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 속 청년 취업 기획기사>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공무도하가(公務渡河歌)
1. 공무도하가 – 공시생의 증가
우리나라의 고대 가요 중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라는 작품이 있다.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죽었으니,
장차 임을 어이할꼬.
4구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님이 물에 빠져 죽은 것에 대한 슬픔을 말하고 있다. 사실 따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자주 봤던 작품이기도 하다. 공무도하가는 각종 노래와 소설, 영화 등의 제목과 모티브로 활용되어 오늘날까지 사랑을 받고 있다. (대표적으로 2014년에 개봉한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할아버지·할머니의 사랑을 영상에 담아 많은 이들을 울렸다)
이러한 ‘오래된 사랑 노래’를 주섬주섬 꺼내고 있는 지 누군가 이유를 묻는다면 그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라는 제목에서 ‘공무’라는 말에 꽂혔기 때문이라는 것이 첫째 이유요, 2015년에 들어 청년실업률이 10%를 넘어가는 판국에 주변의 많은 취업준비생들이 너나할 것 없이 준비하는 ‘취업의 문’이 바로 ‘공무원시험’이라는 점에 주목을 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흔히 ‘9급 공무원 시험 준비생’을 ‘구준생’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에 관련하여 15년 5월 3일,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구준생의 하루’라는 제목으로 심도 있게 다루었으니 참고해볼 법하다)
지난 6월 말, 기자가 인터뷰를 한 9급 공무원은 대학 때 전공이 사회학이었다. 사범대학에 가서 사회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사범대학에 진학하지 못해 차선책으로 사회학을 전공했다는 그는 대학교 4학년 때와 졸업 후 1년, 총 2년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 9급 공무원이 되었다. 3년 이상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단기간에 공무원이 된 편인 셈이다. 2년 동안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셀 수 없이 많이 들었지만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공부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7월 초, 아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9급 공무원 시험 준비생 한 명을 인터뷰했다. 대학 때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올해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 ‘햇병아리’다. 대학 때 영문학을 전공한 이유도 딱히 가고 싶은 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밝힌 그는 졸업 후 학교에서 도서관 조교 일을 하면서 학교에서 일을 하는 것에 대한 흥미를 느꼈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일반 행정일을 하는 것이 적성에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현재 교육행정직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자신이 불안한 점이 있다면 주변 친구들은 취업을 해 일을 하고 있는 데 본인만 아직 준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과 만약 오랜 기간 동안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명절 때 고향에 내려가 친척들 볼 면목이 없을 것 같다는 걱정을 미리 하고 있었다.
이처럼 누구나 주변에 몇 명쯤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를 두고 있다. 그 친구들은 어느새 우리 주변을 이루는 풍경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2. 나와 영자, 그리고 당신
계간지로는 드물게 1만부 이상 판매되어 화제가 되었던 계간 문학동네 81호에 실린 김훈의 소설 「영자」를 보자. 「영자」는 노량진의 학원가에서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구준생'들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구준생인 ‘나’는 관리비를 아끼려 남녀동거를 알선해주는 인터넷 카페를 이용하게 되고 몇 번의 후보들을 거쳐 영자를 만나게 된다. 보증금과 월세는 내가 내고 관리비는 영자가 내는 방향으로 동거에 합의를 하고 살기 시작한다. "구준생들의 주거 문제와 성생활을 동시에 해결하는 좋은 방안이라며 널리 확산되기를 바란다“라는 글이 달릴 정도로 그의 동거 제안 글은 카페 내에서 이목을 끈다.
소설은 ‘나’와 영자의 생활을 무미건조하게 묘사한다. 아침 일찍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고 각자 밥을 먹고, 늦은 저녁에 집에 들어와 말없이 섹스를 함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런 생활 속에서 이뤄지는 둘의 만남과 아무렇지도 않은 헤어짐이 그다지 현실과 다르지 않은 그림을 그려낸다.
금니가 가난을 말해주지 않더라도, 이영자가 이 세상에서 엉덩이를 붙일 땅 한 뼘이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사람은 서서만은 살 수 없고 엉덩이를 붙여야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날 나는 이영자를 보고서 알았다. 이영자는 나의 먼 혈족 같기도 했고 눈앞을 막아선 절벽 같기도 했다... (33p)
점심을 먹으려고 노점상 앞에 줄을 서 있던 구준생들이 흩어졌다. 노점상 여자들이 악을 쓰며 용역반 사내들을 가로막았다. 김나는 흰 쌀밥과 국물, 단무지, 시금치가 길바닥에 쏟아졌고 일회용 컵이 바람에 날려갔다. 내가 오므라이스를 주문해서 먹기를 마칠 때까지 골목 전체의 노점들이 뜯겨져서 ‘공무수행’트럭에 실렸다. 나는 길바닥에 쏟아진 밥과 식재료 들을 보면서 오므라이스를 먹었다. 노점상에서 먹으려던 구준생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다. ‘공무수행’트럭이 떠날 때 육십대 노점상 남자가 용역반 사내들에게 매달려서, 살려줘 살려줘, 라고 외쳤다. 용역 사내들이 육십대 남자를 밀쳐 내고 트럭 적재함에 올라탔고 트럭은 떠났다. 구청 청소부들이 길바닥에 쏟아진 흰밥과 식재료들을 쓸어냈다. 육십대 노점상 남자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사라진 트럭 쪽을 향해 살려줘 살려줘, 라고 외쳤다. 나는 오므라이스로 점심을 먹고 나서, 영어, 국어, 국사 강의를 들었다. (39p)」
눈앞에서 ‘공무’집행으로 인해 자신들의 끼니를 저렴한 가격에 해결할 수 있었던 노점상들이 뜯겨나가자 구준생들은 조금 더 돈이 드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끼니를 해결할 뿐이다. 그들에겐 눈앞에서 벌어지는 살벌한 풍경보다 당장 한 시간 뒤에 있을 강의가 더 중요한 것이다. 이들을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목표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곳이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엉덩이 하나 붙일 곳 없는 영자, 영자보다는 조금 더 나은 형편이지만 똑같이 구준생인 ‘나’, 는 ‘공무원’이 되길 원하는 약자이고 살려줘 살려줘 외치는 노점상 모두 약자라는 사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약자들에게 ‘공무’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매달리고, 그렇게 뜯어내고 또 뜯겨나가는 것일까.
영자와 ‘나’에게는 밥벌이의 수단 혹은 나잇값과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동아줄과 같을 것이며, 노점상들에게는 생계를 위협하는 상위포식자라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소설 속의 ‘나’와 영자, 노점상은 제쳐두고 당신과 나, 우리에게 ‘공무’ 또는 ‘공무원’이란 어떤 것인가? 타성에 젖은 관료주의체제의 표본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도움을 주는 고마운 사람들일 수 있고, 단순히 구직활동에 있어서 철밥통을 보장해주는 신의 직장으로 볼 수도 있다.
국가나 공공단체의 일이라는 뜻을 지닌 공무(公務)는 가난한 이들에게 최저생계비를 주기도 하고, 장애인들의 발이 되어주기도 하며, 국민의 각종 민원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가장 꽃다운 청춘(靑春)을 골방에서 몇 년이고 보내게 하며, 한 가족의 가장들을 거리에서 울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도 공무는 적법한 절차를 통해 수행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공무집행에 법의 잣대를 들이대기 전에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법이 존재한다’는 말처럼 공무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을. 공무를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공무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3. 강을 건너자
고전 가요 공무도하가의 화자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하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님은 그 강에 휩쓸려 죽어버렸다. 2015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새롭게 공무도하가를 부른다면 어떤 내용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우리는 강변에서 그저 발을 동동거리며 안돼 안돼 외치는 사람일까, 아니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강을 건너고 있는 사람일까.
누군가는 발을 동동거리며 안타까워하고 있겠지만, 누군가는 토익이라는 강을 건너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공모전, 봉사활동, 인턴, 군대 그리고 누군가는 공시(公試)라는 강을 건너고 있을 것이다.
각자 건너야 하는 강에는 다리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돌아갈 수도 없다. 강물에 떠내려가 죽느냐 아니면 그 강을 건너느냐 두 결과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모두들 강을 무사히 건너자. 우리가 이 ‘시대’라는 강물에 휩쓸린다면 옛 노래인 공무도하가만 또 다시 허망하게 울려 퍼질 뿐이다. 심지어 아무도 우리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 강을 기필코 건너야만 한다. 앞서 강을 건넌 이들은 저 멀리 떠나 보이지도 않아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 너무나 안타깝다. 그래도 우리의 삶을 걸게 만드는 이 혹독한 강을 건너자. 그리고 뒤에 따라올 이들을 위해 뒤돌아서자. 그들이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다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최소한 우리처럼 목숨을 걸고 이 강을 건너는 일은 없도록 선배 된 입장에서 다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것은 곧 우리는 앞서 강을 건넌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앞서 강을 건넌 자들과 그들이 방치해 둔 강을 저주하며 노래만 부를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출처: http://www.justicei.or.kr/411?category=671202 [정의정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