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 죄 없는 닭을 단지 고기로 묘사하고 비난하기 위해서 부패한 정치인을 닭으로 대표하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나는 이런 모습들이 닭을 열등한 존재로 여겨 생명 존엄을 짓밟는다고 느껴져 불편했다. 농장동물,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등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적은 존재들은 흔히 비난과 조롱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이는 수단이 된 당사자에게 혐오로 느껴질 수 있으며 혐오 문화를 조성한다. 무엇보다 원래 그런 존재들을 혐오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비난의 수단으로 사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암울한 시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박함은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사람을 넘어 동물까지도 모두 상처받고 차별당하는 존재는 없었으면 좋겠다.
한국 사회에서는 채식주의자는 없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대부분은 산속에 들어가 사는 스님, 자연인 등 만날 일 없는 사람들만 채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인이 한국 음식을 도전하는 영상에는 항상 고기를 줘보라는 비난의 댓글이 달린다. 그 외국인이 채식주의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안 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나에게 “혹시 채식주의자세요?”라고 묻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른 채식주의자들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 이렇게 물어봐 주면 매우 고맙다. 채식주의자는 스스로 채식주의자라고 밝히기가 조심스럽다. 눈치가 보인다. 사전에 물어봐 준다면 채식주의자라는 존재를 인정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고 편하게 대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질문에는 만약 채식주의자라면 배려해주겠다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은가?
이 사회에서는 식탁에서도 기득권만 존재하고 약자는 쉽게 외면된다. 약자는 기득권에 아부를 해서 좋은 이미지로 보여야 한다. 그럼에도 비정상으로 치부된다. 동등한 정상 취급을 받으려고 하면 기득권은 제한 선을 둔다. 거길 넘으면 올바르지 않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채식주의자도 이 사회의 구성원이다. 지금 이 사회에선 채식주의자들은 먹거리 문제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또한 소비자가 윤리적 소비를 하고 싶어도 선택권이 다양하지 않다. 우리 식탁을 다양하게 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 보장이기도 하며 소비자의 권리이다. 앞으로 채식을 도전하고 싶은 사람들이 쉽게 채식을 도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채식주의자도 당당히 정상 취급을 받았으면 좋겠다. 밥이라도 좀 편하게 먹자.
오성용 기자 ferret123@naver.com
출처: http://www.justicei.or.kr/686?category=671202 [정의정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