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기 청년기자단] [르포] "우리 모두가 백남기다!" 분노한 시민들, 배기훈 기자

[르포] "우리 모두가 백기다!" 분노한 시민들

 

 

<의경 앞에서 피켓을 들고 항의하는 시민>

슬픔을 딛고 분노해야 합니다.”

 

10월 1일 ‘백남기 농민 추모대회’에서 리본을 나눠주던 시민이 남긴 말이다.


지난 2015년 11월 14일 1차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농민 백남기(69)씨가, 317일간 사경을 헤맨 끝에 올해 9월 25일에 숨을 거두었다. 서울대학교병원(이하 서울대병원)에서 사망진단서에 기재한 사망 원인은 “심폐정지, 병사”였다. 그 이후 경찰은 백씨의 시신에 대한 부검영장(압수수색검증영장)을 25일 당일 신청했다 기각되자 의견서 등을 덧붙여 27일 재신청, 서울지방법원의 조건부 승인을 받았다. 부검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유족이 희망할 경우 부검 장소를 국립과학수사원이 아닌 서울대병원에서 진행할 수 있다. 2) 유족이 희망할 경우 유족 1∼2명, 유족 추천 의사 1∼2명, 변호사 1명의 참관을 허가한다. 3) 부검 시 시신의 훼손을 최소화한다. 4) 부검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한다. 영장의 유효 기간은 10월 25일까지이다. 이에 대해 백남기투쟁본부(이하 백남기대책위)에서는 부검을 적극 거부하며 매일 7시 고인이 안치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촛불시위를, 10월 1일 ‘백남기 농민 추모대회’를 혜화 대학로에서 열 것을 밝혔다.


이 기사는 2016년 9월 30일, 10월 1일, 10월 2일, 10월 3일에 취재한 내용을 르포 형식으로 서술하는 기사임을 미리 밝힌다. 시간 순으로 서술하며, 날짜별로 소제목을 달았다.


9월 30일


9월 28일 오후 8시 30분쯤 종로경찰서에서 발표한 “부검영장 승인” 소식을 듣고, 나는 원래 쓰던 기사를 보류하고 백남기 농민에 대한 르포 기사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11월 14일에 백남기씨가 쓰러진 이후 서울대병원에서 진료, 치료한 기록이 모두 있고 사인 또한 명확하므로 부검영장이 통과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한 차례 기각된 뒤 경찰이 영장을 재신청, 통과가 되자 작금의 상황이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기나긴 투쟁이 되리라 직감했었다. 그 상황을 기록으로 생생히 전하고 싶어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우선 대학교에 조성된 분향소 몇 곳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먼저 홍익대학교를 방문하였다. 운동장 앞 게시판에 “추모의 벽”과 대자보가 붙어 있었고, 중앙 도서관 앞에 조촐한 분향소가 조성되어 있었다. “추모의 벽”에는 고인을 추모하는 글을 포스트잇에 적어 벽에다 붙여 두도록 하였다. 글 내용은 고인에 대한 추모의 마음과 국가폭력을 자행한 경찰, 정부에 대한 분노가 주를 이루었다. (개중에는 부검을 강행하는 경찰청장에 대한 욕도 적혀 있었다.) 다음은 벽에 붙은 글 중 일부이다.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가라… 편히 쉬세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꼭 만들겠습니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바랍니다.”, “국가폭력에 분노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편히 쉬세요.”,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운동장 앞 게시판에 조성된 추모의 벽>

 

 

 

<중앙도서관 앞에 조성된 분향소>


분향소에는 접이식 탁상에 영정사진, 향로와 향 한 통, 라이터가 놓여 있었다. 향로에는 방금 불을 피운 듯한 향이 서너 개 정도 꽂혀 있었다. 기둥에는 고인의 약력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영정사진 왼편에는 고인의 사망 경위에 대해 특검을 요구하는 서명지가 있었는데, 예닐곱 명 정도가 서명을 했다. 나는 이곳에서의 취재를 마치고 잠시 묵념을 가졌다.

 

 

다음으로 연세대학교를 방문하였다. 중앙도서관 정문 기둥에 분향소가 조성되어 있었다. 분향소에는 고인에게 가해진 국가폭력 사건에 대한 대자보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고, 홍익대와 같이 향과 향로, 그리고 양초 2개와 방명록이 놓여져 있었다. 아침부터 초를 켜둔 것인지 촛대에 걸린 양초는 이미 녹아 있었으며, 전부 탄 향들이 꽂혀 있었다. 방명록에는 “행동합시다.”, “국가가 책임지고 사과하라” 등의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 벽의 측면에는 인터넷으로 받은 학생들의 추모 문구들을 인쇄한 대자보가 붙어있었다.

 

 

 

<연세대 중앙도서관 정문에 조성된 분향소>

 

 

<온라인으로 받은 추모 메시지 대자보>

 


연세대학교를 끝으로 9월 30일 취재를 종료하였다.

 


10월 1일

 


백남기대책위가 9월 30일 공지한 “백남기농민 추모대회”가 10월 1일 오후 4시에 열렸다. 나는 3시 32분경 혜화역에 도착하여 대회가 열리는 장소인 대학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는 공공운수노조의 성과연봉제 반대 집회가 같이 열리고 있었다.

 

 

<추모대회, 집회 참석을 위해 거리에 나온 시민들>


대학로에는 이미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도로와 인도에 앉아 있었다. 소속 단체, 다양한 곳에서 사람들이 왔음을 알리듯 수많은 종류의 깃발들이 대학로를 수놓고 있었다. 그곳에 모여든 시민들은 분노로 한껏 격양되어 보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백남기다!” 피켓을 들고 있었다. 행렬 맨 앞 연단에서는 공기업의 성과연봉제 도입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국가폭력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나는 추모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 거리로 나오게 된 이유에 대해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라고 물었다.


“정부의 대응 태도가 너무나도 뻔뻔하고 국민의 눈높이에서 이해되지 않습니다. 사건의 피의자인 경찰이 사과와 재발 방지는커녕 부검영장을 신청하는 어불성설인 행태에 대해 많은 분노를 느낍니다.” – 시민(서울 양천구)


“백남기 열사님은 의로운 일에 연대하다 불법적인 경찰의 진압에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백남기 열사님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이 사건에 공감하는 다른 시민과 함께하고자 이 자리에 왔습니다.” – 시민(충청남도 당진)


“약자를 위하는 세상을 위해, 동지들과 의리로 뭉쳐 투쟁합시다.” – 시민(대전광역시)


“추모하는 마음과 분노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모인 시민들이 많은 것을 보니 아직은 이 사회가 희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시민(충청남도 천안시)


“너희(경찰)가 농민 백남기 어르신을 죽였지만, 분명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 분은 농민으로서 살아계실 때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쌀을 키우셨고, 돌아가신 후 우리의 정신을 키워 주셨습니다. 그 분의 세례명 ‘임마누엘’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살아계실 때도, 돌아가신 후에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같은 분이십니다. 생명을 돌보시고 키우시는 하느님처럼…” – 시민 (40대, 서울 양천구)


“서울대 의대가 양심을 지키는 길은 잘못된 사망진단서를 수정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을 때, 비로소 최고 지성이라 자부하는 서울대 의대의 명예가 회복될 것입니다.” – 시민 (40대, 경기도 수원시)

 

 

 

<추모대회에 참가한 노동자연대, 전국언론노동조합>

추모대회에서는 일반 시민뿐만 아니라 전국언론노동조합, 노동자연대와 같은 단체들이 추모대회, 성과연봉제 반대 집회를 지지하는 피켓, 현수막을 들고 참여하고 있었다. 특히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KBS 보도국장에 전화를 걸어 세월호 보도 관련 지시를 한 ‘이정현 녹취록’을 토대로 ‘청와대의 언론장악’ 청문회 개최를 요구하는 서명을 받고 있었다.


단체에 소속된 시민들에게도 물어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여야 합니다. 시민과 노동자들이 앞장선 이러한 파업과 국가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청와대의 언론장악에 대해 청문회를 개최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전국언론노동조합 조합원


“백남기 농민은 국가가 죽인 것입니다. 더 이상 사과, 진상 규명 요구가 아니라 박근혜 정권이 퇴진해야 해결될 것입니다. 더 이상 국회나 정치인들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힘으로 박근혜 학살정권 타도하자!” – 전국노동자정치협회 협회원


“책임자를 처벌하고, 백남기 농민이 목숨바쳐 해결하려고 했던 농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계급이 일어나야 합니다.” – 볼셰비키 그룹 청년회원

 

 

<종로를 행진하는 시민들>

고인을 추모하는 영상, 유족(백민주화 씨)의 편지 낭독 이후 추모대회 결의문 낭독을 끝으로 5 시 30분경 대학로 에서의 추모대회를 종료하고 고인이 쓰러진 종로까지 행진을 시작하였다. 곳곳에서 “백남기를 살려내라!”, “부검시도 막아내고 박근혜정권 심판하자!”와 같은 구호가 들렸다. “임을 위한 행진곡”, “농민가”, “연대투쟁가”와 같은 민중가요를 부르며 전진하였다. 행진 대오는 혜화 대학로, 종로5가, 종로3가를 지나고 백남기 씨가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종각 르메이에르 타운 앞에서 길을 막아서는 경찰과 마주쳤다.

 

 

<종각에서 경찰의 제지 앞에 가로막힌 시민들>

 

<원래 행진 경로>


당초 백남기대책위는 경찰에 항의하는 뜻으로 백남기 씨가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종각 르메이에르 타운부터 경찰청까지의 1.8km 길이를 행진하려고 했으나, 경찰은 행진을 하려는 도로가 ‘교통 주요도로’라는 이유로 위 행진 신고에 대해 10월 1일 아침 백남기대책위에 행진 금지 통고서를 보냈다. 그리고 당일 오후 6시 30분경 행진을 막는 경찰과 대치하였다. 하지만, 대치 끝에 시민들이 경찰의 방어선을 뚫고 종로구청 네거리까지 전진하였다. 당시 행진 행렬의 앞에 계셨던 분을 만나 자세한 상황을 들어보았다.


“종각 르메이에르 빌딩 앞에서 경찰들이 막아 서서 전진을 하지 못하였는데, 신호등 앞 인도에서 일부 시민들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항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의경들이 그 시민들을 둘러쌌습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그 자리에서 연좌를 했습니다. 그 이후 학생으로 보이는 시민 10명 정도가 흰 피켓(우리가 백남기다!)를 들고 종로구청 방향으로 뛰어서, 의경들이 그 학생들도 포위를 하고, 학생들이 소리를 질러서 잡아가는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잡아가지는 않고, 다시 인도 쪽으로 올라오더라고요. 그러니까 경찰들이 르메이에르 빌딩 앞 횡단보도 쪽에 일렬로 서 있었는데, 포위를 하면서 의경들이 빠져나와서 대오가 풀리기도 하고, 그리고 어제 같은 경우에는 경찰이 준비가 안 되어 있던 것 같던데요. (행진을 막느라) 우왕좌왕하다가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해서, 그래서 만약에 밀었으면 뚫렸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걸 못하고 한참 서 있다가 7시 넘어서 20분 쯤인가? 저는 세월호 문화제가 열리는 광화문 쪽으로 갔습니다. 아마 그때 해산한 것 같습니다.”


(주 : 실제로는 르메이에르 빌딩 앞에서 해산한 것이 아니라, 종로구청 네거리까지 전진하였다.)

 

<종각에서 시민들의 행진을 제지중인 경찰>


방어선이 뚫리고 후퇴한 경찰은 종로구청 네거리에서 최후방어선을 구축하고 해산 명령을 하였다. 시민들은 약 400m를 전진하여 그곳에서 진혼굿을 올리고, 헌화식을 가진 뒤 해산하였다. 일부 시민들은 분필을 가지고 와 도로 바닥에 “국가폭력 OUT”, “농부는 하늘의 씨앗”, “경찰과 박근혜는 밥 안 먹고 살 수 있나요? 농부를 죽이고, 국민을 죽이고, 밥 먹고 사나요?” 와 같은 문구를 적었다. 일부 시민들은 의경 대오 앞에서 피켓을 들고 항의하기도 하였다.

 

<헌화하는 학생들>


https://youtu.be/5XWWmuU_75M
<진혼굿 (동영상)>

 

<종로네거리에 모인 시민들>

 

<시민들의 분필 낙서>


나는 행진을 마치고 해산하는 시민 중 시골에서 올라온 농민 분들을 몇 분 만날 수 있었다. 그분들 에게도 질문을 하였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부는 집회를 하면 무조건 진압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왜 집회를 하게 되었는지 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를 하지 않음으로써(들어주지 않음으로써) 농촌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 귀농 농민 (30대, 임실군농민회)


“(정부가) 들어주지도 않는데… 대답해줘도 밥을 주지도 않는데… 하면 뭐 해. – 농민


“우리는 전문 시위꾼이 아니라 농사짓는 순수한 농민입니다. 쌀값에 대해 얘기하러 왔는데 공공노조 얘기 때문에 묻힌 것이 아쉽습니다. 참가한 것에 의의를 둡니다.” – 귀농 농민 (50대, 임실군농민회)


“법보다 사람이, 인권이 우선, 생명권이 우선인데 사람을 죽여놓고 한다는 일이… 생명의 근간인 농민이 생명권의 위협을 받아서 민중총궐기에 참여했는데, 그런 그를 (국가가) 죽였다는 것이 나라의 미래, 존재가치를 걱정하게 하는 일입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정치가 우리를 절망하게 했으나, 부검 영장이 발부된 후 비를 맞으면서 장례식장 야외에서 잠을 청하는 젊은 대학생 친구들을 보며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 농민 (무안군농민회)

 

10월 2일, 10월 3일

나는 10월 1일 대학로-종로에서의 취재를 마치고, 그 다음날 10월 2일에 서울대학교 장례식장을 방문하였다. 나는 저녁 즈음에 장례식장을 방문하였는데, 구름 낀 하늘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장례식장은 병원 내에서도 찾기 어려운 곳에 있었다. 혜화역에서 내려 서울대병원 정문을 지난 후 본관에 들어가 복도를 직진, 별관을 통과하고 밖으로 나와 주차장을 지나고 자그마한 터널을 지나서야 장례식장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장례식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고, 9월 25일부터 지키고 있었다는 사람도 많았다. 장례식장을 지키는 사람들 중 일부는 돗자리를 구해서 앉아 스마트폰으로 소식을 듣고, 무릎 담요를 여러 장 깔아 잠을 청하기도 하였다. 야외에서 스마트폰을 충전하기 위해 릴케이블로 병원 내의 전기를 끌어와 여럿이 사용하는 사람도 있었고, 100,000mAh가 넘는 대용량 배터리를 가져와서 쓰는 사람도 있었다.

 

<장례식장 입구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


나는 장례식장 입구를 찬찬히 둘러보고 분향소가 위치한 3층으로 올라갔다. 고인이 계신 3층 제1분향소에는 많은 조문객들이 조문을 하고 있었다. 입구에 마련된 ‘추모의 벽’에는 많은 조문객들이 다녀갔음을 증명하듯 수많은 추모 문구가 포스트-잇에 적혀 붙어 있었으며, 그 곳에서 자원 봉사자 몇 분이 ‘진상 규명을 위한 특검’ 서명을 받고 있었다. 복도에는 고인과 생전 인연이 있는 가톨릭농민회, 중앙대 민주동문회와 국회의원, 시장 등이 보내온 수많은 조문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분향실 내에서는 4분 정도의 가톨릭 신자분이 성경을 봉독하고 있었다. (고인은 생전 가톨릭 신자였으며, 가톨릭농민회에서 농민의 권익 향상을 위해 활동하였다.) 나는 분향실 주변을 사진으로 찍고 조문을 드렸다.

 

<백남기 농민 추모의 벽>

 

<빈소 안내 모니터 사진, 발인/장지 부분이 비어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띈 것은 1층 로비와 3층 분향실 입구에 설치된 안내 모니터였다. 같은장례식장의 다른 분과 달리 발인, 장지 부분이 비어 있었다. 대책위에서는 고인에 대한 부검 영장이 철회되거나 시한이 만료될 때까지 장례 일정을 무기한 연기한다고 밝혔다. (주 : 부검 영장의 시한이 10월 25일 만료된 직후 종로경찰서에서 부검 영장을 재신청하지 않기로 결정함에 따라 11월 5일에 남은 장례 일정을 치루었다.) 돌아가신 후에도 편히 보내드릴 수 없는 현실에 대해 부조리함을 느꼈다.


이후 나는 빈소를 나와 빈소 주변을 둘러보았다. 빈소 입구 벽에는 어제(1일) 사용한 ‘책임자를 처벌하라!’, ‘우리가 백남기다!’ 피켓과 고인의 사인을 병사로 표기한 백선하 교수에 대한 서울대 의과대학 학생들의 규탄 성명문이 붙어 있었으며, 서울대 의과대학 동문들의 성명문도 같이 붙어있었다. 그들은 성명문에서 의사로서의 양심에 대해 선배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밤. 고인을 지키는 시민들은 잠을 잘 채비를 하고 있었다. 실내, 실외 할 것 없이 시민들은 돗자리를 깔고 얇디얇은 담요 몇 장에 몸을 의지하며 눈을 붙였다. 1층 로비 주변뿐만 아니라 지하 1층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 주변에서도, 영안실 앞 야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힘겹게 잠을 자고 있었다. 어떤 시민은 이런 광경을 보고 “야, 난민이 따로 없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막차가 끊긴 탓에 나도 야외에서 쪽잠을 잤다. 잠을 잔 곳이 야외 돌바닥인 탓에 돗자리를 깔았지만 바닥의 찬 기운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지하 영안실 주변 복도에서 잠을 청하는 시민들>


일어나 보니 시간은 5시였다. 대략 3시간 정도 잤다. 비도 내리고, 바람도 많이 분 탓에 오래 잘 수는 없었다. 나는 밥차에서 음식을 받아 간단한 식사를 하였다. 아침 식사는 컵라면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고인을 지키는 시민들을 응원하기 위해 컵라면, 식수, 담요를 비롯한 생필품들을 택배로 보내주었었고, 자원봉사자 몇 분이 자발적으로 밥차를 운영하고 있었다. 밥차 반대편에는 택배 운송장을 끈에 매달아 두었는데, 그 수가 매우 많아서 직접 세기 힘들 정도였다. (주 : 취재 이후 대책위에서는 물건을 쌓아 둘 공간조차 부족하여 택배를 받기 어렵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10월 7일 다른 투쟁현장에 후원받은 물품 일부를 나눔하였다.) 식사를 한 후 간단히 씻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곳에 비누는 없었다. 손 세정제도 바닥난 지 오래였다. “며칠 째 씻지 못하였어요. 사람들이 세면대에서 머리를 많이 감아서 비누도 떨어졌고..” 화장실에서 만난 어느 시민의 말이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많은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9월 25일부터 고인을 지키러 제주도에서 올라왔다는 학생도 있었고, 퇴근하고 나서 매일 이곳에 와 12시까지 장례식장에 머무르고 있다는 직장인도 몇 있었다. 이 외에도 거의 대다수는 (전부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직장을 가진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미루고, 혹은 집의 편안함을 버리고 춥고 불편한 이곳으로 모인 이유에 대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분노하기 때문에”라고 답하였다. 그들에게서 순수한 사람으로서의 도리, 양심을 느낄 수 있었다.

 

<밥차, 끈에 걸린 택배 운송장>


닫는 글


이 땅에 민주주의의 질서가 확립하기까지, 수많은 열사들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다 세상을 등졌다. 최근 또 다른 열사가 작고하였다. 아직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이다. 하지만 시민들은 불의에 분노하고, 조직하였다. 비록 당장은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함께 슬퍼하고 함께 분노한 사람들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연대하고 있다. 개개인의 힘은 미약하지만, 평범한 시민들이 ‘옳은 것’을 위해 함께 힘을 합칠 때 사회는 변화하는 법이다. 이때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취재 후 희망을 느꼈다.


취재를 마친 이후 10월 25일 부검 영장의 시효가 만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료 직후 종로경찰서의 영장 재신청 포기 입장을 들은 시민들은 안도하였다. 시민이 지켜낸 것이다. 만일 시민들이 이 자리에 모여 지키지 않았다면 영장이 집행되었을 것이다. 함께하면 더욱 강해진다는 희망. 연대하는 시민들이 사회를 바꾼다는 희망을 다시금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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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justicei.or.kr/648?category=671202 [정의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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