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일보 컬럼 기고] 어떤 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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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계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이 공동으로 출자해서 만든 자회사 가운데 과학기술시설관리단(시설관리단)이라는 곳이 있다. 문재인정부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을 추진했을 때 직접 고용하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만든 회사다. 한국화학연구원을 비롯한 19개 과학기술계 출연연에서 일하는 미화, 시설, 조리 노동자 1000여 명이 이 회사 소속이다.
2023년 11월 7일 시설관리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세종국책연구단지에 자리잡은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앞에서 400여 명의 미화, 시설 노동자들은 노동이사제 도입, 원하청노조 3자 협의기구 구성, 현장 대리인 직선제,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목청을 높였다. 2018년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3주간 전면파업을 한 이후 첫 파업인 셈이다.
이 파업은 어떤 언론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보도하지 않았다. 전국에서 모였다고 하지만 각 출연연별로는 수십 명에 불과하고 당장 연구활동에 심각한 불편을 초래하지 않기 때문일까. 이를테면 과학기술예산 5조 2000억 원 삭감이나 규모가 큰 노동조합의 파업 소식에 견주면 별다른 뉴스거리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일터에 바치는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면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찬찬히 살펴보면 누구라도 이 파업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출연연 미화, 시설 노동자들의 시급은 9760원이다. 2023년 최저임금 시급이 9620원이고 2024년 최저임금 시급이 9860원이므로 당장 두 달 후면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한다. 출연연에서 수십년을 일했어도 미화 노동자들의 임금은 연 3000만 원을 넘지 못한다. 휴일과 야간 교대근무를 하는 시설관리 노동자들은 수당을 모두 더해도 연 4000만 원 수준이다. 이 정도 임금으로 고물가, 고금리의 대한민국에서 사람답게 살고 버티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2019년 11월 시설관리단이 출범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약속한 것은 시중 노임단가에 준하는 임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2023년 현재 시중 노임단가는 1만 577원이다. 올해 임금 교섭에서도 시설관리단 이사회와 사용자는 시급 100원(월 2만 900원)만 인상하겠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시급 100원 인상하면 9860원이다. 시중 노임단가는 어림없고 2024년 최저임금만 맞춰주겠다는 심산이다.
임금은 그렇다치고 다른 요구 조건도 한 번 보자. 시설관리단에 속한 출연연을 통틀어 모두 57개 사업소가 있다. 사업소마다 현장 대리인이 노동자들을 관리하고 통제한다. 일부 사업소에서는 한 번 현장 대리인이 되면 퇴직할 때까지 철밥통처럼 자리를 유지하며 비리와 갑질로 노동자들을 괴롭히기도 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현장 대리인 직선제를 통해 근무환경을 더 낫게 만들자고 요구한다. 실제로 출연연 경비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과학기술보안관리단에서는 현장 대리인 직선제를 도입하고 나서 노동자 사이 갈등이 대폭 줄었다.
간접 고용 노동자들에게 노동기본권을 제약하는 대표적인 문제가 원청이 교섭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설관리단의 진짜 사용자는 출연연이고, 시설관리단 이사회는 출연연 경영지원본부장으로 구성돼 있는데도 교섭에는 실질적 권한을 갖지 못한 시설관리단 사용자가 나선다. 이런 문제 때문에 정부도 원청, 하청, 노동조합 3자 협의기구를 구성해서 원활하게 소통하고 노사분쟁을 예방하라고 3년째 권고했지만 출연연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출연연에서 직접 고용하지 않아 간접고용 노동자로 살아왔지만 미화, 시설 노동자들은 출연연을 평생 직장으로 생각하며 애정을 갖고 일해왔다. 불이 나면 가장 먼저 불을 끄기 위해 달려갔고 나쁜 출연연 정책들에 맞서서 정규직들과 어깨 걸고 함께 싸웠다. 파업은 최후의 수단이기에 참고 또 참았다가 가장 절박한 목소리로 한 곳에 모인 미화, 시설 노동자들을 한껏 응원한다.
출처 : 금강일보(www.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