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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칼럼

  • [미래정치센터 칼럼]저녁에 먹는 아침식사, 그리고 ‘행복의 제도화’

 

 

 

 

 

 

 

 

정미나(미래정치센터 전문위원)

 

20대 후반, 직장생활 5년차

 

얼마 전 미용실에 갔다. 자리에 앉아서 조성주의 ‘청춘일기’를 꺼내드니, 디자이너를 보조하는 어린 직원이 그 책 재미있냐고 물었다. 반가운 마음에 조성주를 아시냐고 물으니, 전혀 모른다는 답이 왔다. 제목에 눈길이 갔나보다. 그래서 책을 덮고 물어봤다. 이쪽 일 힘들지 않냐고. 그랬더니 덤덤하게 “힘들죠,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밤 11시에 첫 끼를 먹을 때도 많았어요.”

 

요즘 우리 화두는 청년문제이다. 특히, 광장밖에 있는, 노동운동 밖에 있는 노동자들. 이런 상황을 적나라하게 대변하고 있는 청년이 바로 이 친구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우리가 구상하고 있는 정책들에 대해 물어봤다. “이직이 잦을 텐데, 고용보험 가입이 되면 좋지 않겠어요?” 그랬더니, 내가 손님인지라 쉽게 답을 못하다가, 이내 “글쎄요.. 이쪽 업계는 오히려 일할 사람이 부족해요. 직장은 쉽게 구해요. 문제는 보통 11개월 단위로 계약을 해요. 퇴직금 안 주려고. 고용 보험은 생각도 안 해 봤어요. 월급 안 밀리면 다행이죠”

 

더 이상 말하는 것이 무색했다. 20대 후반에 이쪽 업계에서 일한지 5년이나 됐다는데, 아직도 늦은 저녁에 첫 끼를 먹고, 퇴직금은 꿈도 못 꾸고, 월급 꼬박 받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청년에게, 고용보험 얘기나 하고 있자니 민망해졌다. 일자리는 많다니 청년 의무고용할당제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고용보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내 다시 물었다. 직장을 옮기면서 가장 오래 쉰 기간이 얼마나 되냐고. 거의 쉰 적이 없고, 3주 정도가 가장 오래 쉰 기간이었는데, 그때 이후로 절대 쉬지 않는다고 했다. 그 정도 쉬고 나니 빚을 지게 됐다는 것이다. 이 일을 하면서 돈을 많이 모을 수 없었고, 월세와 이자, 핸드폰 비를 내고 나니 도저히 생활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친구는 어떤 조건의 직장이든 당장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청년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책은 무엇일까. 실직 그 자체가 삶의 나락을 의미해서 단 하루도 쉴 수 없고 퇴직금은커녕 밥도 못 챙겨먹는데, 그렇게 해도 저축조차 할 수 없어서, 성실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 청년들에게 국가는 무슨 의미일까.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여러 제도들, 퇴직금이든 4대 보험이든 최저임금이든, 이 친구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그렇다고 어떻게든 4대 보험에 가입하라고, 고용주를 고발하라고, 최저임금, 질 좋은 일자리를 위해 싸우라고 할 수도 없었다. 투쟁은 먹고살기 위해 바쁘고 지친 한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짐이었다.

 

순간적으로 성남시와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청년배당금이 떠올랐다. 아마 이 역시 이런 맥락에서 고려됐을 것이다. 즉, 개인에게 제도 변화를 위한 무거운 짐을 지우기보다는, 일단 당장의 소득을 올려주는 것이다.


행복한 나라, ‘행복의 제도화’

 

하지만, 여전히 찜찜하다. 과연 이것이 지금 이 시대 청년들에게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청년 문제는 비단 실업 그 자체만은 아니다. 더욱이 청년문제는 19세에서 24세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논의되는 청년배당금은 다양한 위기를 고려한 정책은 아니다. 지자체 차원에서 당장 어려운 청년들에게 조금이나마 숨통을 트여 주고자 한다면 이 역시 반대할 일은 아니나, 지속가능하고 근본적인 대안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엄격히 말해서 이것은 높은 수준의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혜 대상은 상당히 선별적이면서도 위기관리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수혜대상이 되려면, 일단 특정 나이(서울시, 성남시)이어야 하며, 실업상태 중에서도 더 다급한 처지임을 증명하여 선발돼야 한다(서울시의 경우). 그렇게 6개월이든 1년이든 배당을 받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를 통해 청년의 ‘어떤’ 위기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삶의 위기는 다양하다. 어떤 이에게는 실업이, 어떤 이에게는 주거가, 빚이, 건강이, 혹은 가족부양이 혹은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위기를 야기한다. 한 개인이 인생 곳곳에서 처할 수 있는 위기는 다양한 성격을 띠며 그 위기의 순간이 절망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국가 정책의 주요한 목표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 상황을 다루는 정책은 높은 수준으로 제도화돼야 한다. 즉 예측가능하고 안정적이어야 하며, 위기에 처한 국민 모두를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제도는 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일종의 규칙과 규범으로서, 내가 인식하지 못한 채 내 삶을 규정하고 있는 것들이다. 빨간불이 켜지면 멈추듯이, 8세가 되면 초등학교에 가듯이, 병원에 가면 의료보험증을 내밀 듯이, 높은 수준의 제도화는 그 제도가 언제 바뀔지 고민하지 않고 그냥 그 규칙에 맞춰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파란불이 정지신호가 될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고, 8세에 초등학교를 못가는 날이 올 것이라고 염려하지 않는다. 이미 제도화 수준이 높아서 인식할 필요도 없이 우리 삶의 일부가 됐기 때문이다.

 

결국 제도는 단순히 국가 정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처럼, 없으면 티가 나지만, 있는 것이 너무 당연한 그런 것이다. 따라서 높은 수준의 제도화는 ‘삶의 제도화’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제도가 많으면 그 국민의 삶 자체가 불행하고, 좋은 제도가 많으면 국민의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이다. 즉, 좋은 제도의 제도화 수준이 높을수록 국민의 ‘행복’도 ‘제도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북유럽 복지국가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그 나라 자체가 아니라 그 국가들의 좋은 제도들이 그들 국민의 삶을 공기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그 나라의 국민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본적인 삶의 질이 보장받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우리보다 높은 수준의 행복이 제도화돼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청년문제를 국가가 해결한다고 할 때는, 한 개인이 처할 수 있는 위기를 분류하고 그 위기의 특성에 맞게 관리 가능한 정책, 그리고 특정 위기에 처한 모두에게 적용될 수 높은 수준의 제도화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특정 위기가 발생했을 때 공기처럼 내 삶에 적용되는 제도가 정착되어야, 이것이 비로소 우리 모두의 제도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될 때 국민 모두가 최소한의 ‘행복’을 보장받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건강보험은 대표적인 예이다. 국민 누구나가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보편적이지만, 건강이라는 위기를 특정하고 있기 때문에, 아픈 사람이 혜택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선별적이다. 이런 방식으로 국민 누구나를 대상으로 하되, 한 개인이 처할 수 있는 위기를 특정한 보편복지적 제도가 확대돼야 한다. 따라서 실업에 대한 지속가능한 제도적 대안은 현재로서는 ‘고용보험’일 것이고, 한국사회에서 청년 실업의 심각함을 고려해 볼 때, 고용보험은 시급히 건강보험 이상의 높은 수준으로 제도화 돼야 한다. 고용보험이 실직자 모두의 대안이 될 수 있도록 자발적 실업을 인정하고, 수급기간을 늘려서 가입하고 싶은 제도로 만들고, 가입 대상자도 넓혀서 실업이 절망이 되지 않도록 고용보험을 높은 수준으로 제도화해야 한다. 이것이 질 좋은 일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통계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점차 주거와 부채 문제에도 확대되어야 한다. 청년을 위한 정책이라면 청년들이 처한 위기를 특정하고 그 위기에 처한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늦은 저녁에 첫 끼를 먹는 그 청년도 보다 좋은 일자리를 위해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제도를 만들 책임은 한 개인에게 있지 않다. 좋은 제도를 만들기 위한 투쟁은 개인이 아니라 정치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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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justicei.or.kr/506?category=567220 [정의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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