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 (미래정치센터 기획실장)
청년희망펀드가 출시되고 박근혜 대통령이 이 펀드에 가입을 했을 때 실소 밖에 안나왔다. 정부는 올 올해 내내 청년고용을 위해 노동개혁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이제 얻을 것을 다 얻었다. 공공기관은 이미 임금피크제를 50% 이상 도입했고, 민간에서도 속속 임금피크제 도입을 노-사가 합의하고 있다. 고령노동자들의 임금을 깎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저성과자해고도 노-사-정이 합의를 했다. 정부의 말대로라면, 이제 내년부터는 청년 일자리가 쏟아져야 한다. 그런데 왜 굳이 민간의 손을 빌려 펀드까지 만드는 것인가?
청년희망펀드 출시는 결국 자백과 같다. 임금피크제나 저성과자 해고가 유효한 고용창출 수단이 아니라는. 물론 이 제도들은 그 효과를 의심받은 지 오래다. 정부가 7월 발표한 <청년 고용절벽 해소 종합 대책>에서 고용지원금 등으로 임금피크제 실시를 지원해 만들겠다는 일자리는, 공공부문은 최대 8천 개였고 민간은 3만명(연간 1만명) 규모였다.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렀으면서 만들 수 있는 일자리가 고작 이 정도? 그래서인지 정부는 임금피크제로 13만개의 청년일자리가 생긴다고 여기저기 광고하기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논박되었다. 55-59세 고령 노동자가 모두 정년까지 직장에 다니고, 기업이 인건비 절감비용 전액을 청년 신규고용에 쓴다는 식의 불가능한 전제로 만들어진 전망치였기 때문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은수미 의원은 이를 지적하며 임금피크제로 늘어날 일자리가 최대 8100명 규모라고 봤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임금피크제는 이미 도입이 시작됐다. 지지여론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여름 내내 각종 조사에서 임금피크제 찬성여론은 50-60%를 상회했고, 청년층에서도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재밌는 점은 그렇다고 해서 청년층이 정부 주장을 그대로 믿고 있지도 않다는 점이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8월 18일 발표한 ‘청년 의식 조사’에서 20-34세 청년층의 70.3%가 임금피크제 도입을 찬성했다. 하지만 같은 조사에서 임금피크제가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될지 묻는 질문에는 75.3%가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 답했다. 정부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고 있는 청년은 소수다. 하지만 다수는 어떤 식으로건 앞 세대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다.
이 지점을 영리하게 파고든 것은 정부다. 임금피크제는 ‘세대간 상생고용’ 같은 그럴 듯한 말로 포장됐고, ‘함께 살자’는 말은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의 언어가 아니라 정부의 언어가 됐다. 대신 노동운동과 진보정치는 ‘노동개혁’에 대항하기 위해 ‘재벌개혁’을 들고 나왔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청년층 일자리가 나빠진 이유로 약탈적 원하청 관계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감세와 환율정책 등 각종혜택에도 고용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대기업의 책임문제도 반드시 거론해야 한다. 하지만 세대간 책임을 묻는 청년들에게 ‘중요한 것은 세대간 불평등이 아니니 재벌개혁에 나서야 한다’는 것은 정답일지는 몰라도 성실한 답은 아니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치적 노동이 필요하다. 하다못해 정부는 청년희망펀드라도 만들어 ‘(정책적 책임은 못 지겠으니) 도의적 책임은 지겠다’고 시늉이라도 하는 마당이다. 앞 세대의 노동 혹은 조직노동은 정말 아무 책임이 없나? 양극화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노동은 양보해서는 안된다는 태도는 언제까지 옳은 것인가?
글을 쓰다 보니 응원하는 야구팀이 결국 5강에서 떨어지고 곧 가을야구도 시작이다. 노동개혁의 가을 싸움도 이제 시작했을 뿐이다. 이번에는 노-사-정 불참 같은 장엄한 기권패를 선택해서는 안된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워야 한다. 그래야 지킬 수 있고, 다음 번 싸움도 달라질 수 있다. 물론 가을부터는 이제까지와 다르게 싸워야 한다. 고용보험개혁 같은 과감한 연대로 청년희망펀드 같은 가짜연대를 압도해야 한다. 야구 명언처럼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고, 사실 끝나더라도 끝난 게 아니다. 영봉패냐 9회 1-2점을 내느냐에 따라 다음 날 경기 내용은 바뀌기 마련이다. 반드시 홈런으로 점수를 낼 필요 같은 건 없다. 희생플라이를 해서라도 득점하는 우리를 보고 싶다.
출처: http://www.justicei.or.kr/495?category=567220 [정의정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