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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칼럼

  • [칼럼] 장성택 숙청과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

 

김수현 

(정의당 평화·통일 정책연구위원)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인 장성택이 숙청되었다. 이 사태 이후 북한의 내부 안정성이나 대외 정책의 향배에 대해 많은 이들의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장성택의 위상과 성향에 대한 다른 판단은 물론, 북한 체제의 안정성 진단 및 북한 문제를 국내 문제와 연계시키는 것에 대한 이견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가 한 때 후견인의 역할을 했을지라도 최근 그 위상이 점점 하락해 온 점, 지난 5월 특사로 파견돼 시진핑 중국 주석과 면담하며 6자회담 등 대화로 나오겠다는 것을 천명한 것은 최룡해 군 총정치국장이었던 점, 무엇보다도 최고지도자 중심의 유일지도체제라는 북한 체제의 특성 등 때문에 북한 내부의 안정성이나 대내외 정책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다만 북한 내부의 충성경쟁 심화가 가져올 부정적 가능성은 대비해야 하고, 특구 개발 등 북중 경협과 관련해서는 장성택이 한 역할이 분명하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데 후자는 북이 핵과 함께 경제건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기도 하기에 오히려 남한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기회의 창이 더 열릴 수도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현재 남한 정권이나 정치권의 대응을 보면 이런 냉정한 분석 속에 기회를 모색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 “무모한 도발과 같은 돌발사태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철저한 대비를 당부한다.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하는 게 안보를 책임지는 정부의 역할이긴 하다. 하지만 국정 최고책임자이자 이후에 북한과 정상회담을 할 수도 있는 대통령이나 집권당이 북한을 거의 악마화하며 호들갑스럽게 나서는 이유가 국정원, 군 사이버사령부 등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복지 공약 전면 후퇴와 철도 민영화 등에 대한 국민적 불만과 분노를 호도하려는 것에 있다는 심증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지금의 불투명한 상황을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께서 뜻을 하나로 모아 달라.”는 박 대통령의 말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문제는 정부의 이런 속내를 짐작하면서도 이 정부의 대북 인식과 정책에 대해서는 다른 목소리가 별로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장성택 처형이라는 결과와 과정에서 보여준 잔인성, 비인권적 측면이 크게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고모부를 숙청시키는 비인간적 측면은 물론, 백두혈통의 절대성과 ‘충성’, ‘간신’을 논하고, 정치국회의에서 출당?제명 처분된 지 불과 나흘 만에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즉결 처형되는 과정 자체가 근대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져서일 것이다. 게다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나마 “헬기를 쏘는 기관총으로 사살했다더라”는 카더라가 연상케 하는 야만성은 북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유시민 전 장관이 이석기 사건과 장성택 숙청을 동렬에 놓았다가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은 것도 이 연장선에 있다고 판단된다.

 

장성택 숙청의 과정에서 북이 보여준 행태와 언사가 가져 온 후폭풍은 비단 정권이나 일반 대중들뿐만 아니라 자신을 진보라 규정하고,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크게 미치는 것 같다. 북의 봉건성 혹은 반근대성을 비판하다 못해 북을 근대화,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첫째,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 그것은 북한만의 특수한 현상인가? 그것은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인혁당 사건이나 이승만 독재정권 시절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정치적?사법적 타살과 다르지 않다. 소련의 스탈린 정권 시절 대숙청이나 중국의 문화대혁명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혹은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숱한 숙청은 또 어떤가? 물론 중국은 문화대혁명이라는 광풍 속에서도 등소평 등 정치적 반대파를 숙청하되 죽이지는 않은 것에 비하면 북한의 행위는 예나 지금이나 극단적이다. 그것이 세상의 다차원적 측면이나 변화에 적응하는 유연성을 떨어지게 했고, 결과적으로 현재의 북한과 중국의 차이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당 독재, 수령 독재의 후자로 갈수록 민주주의와 멀어지고 권력의 집중에 따른 반대파에 대한 피의 숙청이 이뤄지고, 폭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혁명이나 체제 수호의 이름으로 독재를 합리화하는 논리 속에 공포정치가 내재하고 민주주의가 질식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숙청과 폭력에 기반한 공포정치에 대한 우리의 반대는 단지 북한에 대한 혐오나 비판 의식에 그칠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평등과 연대의 원리에 기반하고 만인이 자유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함께 가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금 되새길 일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사회민주주의’를 내거는 것은 단지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의 결과를 이상화하거나 따라 배우자는 것이 아니다. 6.10항쟁이나 6.8혁명과 같은 대중투쟁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 원리에 기반하고 그것을 확대하는 것이어야 함을 분명히 하는 것이기도 하다.
 

둘째, 북한을 외부에서 압박을 통해 그 체제의 속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단지 수구적이거나 뉴라이트로 전향한 사람들과의 차별성을 발견하지 못하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것이 가능한지의 여부뿐만 아니라 과연 바람직하기나 한 것일까? 대중들이 진보진영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와 달리 우리 중 대다수는 북한 정권과 그 체제에 대한 환상이 없다. 북한을 대안적 체제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전무하며, 북한 체제의 비민주성과 공격적 대외정책에 대해 비판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북에 대한 붕괴정책뿐만 아니라 강압 정책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힘에 의한 일방의 배제가 아닌, 상생과 공영을 추구하는 원리는 북한에 대해서도 당연히 적용되어야 한다. 체제의 안보에 대한 절대적 불안감이 해소될 때, 반혁명에 대한 경계와 응징, 일사분란을 요구하는 통치 원리의 정당성도 약해지고 대치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경제개혁과 개방뿐만 아니라 인권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우리의 목소리에까지 귀기울이게 하고 싶은가? 평화정착, 교류협력의 본격화를 기하는 정책 말고 다른 길은 없다.

그리고 우리의 안보와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달성의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결국 대화밖에 없다는 원칙은 굳건히 지킨다. 그런데 강한 안보가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 앞에서는 왠지 작아지거나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상대를 단지 위협으로 치부하며 나의 안보를 강화하는 정책은 ‘비대칭 전력 강화’ 등 상대의 대응을 낳아 나의 안보를 오히려 더 큰 위협에 빠뜨리는 ‘안보 딜레마’를 가져온다. 북한에 대한 불신이 커졌지만, 나의 행동이 다시 상대의 불신을 강화시키는 것은 하수 중 하수이고,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세계 제일의 강국을 적으로 둔 상대의 안보 불안을 있는 그대로 보고, 너의 안보와 나의 안보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공동안보의 정책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9.19공동성명의 정신이요, 6자회담을 통해 이뤄야 할 목표이다. 북한만이 문제가 아니고 중국과 일본도 문제라고? 세계 2,3위의 경제대국과 군비경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면, 공동안보의 논리는 갈등이 증가되는 지역질서 속에서 우리의 안보를 확보할 적극적 방책으로 주목할 일이다. 



출처: http://www.justicei.or.kr/97?category=567220 [정의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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