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연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성공회대 정치학 교수)
정의당 정책위원회?국회정책연구위원?진보정의연구소가 함께 만드는 정책 파발마 <미래시계>에 칼럼난이 신설되었다. 첫 집필을 부탁받고 난 뒤 어떤 이야기를 쓸까 하다가 몇 년 전부터 머리 속에 담아놓고만 있던 <오늘의 소사>를 적어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글이 나가는 날에 있었던 역사 이야기들을 모은 뒤 정치를 중심으로 지금/여기의 문제와 묶어 풀어나가는 것이다. 자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역사 산책의 길을 떠나보자.
역사를 되돌아보는 이유 : ‘희망’
역사는 수많은 사건들과 얼굴들이 어우러지고 굽이치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모든 역사가 다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나온 역사는 현재(지금 이 순간)로 통하고 따라서 오늘의 문제로부터 역사를 이해한다는 점에서, 과거가 현재를 규정하는 준거가 아니라 현재가 역사를 말하는 준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길을 걸으며 뒤를 돌아다보는 걸까?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문구로 유명한 E. H. Carr의『역사란 무엇인가?』를 보면, 현대인은 그가 지나온 저 희미한 빛 속을 열심히 되돌아보는데 이는 그 가냘픈 빛이 그가 지금 가고 있는 어두운 길을 비춰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이와는 다르게 뒤를 살피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는 현재의 수요에 의해 수정되고 각색된다.’는 생각으로 이른바 레트콘(Retcon) 작업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레트콘이란 작품의 설정을 바꾸는 방식의 하나로, 작품 속에서 그간 벌어졌던 과거의 일을 현재의 필요성에 따라 수정하고 다시금 현재를 끼워맞추는 식이다. 이 이 과정에서 기억이, 특히 선별되어 불러내진 기억은 ‘역사 속의 진실’에 눈을 감은 채 왜곡된 각색을 통해 ‘허구 속의 신화’가 되어간다. 기득권층에 의해 오래 전부터 수행되어온 박정희와 이승만 미화 작업이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1979년 12월 12일, 우리에게 80년대란?
이러저런 상념 속에서 수첩을 보니까 마침 <미래시계>가 나가는 날이 운 좋게도(?) 12월 12일이다. 아마도 19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이 두 개의 숫자 조합이 의미하는 바와 떠올리는 얼굴과 사건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군사 쿠데타,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현대사 한 페이지를 오점으로 얼룩지게 한 날이다. 민주주의의 흐름을 역행시킨 사건이 터진 날이자 있어서는 안 될 정권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 쏘아 올려진 날이다. 12?12 쿠데타, 5?17 쿠데타, 80년 5월의 핏빛 광주 등에 대해서는 굳이 상세한 언급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80년 5월 광주를 기억하라’,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의 궤변, 역사바로세우기, “우리나라의 헌법질서 아래에서는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군사반란과 내란)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는 것”(대법 판결문), ‘추징금 2205억원, 29만원 할아버지’ 등을 기억하는 것 정도로만 해서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 싶다.
대신에, 우리에게 80년대는 무엇이며 그 이후는 또 어떠한가?의 물음은 던져볼 필요가 있다. 사노맹 중앙위원으로 5년간 감옥생활을 한 뒤 민주노동당 초대 기획위원장 활동을 한 박홍순의 <절망에 대하여>(『미술관 옆 인문학』, 서해문집, 2011)라는 글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199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기는 민주주의를 위해 80년대를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시련의 세월일 수 있다. 분명 80년대는 암흑의 시대였지만 그 암흑을 걷어내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은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는 암흑은 여전한데 암흑에 밝은 빛을 전할 프로메테우스들이 사라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둠에 익숙해지는 법을 터득하던 그런 시대였다. 과거의 것은 사라졌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없는 시대였다.”
인권변호사 고 조영래, ‘인간적 아름다움’
이런 시련과 암흑의 80년대를 70년대에 이어 뜨거운 열정으로 살아간 많은 사람들 가운데 12월 12일과 이어진 분이 있다. 1990년 12월 12일 세상을 떠난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 조영래다. 아마도 아직까지 전태일을 알고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조영래라는 사람을 아냐고 물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다. 소리 없이 묻히게 됐을지도 모를 ‘어느 청년 노동자의 죽음’을 『전태일 평전』을 통해 부활케 한 사람, 에밀 졸라의『나는 고발한다』에 못지않은 불후의 명작이자 형사변론서의 금자탑인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변론요지서를 풍부한 인권감수성으로 만들어낸 사람. 그가 바로 조영래다.
서울대 전체 수석 입학과 사법시험 합격이라는 요샛말로 ‘놀라운 스펙’을 지녔음에도, “있는자, 가진자, 배운자로서 거만하거나 교만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것을 삶으로 살아낸 사람”. “그 모든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또 무엇보다 높이 사주고 싶은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아름다움, 인간적인 멋”, “변호사로서의 단순한 대변이 아니라 억압받는 자, 피해자와 함께 하는 진실과 사랑의 추구요 인간소외에 대한 저항으로서 높은 도덕성과 치열함을 함께 보여준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이다. 그의 활동과 삶, 인간에 대한 사랑은 사후에 나온 유고집『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를 통해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민주주의 시대의 도래, 바뀐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오랜 암흑의 권위주의 시대를 마감시키고 민주주의 시대가 왔다. 군부는 병영으로 돌아갔고, 이른바 ‘민주정부 10년’도 경험했다. 그런데 그 사이 무엇이 얼마나 바뀐 것일까? 얼마나 더 살기 좋아졌나? 행복한가? 경제적 통계수치로만 보면 과거에 비해 엄청 잘 사는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국가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것이 아니라 만명만 평등”한 정의롭지 못하고 불평등한 세상에서 국민들은 행복해하지 않는 것이다. 2012년 12월 19일 미국 갤럽이 148개 나라별로 조사한 결과 한국 국민의 행복지수 순위는 하위권인 97위를 기록했다. 2013년 5월 28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국가별 삶의 질을 '행복지수(BLI: Better Life Index)'로 환산한 결과, 대한민국의 행복지수는 36개국 가운데 27위로 지난해보다 3계단 떨어졌다. 이처럼 대다수 국민들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경제성장이나 선진국 진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몇 년 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이 “한국 사회는 불행으로 동맹맺은 사회다. 땅에서 바로 이 시간에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구는 다음 두 부류 중 하나다. 하나는 도둑이고 하나는 바보다.”라고 질타한 바 있다. 그에 화답하면서 진보정의당의 노회찬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현실이 어렵다고, ‘동물의 왕국’으로부터 멀어지고 ‘인간의 나라’ 가까이로 가기 위한 길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절망과 체념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불행이 아닌 행복으로 동맹맺어 서로를 다독이며 헤쳐 나가야 합니다.”
불통의 이명박 정부에 이어 ‘국민행복, 희망의 새 시대’를 국정 비전으로 표방하며 등장한 박근혜 정부. 그러나 불통의 벽은 여전히 허물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증오와 적대의 통치만이 난무하면서 비판과 반대를 억압으로 맞서고 있는 형극이다. 정치가 좋아지지 않는 가운데, 세상이 좋아지기를 꿈꿀 수는 없다. 행복은 불행으로,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는 점점 더 병들어가고 있으며, 연속되는 삶의 고단함으로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은 당연하다.
“삶의 고단함은 인간에게서 서로에 대한 따뜻한 시선마저 앗아가 버린다. 매일의 삶이 고된 노동의 연속일 때, 그리하여 세포와 신경 하나하나에까지 피로가 축적되어 있을 때 우리는 타인의 삶에 관심이나 애정을 갖기가 힘들다. 하루를 능동적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수동적으로 힘겹게 밀어내는 느낌일 때는 타인의 시선조차 무겁게 느껴진다. 서로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노동의 연장으로 다가온다.” (박홍순의 『미술관 옆 인문학』, 2011)
<절망>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 절망 속에서 희망을…
사실 ‘한 번 추락하면 다시 오를 길이 없는,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 생존의 공포와 퇴락의 두려움이 일상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진보정당, 진보적 사회운동과 민주적 정치과정에 대중의 참여가 깊고 넓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자끄 아딸리(Jaque Atalie) 말처럼, “불확실한 세상이 주는 불안감과 같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자 대중들은 갈수록 오락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설득력 있는 대안의 부재하다면, 좌절과 실망, 절망의 감정만이 확산되기 십상이다.
인간이 느끼는 절망의 감정은 문학, 음악, 미술, 노래 등 각 예술 분야에서 오래전부터 다양하게 다루어져 왔다. 미술에서는 절망을 대표하는 화가로, 죽음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간 노르웨이의 국민적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를 꼽는다. 150년 전 오늘인 1863년 12월 12일은 그가 세상의 빛을 본 날이다. 뭉크는 삶과 죽음의 문제, 인간 존재의 근원에 존재하는 고독과 불안 등을 응시하는 인물을, 인물화를 통해 표현했다. <절규>, <절망>이 그의 대표작이다. “질병과 죽음이 가득한 공기가 만들어 내는 불확실함, 어느 곳에도 자신 있게 발을 내딛을 수 없는 상황은 절망을 만든다. 그리고 절망은 사람을 한없이 깊은 바닥으로 침잠시킨다.”
절망은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미래에서 온다. 힘들거나 어렵다는 것 자체가 곧 절망일 수는 없다. 하지만 헤어나올 수 없는 늪처럼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과연 ‘전망이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 답이 없거나 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을 때, 절망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은 현실에서 도피하거나 숨는 것이다.
『미술관 옆 인문학』에서 박홍순은 뭉크의 <절망>에 대해, “핏빛 하늘이 어지럽게 너울거리는 하늘 아래 두 눈을 감은 채, 하염없는 상념에 잠겨 있는 한 (외로운) 남자”라고 표현하면서 박홍순은, 외로움은 사람들 속에서 오는 것이며, 불투명한 미래에서 오는 절망 앞에서 숨거나 도피하지 말고 오히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희망은 피난처로의 도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삶을 개척해나가는 가운데 불현듯 마주하게 되는 어떤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의 말은 지금 여기 한국사회 전체에 대해 던지는, 특히 여전히 진보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정의당, 진보정치의 존재 이유 : 희망의 씨앗
대한민국이 불행으로 병든 사회에서 건강한 사회, 행복으로 동맹 맺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리고 ‘소수만을 위한 나라’에서 ‘모두를 위한 나라’로 개조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정치가 제 자리를 찾아야 가능하다. 불안과 절망 속에 살고 있는 다수의 보통사람들이 정치의 세계로 초대받을 때 가능하다. 어쩌면 그것이 진보정치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정치에 나선 진보의 1단계 실험은 실패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특히, 2012년 4월 총선에서 13석을 획득하는 성과를 얻었지만, 스스로 그 자산을 탕진하면서 더 이상은 과거의 경로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사람들은 진보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 아니,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진보의 가능성을 다시 개척하기 위해서 새롭게 출발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와는 확연하게 다른 행위 패턴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정의당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실패한 경험으로부터 제대로 배워야 한다. 과거의 낡은 진보에 연연해하거나 남탓하는 것으로만 시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완전히 단절된, 인간다움과 실력을 동시에 갖춘 정말로 새로운 ‘정당 만들기’가 급선무가 아닐까 싶다. 정당 만들기와 관련해 정치학자 키(V. O. Key)에 따르면 정당은 다음 3가지로 구성된다. ①조직으로서의 정당(Party as Organization): 당원과 지지자들을 조직하고, 그들의 가치와 이해관계를 집약?표출하며, 의원 등 정당지도자를 발굴?훈련 ②유권자 속의 정당(Party in the Electorate): 일반 유권자의 선거에서의 지지와 참여를 활성화 ③정부 속의 정당(Party in Government): 의회에서의 입법활동과 직접 정부를 구성하는 역할.
우선 ‘조직으로서의 정당’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집합행동의 딜레마를 완화시키는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념이 필요하고, 자연스럽게 리더십의 발전 및 조직적 권위의 확립, 규율의 체계화가 있어야 한다. 즉 정의당의 조직적?정책적?이념적 정체성을 뚜렷이 함으로써 국민에게 당이 무엇을 추구하며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선명히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당의 리더십을 확립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유권자 속의 정당’으로 제대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스토리 있는 역사와 함께 미래지향적 비전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정부 속의 정당’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실력을 갖춘 정치인들과 참모들(과 지식인 풀), 국정운영의 기본 청사진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희망이란 오늘을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그 앞에 다가서는 창”이라고 한다. ‘조만간 사라질 정당’이라는 우려나 조롱을 담대하고 명쾌한 정치 실천으로 불식시켜내면서, 정의당이 지금/여기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과 함께 이 힘겨운 세상살이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그것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 날을 빨리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출처: http://www.justicei.or.kr/94?category=567220 [정의정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