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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미래정치센터-프레시안 공동게재] 폭력과 평화의 이분법

 

 

 

 

 

 

 

                                                                                                                                                

 

조성주 (미래정치센터 소장)

 

 

지난 5일, 2차 민중 총궐기 집회가 있었다. 물리적 충돌이 있었던 1차 집회에 비해 평화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집회 후 평화적 시위에 대한 자찬 또는 '평화' 집회라는 명분이 민중 총궐기의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논쟁은 예고된 3차 민중 총궐기 집회와 정부와 새누리당의 노동법 개악 강행 조짐으로 인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이 기회에 민주주의 체제에서 저항의 방식에 대해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은 1차 민중 총궐기 집회에서 가장 폭력적이었던 집단은 경찰과 정권이었다는 점이다. 한 농민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 수준의 폭력이 벌어졌음에도 경찰과 정부는 사과 입장 또는 유감 표명조차 없었다. 심지어 대통령은 시민들을 테러리스트에 비유하는 망언을 쏟아냈다. 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책임자에 대한 징계와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논의에 앞서 나는 우리가 해야 하는 논쟁이 근대 이후 제기된 체제의 폭력성과 저항적 폭력의 정당화의 관계에 대한 학술적 탐구가 아니기를 바란다. 그것은 사후에 학자들이 정리할 문제다. 논쟁의 핵심은 행동에 앞서 내려야 하는 정치적 입장과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사울 D. 알린스키가 정치적 싸움에서 '수단과 목적의 윤리'에 대해 다룬 이야기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알린스키는 사람들이 정치적 싸움에서 수단과 목적의 윤리를 다루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수단과 목적 간의 윤리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특정한 목적이 이 특정한 수단을 정당화하는가?"라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알린스키의 말을 우리에게도 적용해보자. 그 특정한 목적, '박근혜 정권의 퇴진'이라는 구호가 분노 표출의 하나의 상징을 넘어 실질적인 목표라면 물리력과 폭력은 정당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단의 정당화만큼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그 특정한 목적이 정권의 물리적인 퇴진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다양한 시민들의 불만을 표출하고 정부의 정책 방향을 수정시키는 것이라면 수단은 달라져야 할 것이다. 또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윤리도 차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저항의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이 '절대악'으로 금지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상황에 따라 폭력을 사용할 수 있고 이미 사용하고 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해고된 노동자들의 절박한 고공 농성은 폭력적 성격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굳게 닫힌 공장 철문을 열고자 하는 몸부림은 그 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폭력의 한 단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권이라는 특정한 목적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택한 수단은 때로 정당화될 수 있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폭력을 사용해야 할 때는 그만큼 우리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폭력이냐 평화냐, 합법이냐 불법이냐가 아니라 여전히 이 특정한 목적이 우리가 사용하는 이 특정한 수단을 정당화해주는가이다.

 

수단과 목적에 대한 알린스키의 다음과 같은 지적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수단과 목적의 윤리에 대한 사람의 관심은 그가 갈등의 현장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나 하는 거리에 비례한다."

 

즉, 절박한 현실의 갈등으로 저항하는 사람들보다 그 갈등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윤리 문제에 더 집착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지적은 폭력과 평화라는 이분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입장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현재 집회의 수단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갈등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관전자들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그렇게 편의적으로 싸움의 당사자와 구경꾼의 이분법을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결코 그렇지 않다. 알린스키의 이 날카로운 지적을 역으로 해석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것은 우리가 제기하고 있는 특정한 목적, '민중 총궐기'라 이름 붙여진 이 집회가 추구하는 목적과 목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절박함으로 인식되고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결국 그 갈등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경꾼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가를 두고 벌어지는 정치적 싸움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만약 더 많은 사람들이 갈등의 구경꾼 또는 당사자로 들어올 수 있었다면 애초부터 폭력은 문제시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사소한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해당 집회에 참석한 10여만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의 다수에게 이것이 중요한 문제와 갈등이 아니었거나 또는 그렇게 인식될 만한 토대가 부족했다면 결국 수단의 합리성 또는 합법성만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게 된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알린스키는 또 이렇게 지적한다.

 

"윤리에 대한 관심은 이용 가능한 수단의 숫자에 비례해서 커지며, 그 역 또한 성립한다."

 

2015년 12월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우리는 마크 트웨인의 묘사처럼 "네 개의 에이스를 들고 있는 기독교인의 침착함"을 가질 수 없다.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민주 정치와 각 제도, 언론이 모두 무용하다는 전제가 우리로 하여금 이용 가능한 수단의 숫자를 줄여버리고 만다. 그리고 결국은 '폭력'이나 '물리력'과 같은 제도 밖의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패'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가 가진 것이 전혀 없는가? 어쩌면 시민들이 느끼고 있는 수단의 선택에 있어서의 무력감은 현재의 제1야당의 무능과 진보 정치의 미진한 역량, 그리고 사회운동의 무력함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문제의 본질은 집회의 형식이나 전술이 아니라 대안의 부재가 아닌가 한다.

 

마지막으로 집회의 폭력을 둘러싼 이런 논쟁 역시 우리를 성숙시키고 강하게 만드는 또 다른 '수단'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수단이어야 한다. 그러니 더 논쟁하고 더 토론하자.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중 누가 옳고 그른가의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의 저항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더 나은 행동의 근거를 마련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충분히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조금 더 강해져 있을 것이다. 

 

 

(2015년 12월 9일에 프레시안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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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justicei.or.kr/517?category=679169 [정의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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