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래정치센터 블로그기자단] '세대갈등' 기획기사 "아버지가 말한 '노력하는 모범생' 더 이상 안 통해" 권윤영 기자

<세대갈등 기획기사>

 

아버지가 말한 ‘노력하는 모범생’더 이상 안 통해

 

세 명의 친구 A와 B, C를 만났다. 갓 대학에 들어온 스무 살이라는 것 외에 학교도, 관심사도, 하는 활동도 모두 다른 친구들이었다. 아,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이들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청년들이라는 것이다. 요새 대한민국 청년들은 힘겹다. 그들은 다른 길에는 눈도 주지 않고 ‘명문대-로스쿨/대기업/고시’의 탄탄대로를 걸을 것만을 기대받는다. 그 길의 문은 좁아서 높은 스펙을 맞추는 건 ‘기본’이고, 거기에 자신도 모르는 자기만의 색깔에 맞는 양념이 될 활동들을 넣어야 한다. 갑갑하지만 그 외의 다른 길을 찾기엔 너무 위험하다. 그리고 자조적으로 일명 ‘금수저’ 들은 이런 게 필요 없다며 한탄한다. 지금의 청년들은 맘 편히 부모들의 시대착오적 바람을 따를 수도 없기에 내적인 ‘세대갈등’을 겪지만, 그 외의 다른 길을 찾을 ‘자기결정권’ 또한 없는 세대다.


우선 명문대 진학부터 이야기해보자. 스스로가 신경 쓰지 않더라도 부모님이나 친척, 사회적 분위기로부터의 명문대에 대한 압박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여전히 ‘명문대 진학’은 성공을 위한 첫 단계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청년들의 삶은 우선 자신의 대학이 어디냐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A는 “부모님이 명문대에 진학하지 않으면 금전적 지원을 아예 하지 않겠다고 했다”며 “소위 ‘지잡대’를 나온 애들보다 명문대 출신이 인성도 더 좋을 거란 근거 없는 학벌주의적 편견을 가진 이들도 주변에 많았다”고 말했다. B 역시 “명문대를 가야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더 수월하게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부모님이 부담을 주셨다”라며 C와 함께 공감했다.


그들에게 부모들의 생각 즉 ‘이러한 학벌주의, 엘리트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큰 권력을 갖고 주도권을 형성하고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하느냐는 질문에는 모두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런 상황이 더 확대되었으면 확대되었지 개선되지는 않을 거라며 부정적인 반응들을 내놓았다. C는 “해체, 확대보다는 질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더 교묘하고 인지하지 못하게 학벌이 작용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확대라고 봐도 무방하긴 할 것 같다. 이전에 유럽에 가서 노동자 한 분을 만났는데 자기는 평생 대학교수를 만난 적이 없고 평생 그런 사람과 밥을 같이 먹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라 말했는데 그 씁쓸한 현실이 한국에서도 재현되고 있는 것 같다”며 의견을 피력했다.


 A 역시 “해체되려면 궁극적인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인식해야 하는데, 지금의 청년들은 입시도 취업도 힘들고 사회 자체가 암울하니 현 교육제도가 어떤지, 이에 대한 기성세대의 책임은 어떠한지를 인식하기도 어렵고 인식하고 있다 해도 이를 행동으로 옮길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한다. 인식한다 해도 지금 당장은 먹고살기 힘드니 내가 명문대 가고 대기업 가서 살아남는 게 중요하니까. 청년으로서 외쳐야 하는 사회적 목소리를 현실적 문제 때문에 잠시 미뤄두다 보면 어느새 그 청년들이 기성세대가 되고, 이게 반복되니 해체될 수가 없는 거다”며 각박한 현실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학벌이 중요한 권력으로 작용하는 현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이들이 부모님의 ‘노력해서 명문대를 가면 성공 한다’는 공식마저 인정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아니, 오히려 부모님 세대와 지금 세대가 다르다는 것을, A의 말대로 “진학 방식이 이전 세대와 달라졌다는 걸, 현세대의 청년들이 단순히 앉아서 공부하는 것 외에 많은 것을 요구받는다는 걸 부모님들은 이해하지 못 하는” 것에 분노한다.


아버지, 어머니 시대에는 공부해서 소위 말하는 SKY 대학에 들어가면 사회적, 물질적 성공은 손에 들어오는 거라 믿었다. 공부 열심히 해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가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스펙 자체도 다르다. 과연 부모님 세대에 대기업에 갔던 명문대 출신 학생의 스펙이 현재 그 대기업에 원서를 넣었다 떨어진 학생의 스펙보다 좋을까. 요새와 같은 스펙 상향 평준화 시대에, 스펙만 보면 후자가 더 월등할 거라 감히 예측한다. 예전과 경쟁의 강도가 달라졌다. 학점 인플레의 난관을 뚫고 항상 4점대의 성적을 유지해야 하며, 경력이 될 대외활동도 부지런히 쌓고, 어학 성적이며 각종 자격증도 따야 하는 지금의 세대지만, 부모님들은 이를 모른다. 안다 하더라도 개천에서 용 나는 게 가능했던 이전의 환상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이전 세대보다 심해진 스펙 경쟁이, 청년들에게 절망감을 주는 이유는 결국 스펙을 쌓는 능력 역시 돈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나 과외 등으로 스스로 등록금을 벌어야 하는 대학생들은 스펙을 쌓을 시간조차 없다. 그보다 조금 여유가 있더라도 돈이 더 많을수록 더 좋은 스펙을 쌓을 수 있는 건 당연하다. A는 고등학교 동아리 활동 중에 독일에 다녀와야 했다. 비행기와 체류 값으로 오백만 원 가까이 들었다. 좋은 경험이긴 했지만, ‘돈으로 스펙을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대학 입시 때는 주변에서 몇 백만 원, 천 만 원 하는 입시 카운슬링을 받는 급우들을 보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A는 그런 카운슬링을 받은 애들이 확실히 대학을 더 잘 간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 학벌은 중요한 권력이고 계층이지만, 단순히 예전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란 어려워진 것이다.


‘노력하는 모범생’, 즉 교육을 통한 계층의 사다리 타기가 이제는 환상이라는 것은, 각종 통계에서 잘 드러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행한 <사회 이동성 복원을 위한 교육정책의 방향> 보고서 자료에 따르면 서울 출신 서울대 입학생의 특목고 출신 비율은 2002년 22.8%에서 2011년 40.5%로 크게 늘었고, 강남 3개 구(강남·서초·송파) 출신은 25.2%로 전체 입학생 중 약 3분의 2가량이 특목고 및 강남 3구 출신이었다. 서울지역 고1 학생의 가구소득 역시 학교 유형별로 큰 차이가 났는데, 특성화고의 경우 500만원 초과인 집은 4.8%, 200만원 이하인 집은 57.0%인 반면 특목고는 반대로 500만원 초과인 집이 50.4%, 200만원 이하인 집이 15.0%에 불과해 명문대, 특목고 진학률에 계층 간 격차가 심화됨을 보여준다.


이러한 통계 자료를 들이댈 것도 없이, 청년들은 이미 이 문제를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 요새 많이 쓰이는, 부잣집에서 태어난 이들을 가리키는 ‘금수저’라는 말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나 SNS에 가면 금수저에 대한 글이나 댓글이 참 많다. 그들의 결론은 하나다. “이 나라에선 밑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금수저로 태어나기만 하면 끝이다!” 이 시대 청년들의 좌절감과 그 원인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말이 있을까.


이처럼 청년들의 좌절감과 오프라인에서는 표현하지 못한 청년들의 내적 세대갈등을 나타내는 또 다른 온라인 단어는 ‘헬조선’이다. 한국이란 나라가 지옥 같다는 거다. 신동아에 실린 헬조선에 대한 기사에 달린 기성세대들의 반응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멍청한 세대가 또 있을까? 놀고 즐기고 얻어 처먹는 데 익숙한 거지들…. 복에 겨운 놈들”“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들도 서로 다르다. 잘난 놈 있고 못난 놈 있고 부지런한 애, 게으른 애…. 머리 좋은 애를 끌어내려 못난 애와 맞출 수는 없다.”“다 배때기가 불러서 그래. 어렸을 때 밥 한 번 굶어본 적 없고 고생해본 적이 없으니 정신력이 나약해질 수밖에” 이는 ‘노력하는 모범생’ 논리의 연장선이다. 노력하면 되는데 너희 세대는 배가 불러 정신력이 나약하니 되겠느냐는 것이다. 청년들은 이에 ‘하라는 대로 노력해도 이 사회는 불가능하다’고 맞서는 것이다. 세대갈등은 이렇게 심화된다.

 

 

 

▲ 신동아에 실린 헬조선에 대한 기사 헤드,

청년들의 좌절감을 보여준다.

 

물론 청년들이 다른 길을 찾아볼 의지, 사회를 바꿀 의지도 없이 무작정 비난만 한다고 나무랄 수도 있다. 그러나 도대체 다른 길을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명문대-로스쿨/대기업/고시’에서 벗어난 다른 길은, 곧 ‘비정규직’으로 인식되고 이는 불안정하고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받아들여진다. 사회적 안전망이 뒷받침되지 않은 사회에서 이는 곧 추락을 뜻한다. 포털 사이트에 당장 ‘비정규직’이라 치고 기사 제목만 쭉 훑어보라. 고공농성, 과로로 인한 사망, 실업, 고용안정…. 다른 길을 찾아보라는 건 자살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진다. 그리하여 좁고, ‘금수저’들에게 밀리는, 무한경쟁의 숨 막히는 궤도임을 알면서도 청년들은 그 길에 오를 수밖에 없다. 그 궤도 안에서 사회 변혁을 위한 목소리를 내는 건 꿈도 꿀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미 우리 세 청년의 말 속에 답이 있다. 기성세대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그들의 세대와 청년의 세대가 다름을 알고, 기존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하여 ‘노력의 부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던 우리 사회 계급의 하층에 존재했던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리고, 이들이 사회적 약자가 된 것이 절대로 노력하지 않아 명문대에 못 가고, 좋은 직장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에 있다는 점을 인정함으로써 이들을 위한 안전망을 마련해줘야 한다. 청년들에게 도전했다가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확신을 사회적 안전망을 통해 보여주어야 청년들도 명문대에 목숨 걸지 않고 스스로 길을 결정할 수 있다. 청년들 역시 이 상황에서 할 방법이 있다. 아무리 현실이 각박하더라도 계속 사회에 대한 관심과 희망을 놓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고통 받는 자의 힘은 언제나 연대에 있다. 청년들이 힘든 것은 그 개인이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시대 이 땅에 청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힘든 자들끼리 연대하라. 연대한 청년들은 강하다. 아무도 그들을 무시할 수 없다. 기성세대와 소통하며 함께 바꿔나갈 수 있다. 연대에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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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justicei.or.kr/451?category=671202 [정의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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