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 거주하는 일반 당원입니다. 오랫동안 고민만 해오다가 더이상 늦추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비상구에 글을 씁니다. 다소 정돈되지 않은 글일지라도 끝까지 봐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며칠 전 오랜만에 피켓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강남지역당원분들과 함께 노동법 59조 폐지를 위한 피켓시위였습니다. 시위는 긴 시간을 소요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쌓여왔던 고민들을 지역 당원분들에게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당원분 중 한 형님이 제게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는 이야기지만 너무 묵혀두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를 전공했습니다. 졸업 후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거치며 수 많은 부조리와 불확실한 미래를 보고 광고로 전향한지 5년가량 되었습니다. 현재는 TV광고와 뮤직비디오 등을 촬영하는 조명팀에서 일을 합니다. 한 때는 저도 영상에 대한 애정과 영화인이라는 자부심이 가슴 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상제작을 직업으로 삼았을 때, ‘갈망하던 그 직업’은 그저 돈을 버는 수단이 될 뿐 목적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어쩌면 거의 모든 분야의 직업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상노동은 그 만의 아주 독특하고 지독한 불합리들이 있습니다.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꿈이 이제는 꼴도 보기 싫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광고와 뮤직비디오 조명팀에 있습니다. 영화와 드라마등 다른 영상관련 직종도 크게 다른 환경은 아니지만 광고와 뮤직비디오에 국한하여 말씀드립니다.
광고는 8시간이 아닌 '12시간'을 ‘1일 기본 노동시간'으로 여깁니다.
직급별로 12시간 기본인건비를 받죠. 누구도 그렇게 하라고 한 적도 없으며 어떤 관련 법률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저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고 아무도 이에 반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노동법상 4시간의 연장근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연장근로 수당 따위는 없습니다.
인건비는 늘 흥정의 대상입니다.
12시간을 초과하는 촬영은 시간당 기본인건비의 10%씩 오버차지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오버차지의 지급률을 50% 내외입니다. 관행적으로 그렇게 해왔고 이에 반발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개씨 우리랑 일하기 싫어요?" 였습니다. 그래서 장시간 촬영을 하게 될 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 수명을 깎아서 저들이 돈을 버는 구나...'
촬영을 위한 집합시간은 계절마다 다르지만 보통 06시 입니다. 그리고 절반이 넘는 경우로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촬영합니다. 06시까지 집합하기 위해서 현장스탭들은 03시에 일어나 04시에 출근해서 04시30분 쯤 렌탈샵에 들러 장비들을 렌탈 한 후 06시까지 현장에 집합합니다. 실질적으로 04시 30분부터 일을 합니다. 12시간을 기준으로 삼지만 보통 18시간 이상 씩 촬영을 합니다. 바로 노동법 59조에 해당하는 영상제작 및 기록 관련 업종이기 때문이죠. 18시간은 예삿일이며 20시간 30시간을 넘게 촬영 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30시간 동안 식사하는 그 순간을 제외한 휴게시간은 없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빈번하게 식사시간을 넘기는 일이 발생합니다. 하루 세끼 모두 굶고 촬영한 경우도 있었죠. 밥을 줘야 한다는 법은 없어도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휴게시간을 줘야한다는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겐 종종 없습니다. 밥 먹을 시간이.
인건비의 평균지급일은 일 한 날로부터 보통 3개월 후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노동법은 사용자에게 임금 지급기일을 형법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사용자는 노동자가 일 한 날로부터 14일 이내 임금을 지급해야 하고 서로 동의하에 1회에 한하여 지금기일을 30일 연장 할 수 있다. 그런데 스탭들에게 지급할 때는 노동법(근로기준법)이 아니라 공정거래법을 말하죠. 원사업자(광고주)와 수급사업자(대행사)의 거래관계를 말이죠. 스탭에게 결제 해 주는 곳은 그보다 밑에 도급을 받는 프로덕션(제작사)입니다. 그리고 광고주(혹은 대행사)로부터 돈을 못 받고 있으니 입금되면 주겠다고 합니다. 어느날은 인건비가 1년이 넘도록 지급되지 않아 제작사에 전화를 해봤습니다. 관리부의 대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저희가 이번에 새로 사옥을 짓고 있어서 거기에 지출된 비용이 너무 많아서 좀더 기다려주세요.” ... 할말을 잃었습니다. 스탭들에게 지급되야 할 인건비를 제작사 사옥 짓는데 쓰고 있었다는 겁니다. 재밌는 이야기는 한 두 개가 아닙니다. 국정농단사건으로 유명세를 탄 아프리카(제작사)의 차은택 감독. 대표적인 사람이었죠. 스탭들 위에 군림하는 갑오브 갑이었습니다. 이런 일 때문에 광고 스텝들은 일을 시작할 때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 최소 6개월 이상 생활비가 준비 되 있지 않으면 일을 시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작하는 사람들은 팀의 선배들에게 생활비를 빌리는 경우가 자주 일어납니다.
저는 강남에서 출근을 합니다. 어떤 날은 남양주의 xx조명장비회사로. 다른 날은 망우동의 회사로. 또 다른 날은 경기도 광주로, 안양으로, 하남으로. 조명장비회사는 값싼 시외에 창고에 장비를 쌓아두고 렌탈합니다. 덕분에 새벽에 장비회사로 출근해야 하는 조명스탭들은 이른나이에도 어쩔 수 없이 개인차를 구입합니다. 차를 구매할 능력이 없는 1-2년차 어린 친구들은 전날 회사 근처 찜질방에서 잠을 자거나 새벽에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옵니다. 보통 조명장비회사로 집합하는 시간은 05시 내외입니다. 너무 일찍 하루를 시작하지만 남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퇴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4시간을 꼬박 일을 하는 경우죠. 생각보다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덕분에 저도 첫 차를 사고 출고 한달만에 강변북로 한 가운데서 외제 고가 승용차를 들이 받은 적이 있죠. 앞차를 박는 순간까지 전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었습니다. 자차 구입 2년 만에 독일 3사(벤츠,bmw,아우디)차를 모두 들이받은 기록도 가지고 있지요. 제 퇴근시간이 도로의 출근시간과 겹칠 땐 이제는 아예 근처 주차장을 검색해서 주차 후 자고 갑니다. 시내도로에는 졸음쉼터가 없으니 퇴근이 좀 늦더라고 주차장을 찾아서 잠을 잡니다. 몇 십시간씩 일하고 난 뒤 차에서 자면 10~20분으로는 다시 운전대를 잡을 수 없습니다. 주차요금을 지불하고라도 몇 시간 씩 잔 뒤에서야 일어날 수 있죠. 그래서 주차장도 조금이라도 더 싼 공영주차장을 검색합니다. 요새는 자주 잠을 자고 가는 단골공영주차장도 생겼죠.
밤샘촬영 후 퇴근할 때 스텝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운전합니다.
아마 몇 번 보셨을 겁니다. 영화 또는 드라마 스텝들이 장시간 촬영 후 다음장소로 이동 중 교통사로고 사망하는 사고들을. 저희도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기사화가 되지 않았을 뿐. 모두 장시간 촬영 (주로 밤샘촬영)후 귀가 중에 일어난 사고입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아무런 보상도 없었습니다. 사망사고는 아니어도 사고들은 자주 일어납니다.
사고의 책임은 전적으로 사고를 당한 스텝 개인에게 있습니다.
우린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촬영 현장에서 다쳐도, 아무도 이를 보상해주지 않습니다. 다리가 부러지면 3개월 동안 일을 쉽니다. 3개월간 병원비는 개인보험으로 처리하고 3개월간 아무런 수입 없이 지냅니다. 허리를 다치면 4-5개월을 쉽니다. 조명팀 중에서 디스크 환자는 10명중 4-5명입니다. 작년 겨울 저도 결국 디스크치료를 받았습니다. 허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을 때가 돼서야 시술을 받았습니다.
광고는 매 촬영이 다른 프로덕션(제작사)와 일을합니다.
제작사는 광고주로부터 의뢰를 받아 다른 프로덕션으로 도급을 주거나 내부 연출감독에게 일을 맡깁니다. 동시에 제작사는 그 이외의 헤드스탭(촬영감독,조명감독,미술감독 등)을 선정해서 구두계약을 하고, 각 해드스탭들은 각자의 조수들을 다시 모읍니다. 이렇게 꾸려진 스탭들은 현장에서 제작사의 진행자(연출감독 또는 제작사PD)의 관리감독 하에 일을 하면 결제 또한 제작사로부터 받습니다. 명백히 제작사라는 사용자가 있으며 그들이 정한 집합시간에 모여서 일을 하고 그들이 끝을 내기 전까지 촬영은 종료되지 않습니다.
의문이 듭니다.
"과연 이런 형태가 '노동자'가 아니면 무엇이지? 이 방식이 일용직 임금노동자와 다른 점이 무엇이지?" 왜 영상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라 프리랜서인가요. 프리랜서라면 일하는 시간을 내 의지대로 조절하고 계약한 기한 내에만 끝내면 되는 것이 아닌가요? 영상노동은 철저히 제작사가 만들어 놓은 타임테이블안에서만 이뤄집니다. 스탭 개인에게는 시간사용에 관한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촬영 현장에서의 프리랜서라는 미명은 영상노동자를 유린하기 위한 포장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계약서라는 것이 없습니다.
철저히 '갑'과 '을'의 관계인 광고업은 그 하위 단위로 내려갈수록 상하관계가 고착되고 경직됩니다. 그러다 보니 계약서 한 장 없이도 '을'은 열심히 일을 합니다. 사람이 올라서면 안 되는 위험한 곳도 안전장치 하나 없이 올라가 셋팅을 하는 가하면, 굶어도 일을 하고 돈을 주지 않아도 일을 합니다. 갑과 을은 마시는 물마저 다릅니다. 광고주, 제작사 테이블엔 개인 음료와 각종 과자 등의 간식들이 제일 먼저 놓여있습니다. 촬영 셋팅을 위해 일을 하던 스탭들이 그 음료들을 마시려 하면 누군가가 버럭 화를 냅니다.
"이건 먹으면 안돼요."
마치 카스트제도의 브라만과 수드라처럼... 불가촉 천민인것 마냥 우리는 그들의 간식과 음료수에 손을 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제작사가 제공하는 캠팡의자에 앉아 현장을 감시하고 우리는 가끔 장비 위에 앉거나 소품 박스 따위에 앉아서 쉽니다. 이런 환경속에서 일하는 스탭들에게 계약서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그들과 일을 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종종 인건비를 떼이는 경우가 생깁니다. 결제가 미뤄져서 불만을 표하면 일이 끊길까두려워 독촉을 거의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너무 길어져서 연락을 하면 어느새 회사는 폐업신고를 하고 사라진 뒤죠.
광고업계에는 법이 없습니다.
이쪽 영상업계에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작사는 스텝들에게 마음대로 해도 됩니다. 그들 마음대로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반발하지 못하니까요. 그저 스텝들은 그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도덕성이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노동법 내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야간근로란 22시부터 익일 06시 사이에 일어난 노동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06시에 집합해서 다음날 12시에 일이 끝났다면. 그 동안 식사시간 외의 휴게시간이 없었다면 과연 22시부터 익일 06시까지의 근로시간만을 야간근로라고 보는 것이 합당한가요? 8시간을 평균 수면시간으로 본다면 밤10이후의 근로 뿐만 아니라 16시간을 초과하는 근로를 모두 야간근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일을 할 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노동법을 만들 당시 이 부분을 고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광고 뮤직비디오 현장에는 존재합니다. 심지어 뮤직비디오 현장에는 오바차지(업계 초과근로)라는 것도 없습니다. 막내의 경우 20만원을 받고 30시간을 넘게 일을 합니다. 계산해보면 막내는 최저시급(2017년 기준)에 절반도 못 미칩니다. 연속된 최대 근로 시간 제한 법률 도입이 시급합니다. 하루가 아니라 ‘연속해서 18시간 이상 일을 진행 할 수 없다’ 등의 최대 허용 근로시간 말입니다...
노동자란 무엇인가요?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왜 영상스텝들은 노동자가 아닌 거죠? 왜 우리는 비임금노동자로 불리며 기본법률 조차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건가요? 굶겨도 된다. 밤새워 일 시켜도 된다. 다쳐도 보상 안 해줘도 된다. 누가 정한겁니까? 답답할 뿐입니다. 제가 노동법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영사제작기록 업종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예외조항은 없습니다. 다만 ‘이 업종에 대해 근로시간 제한을 두지 않는다.’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를 확인하기 위해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한다면, 그 소송자는 업계에서 조용히 사라지겠죠. 아무도 그를 부르지 않을 테니까요. 그야말로 ‘고양의 목에 방울달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비상구에 글을 남깁니다. 제발 스텝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