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연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성공회대 정치학 교수)
‘엿장수 맘대로’, 박정희의 약속과 번의
사전적 의미로 약속이란 다른 사람과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정하여 두거나 또는 그렇게 정한 내용을 말한다. 그렇다면 정치인에게 약속이란 무엇일까? ‘정치인의 기본은 약속’이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건 사실이 아니라 거짓이라고 받아들인다. 대개가 부도수표 남발 후 책임 전가나 회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인의 약속에는 반드시 책임이 뒤따라야 하는데, 정치의 책임이 실종될 때 세상에 미치는 파장과 그 파괴력은 엄청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정에 불참하겠다.”
51년 전 오늘인 1963년 2월 27일. 5?16군사쿠데타로 권력에 다가간 박정희는 민정 불참을 선언했다. 그 무렵 박정희의 잦은 변심과 식언을 가리키는 ‘번의(?意)’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박정희의 번의는 열흘이 멀다하고 되풀이되는 적도 있었다. 그러던 그가 각 정당과 정치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정국수습선서식’을 열고 민정에 불참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부도수표였다. 6개월 뒤인 8월 30일 박정희는 강원도 철원군 7사단 연병장에서 ‘혁명과업 완성 위해 민정참여를 결심’했다면서 그 유명한 전역사를 남기며 군복을 벗는다. “다음의 한 구절로써 전역의 인사를 대(代)할까 합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
불운한 군인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두 번의 쿠데타(삼선개헌과 유신)를 더 감행하면서 18년간의 철권통치를 통해 이 땅의 민주주의를 파괴한 장본인이 되었다.
아버지와 참 많이 닮은 박근혜 대통령, 서민들의 ‘깨진 꿈’
대의민주정치 하에서 정치인, 정당의 약속은 선거 공약에서 시작된다. 공약이라는 대국민 약속의 실행이 책임 정치의 첫 단추다. 그러나 2012년 대선에서 약속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핵심공약은 하나씩 파기되기 시작했다. 4대 중증질환 100% 지원 파기, 노인 기초연금 파기, 장애인 연금, 무상교육 파기 등등등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다. 국정원 대선개입 진실규명 방해, 인사파탄, 국가기관의 공문서 위조, 복지공약 파기·후퇴, 재정파탄, 전·월세 대란, 경제민주화 후퇴, 국민분열 조장, 민생안전사고 급증, 의료민영화 추진 등이 ‘100% 국민행복시대’를 외치며 출범한 박근혜 정부 1주년의 성적표다.
대통령 스스로가 그토록 강조해온 책임, 신뢰, 소통은 집권 1년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책임과 소통의 정치는 단지 빚좋은 개살구였을 뿐이고 정치에 대한 신뢰의 실종이 또다시 반복되었다. 앞으로 지켜지리라 기대하는 것도 무망할 것 같다. 51년 전 민정이양 약속을 팽개친 아버지와 닮아도 참 많이 닮았다.
더 큰 문제는 약속의 파기가 당연한 것인양 부끄러움조차 없다는 것이다. ‘안녕하지 못한’ 국민들 앞에 다른 정치인이나 정당들도 다 똑같은데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며 오히려 당당하기까지 하다.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가 국민과의 약속을 우습게 아는 가운데, ‘친박무죄 반박유죄’의 시대의 도래는 어쩌면 그 자연스런 귀결일 것이다. 정의가 거꾸로 서고 민주정치가 곤두박질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친박무죄 반박유죄’의 시대, 무너진 정의
여론조사를 보면 가장 거짓말 잘하는 직종, 가장 부패한 직업 1위는 항상 정치집단으로 나온다. 1987년 2월 27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동생 전경환이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직을 사임한다. 전경환은 7년 가까이 이 기구의 초대 사무총장, 회장을 지내면서 갖은 부정행위를 일삼아 왔다. 풍문으로만 떠돌던 전경환의 비리는 빗발치는 여론 속에서 결국 7가지 죄목(73억6천만원의 횡령, 새마을신문사의 10억원 탈세, 4억1700만원의 이권 개입 등)으로 기소로 이어진다. 형을 등에 업은 그의 비리에 대해 1989년 5월 대법원은 징역 7년·벌금 22억원·추징금 9억의 형을 선고했다.
100억원대의 횡령과 뇌물수수 혐의 유죄를 선고받고도 징역 7년형(그마저도 2년이 지난 1991년 특별사면으로 석방)으로 그친 전경환. 이와는 달리 1988년 500만원을 훔친 죄로 총 17년형(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은 지강헌은 탈옥을 감행하며,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친다. 누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사회에서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것이 아니라 단지 만명만 평등할 따름이다.
이제 세월은 흘러 ‘친박무죄 반박유죄’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양심적인 보수주의자 표창원 전 교수는 “‘친박무죄 반박유죄’의 시대, 정의란 무엇인가”를 자문하면서 이렇게 개탄한다. “대통령이라는 ‘5년 기한의 절대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경찰과 검찰, 국가정보원, 군 등 모든 ‘국가 정의 시스템’을 사유화하거나 무력화, 유린하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고 이를 말리거나 꾸짖는 사람들은 모두 인격살인이나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정의의 위기’ 상태다. 사회를 지탱하는 유일한 힘인 ‘정의’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신뢰가 실종된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
언제부턴가 좋은 나라, 행복한 사회 가운데 하나로 스웨덴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스웨덴에서 정권이 바뀌어도 복지국가의 기본 틀이 유지되는 것은 무엇보다 정부와 공공기관에 대한 높은 신뢰 때문이라고 한다. 그 기저에는 소통과 책임의 원리가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뢰는 정의와 동전의 양면이며 소통을 전제로 한다. ‘불통’을 자랑인양 뽐내면서 남탓하기에 여념이 없는 대한민국의 부정의한 기성 정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좋은 정치를 가꾸기 위해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정치에 대한 신뢰 없이는 ‘정의로운 복지국가’ 건설은 요원하다. 신뢰는 민심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시작한다. 2월 27일은 조선시대 태종이 관리들의 권리 남용으로 고통받은 억울한 백성들과 소통하기 위해 대궐 밖 문루에 신문고를 설치하라는 교서를 내린 날이기도 하다. 600여년 전인 1402년 태종 2년 때의 일이다.
오늘날 누가 현대판 신문고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되어야 할까? 걸출한 정치사회학자 후앙 린츠(J. Linz)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하에서 정당 없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할 방법은 없다.”고 단언한다. 즉 좋은 정당정치야말로 자본과 시장의 경제적 횡포에 맞서 가난한 보통 사람들의 삶을 지켜 주는 제도적?실천적 기제인 것이다. 민주정치는 참여-대표-책임의 원리를 기본으로 하며, 그 핵심 기제인 정당은 모름지기 사회갈등의 통합자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치를 독점해온 거대 두 정당은 당 본연의 역할을 외면했다. 한 정당은 소통 자체를 거부했고, 다른 한 정당은 무능해서. 그렇다면 정의당은 시민들과 소통하는 신문고가 될 수 있을까?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한순간이다.’는 말을 새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반란의 첫발’, 영국 노동당 창당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고전적 사례인 영국 노동당은 창당 후 유권자들의 신뢰를 얻어 집권하기까지에는 2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1990년 2월 27일은 런던에서 노동조합과 3개 사회주의 단체 대표 129명이 영국 노동당-‘노동대표위원회’(Labour Representative Committee, LRC)-창당대회를 연 날이다. 대회는 비록 세인들의 무관심 속에서 진행됐지만, 영국의 노동자들이 ‘반란의 첫발’을 내딛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후 1923년 12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영국 노동당은 30.5%의 지지율에 191석을 획득함으로써 원내 제2당의 지위를 확보한다. 38.1%의 지지율에 258석을 얻은 보수당이 정부 구성에 실패함으로써 영국 노동당은 29.6%로 159석을 얻은 자유당과의 연정을 통하여 마침내 영국의 집권당이 된다. 창당 후 24년만의 일이다.
영국 노동당은 의회주의와 점진적인 개혁이라는 기본 전략을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해 가겠다는 입장을 표방한 정당이자, 집권이라는 힘을 가져야 영국 노동계급의 삶을 책임지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이룰 수 있다는 지향을 가진 정당이었다. 당의 이런 기본 노선은 창당 이후 끝없는 논쟁거리였고 이는 당내의 갈등과 분열을 일으켰던 요인이기도 했다. 끝없는 논쟁과 대립으로 영국노동당은 당내 갈등이 반복되었고 일부 세력은 당을 나가기까지 하였지만 당의 집권은 이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집권은 지도부가 설정했던 당의 전략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영국노동당사』의 저자인 고려대 고세훈 교수는, 이 ‘반란의 역사’를 창당 이전부터 현재까지 추적하면서 창당과정을 강조한다. 특히 그는 철도노조 간부 출신인 토머스 스틸스를 비롯한 소수 엘리트의 헌신적인 활동을 높이 평가한다. 10%를 갓 넘은 노조 조직률과 조합원 대다수의 불참, 노동계급 내부의 분열, 지배층에 대한 영국 노동자들 특유의 경외심 등 당시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이 정치세력화를 통한 ‘반란’을 어렵게 하는 했기 때문이다.
고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 엘리트들은 “이론에 기대어 역사의 흐름을 지레 예단하거나, 구조에 빗대어 전망을 냉소·낙관하지 않았다”며, “다만 이들은 결정적인 시기마다 그것을 포착하여 전향적으로 활용했다”고 밝힌다. 비록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어도 금도 여전히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들이다. 현실에 기초한 예리한 상황 판단력, 승부사의 과감한 결단력, 좌고우면하지 않는 저돌적인 추진력이야말로 특히 당을 이끌고 있는 진보정치 리더에게 필요한 덕목이지 않을까 싶다.
글을 맺으며 : <또 하나의 약속>
2014년 2월 김태윤 감독의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잔잔한 감동과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스무 살 여린 딸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아버지 상구, 상구는 차갑게 식은 윤미의 손을 잡고 약속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떠난 내 딸, 윤미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겠다고. “아빠가...꼭 약속 지킬게.”
그는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건드릴 수 없는 절대성역이자 건드리면 다친다는 신화의 영역인 ‘삼성’에 맞서 눈물겨운 싸움을 벌인다. 영화는 소리없이 스며들어 정의당에게 이렇게 묻는다. 지금 우리 시대의 정의는 뭘까? 신자유주의 승자독식 사회에 맞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과 연대하는 것. 강자들 틈바구니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고 있는 약자들의 궁핍하고 피폐한 삶을 개선하는 것. 노동문제에 깊이 천착하면서 모두를 위한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을 실현하는 것. ‘함께 살자’는 시대정신을 지금/여기서 실천을 통해 이루어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진보정당이 본연의 제 역할을 하는 가운데 정치가 제 자리를 찾게 만드는 것.
약속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맺어주는 기본이다. 기본이 망가지고 무너진 사회에서 희망을 꿈꾸고 행복한 삶을 가꾸기란 너무 힘들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며칠 전 전국위원회에서 정의당 천호선 대표는 ‘상생의 사회?21세기 한국형 사민주의?정의로운 복지국가’로 나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기성 정치와는 달리 약속은 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것을 함께 확실히 보여주자.
출처: http://www.justicei.or.kr/120 [정의정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