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규 (진보정의연구소 전문위원)
1994년은 정부가 ‘부실공사 추방 원년’을 선포한 해였다. 당시 외국인들은 그 표어를 보며 “그러면 그동안은 부실공사가 있었다는 얘기냐?”는 가슴 뜨끔한 질문을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성수대교가 붕괴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렇게 가슴 뜨끔하게 하는 말이 또 있다.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슬로건이다. “그럼 박근혜 정부 출범 전에는 국민들이 행복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을법하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박근혜 정부 3년차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히 국민들은 불행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단적으로 며칠 전 보도된, OECD평균을 훌쩍 뛰어 넘는, 우리나라의 자살률 통계가 이런 현실을 짐작케 한다.
성수대교 붕괴를 김영삼 대통령 탓으로 돌릴 수 없듯이 국민들의 불행을 박근혜 대통령 탓으로만 돌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탓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마나한 소리이다. 조상을 탓 할 수도 없다. 굶주린 아프리카나 수시로 전쟁에 휩싸이는 중동의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며 ‘자기체면’을 걸 일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먼 역사는 차치하고 민주화 이후 지금까지의 정치에 대해서 남의 나라 얘기 하듯이 개탄스러워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한편 “낙원과 술은 불행한 사람들을 각자의 운명과 화해시키는 전통적인 도구”라는 말에서도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불행한 현실을 진정으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는 다음의 세 가지 관점을 실천하는 ‘국민행복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우리들 삶의 행복과 불행이 개인의 ‘주관적인 마음먹기’ 만으로 결정된다는 생각을 벗어던져야 할 것 같다. 필자는, 국민 개개인이 “행복하다”고 말할 때 그 ‘행복’은 다양한 차원에서 개인이 가진 ‘자기 삶에 우호적인 조건’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건강하고, 일 등을 통해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아이들이 반듯하게 자라주고, 친구나 이웃과 교류하며 서로 돕고,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할 것이다. 반면에 가난하거나 아프거나 가족을 잃거나 외로운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며, 설사 그가 그렇게 말하더라도 사회적으로 그는 행복하다고 인정받지 못한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그렇게 말하지 않는 사람 모두 ‘자기 삶의 조건’에 영향을 받아 행복이나 불행을 평가한다.
둘째, 그렇다면 국민 개인의 ‘삶에 우호적인 조건’을 만들고 늘리고자 해야 한다. 앞서 주장한 바와 같이 개인의 행복은 주관적 감정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개인의 객관적인 삶의 조건,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개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삶에 우호적인 조건’은 무엇 무엇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것은 일자리, 건강, 주거, 여가 등 인류사회의 보편적인 것도 있고, 그밖에 한국사회의 특성을 반영한 것도 있을 것이다. 연령과 성별, 사는 공간 등에 따라서도 추가될 수 있다. 이때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하는 점은, 어떤 조건이 모든 개인의 행복에 절대적으로 우선해서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없으며, 같은 조건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의 정도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경제적 여유’나 ‘높은 임금’이 누구에게나 행복의 제1조건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교육이 개인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교육의 질적 특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점들은 개인의 행복을 평가하고 서로 비교한데 어려움을 주는 요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국민행복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가치와 실천을 존중하게 만들 것이다.
셋째, 개인의 ‘삶에 우호적인 조건’을 만들고 늘리는 것이 국민 행복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것이 사회발전을 평가하는 척도라는 통념을 만들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현재 사회발전의 지배적 척도로 인정받고 있는 통념을 허물어야 한다. 그것은 대중의 공감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중들이 수용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 예컨대 현재 사회발전의 척도로 인정받고 있는 GDP의 규모와 그 성장률은 경제적 생산의 양적 규모를 나타내는 지표이기 때문에 국민 개개인의 행복을 평가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발전의 국가간 비교나 연도별 비교의 주요 척도로 사용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1인당 국민소득 3만불 시대”와 “누구를 위한 경제성장이냐”는 주장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
‘국민행복시대의 불행’이라는 역설을 대하는 이러한 ‘국민행복정치’는 이제 시작단계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선후보들이 6%니 7%니 하며 경제성장률 경쟁을 했던 시절의 인식으로는 ‘국민행복정치’를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대중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경제성장에 대한 현재의 통념을 무시하고는 ‘국민행복정치’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국민행복정치’는 지금 대중으로부터 ‘익숙한 새로움’을 요구받고 있다.
출처: http://www.justicei.or.kr/327?category=567220 [정의정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