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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분이 무엇인지 모를 때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화담 서경덕 선생이 밖에 나왔다가 집을 잃고 길에서 울고 있는 자를 만났던 이야기이다. 서경덕 선생이 물었다.
“너는 어째 우느냐?” 
“저는 다섯 살에 눈이 멀어 이제 스무 해가 됩니다. 아침에 집을 나와 길을 가는데, 갑자기 천지 만물이 맑고 또렷하게 보이지 뭡니까. 너무 기뻐서 돌아가려고 하니 골목길은 갈림이 많고 대문은 다 같게 생겨서 제집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웁니다.”
이에 서경덕 선생이 말했다.
 “내가 네게 돌아가는 방법을 알려 주마. 도로 네 눈을 감아라. 그러면 바로 네 집을 찾을 수 있을 게다.”
그러자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려 제 걸음을 믿고서 바로 집을 찾아갔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색깔과 형상이 전도(澱倒)되고, 기쁨과 슬픔이 작용되어 망상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지팡이를 두드리고 제 걸음을 믿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분수를 지키는 관건이 되고, 집으로 돌아가는 보증이 된다는 이야기다.

서경덕 선생의 일화는 한마디로 본분으로 돌아가라. 그런 뜻일 터이다. 문득 진보정당의 본분은 무엇인가 그런 생각에 잠긴다. 질문만으로도 너무 거대한 물음이 아닐 수 없다. 진보의 본분, 그 엄중하고도 위압적 단어가 마음을 짓누르는 시절이다.

이 글을 통해 진보정당의 본분을 설파하고 싶지 않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런 본분을 간명하게 표현할 재간도 없고, 그런 걸 규정할 깜냥도 안된다. 다만 “본분으로 돌아가라”에서 ‘돌아가라’ 정도에 대해선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부동산과 생태탕으로 얼룩진 보궐선거를 지켜보며, 여전히 정치는 대중의 정동으로 장악된다는 것을 느낀다. 어디 한국만의 일인가. 트럼프 현상도 마찬가지다. 극우, 좌파 포퓰리즘 모두 일정한 정치사적 흐름 속에 있다. 특히 한국의 포퓰리즘은 오래된 전략이자 정치공세를 위한 수단이었다. 역사적으로 보수 진영이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때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개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행보를 선심성 정책이라고 낙인찍고 서로를 노골적으로 비난하거나 대중의 좌절에 ‘사이다’ 발언을 일삼으며 공공연한 ‘혐오정치’를 동원해왔다. 마찬가지로 반대 진영에서 그런 그들을 중우정치의 표본으로 몰아세우며 각자의 기득권 구조를 방어하고 정치적 숙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줄곧 상호 이용해왔다.

실상 포퓰리즘이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배제된 자들의 위협, 즉 민주주의의 위기를 드러내는데 포퓰리즘은 어떤 돌파구를 마련하기도 한다. 과거처럼 계급 구분이 확실하지 않은 현대에 운동사회로부터 탈구된 어떤 다양성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카리스마스적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게 했으며, 기존질서와 단절을 천명하는 레토릭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정치의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포퓰리즘이 소위 대중영합주의로 흐를 때 그 확장성이 깨진다. 반드시 중심성에 대한 이견이 생기고 선후 위계가 조장되며 유불리를 셈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반목을 통해 헤게모니의 핵심이 특정집단의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그친다면 끝내 아무도 대표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 대표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소위 한국의 정치엘리트 집단이 정치를 오로지 정권재창출의 도구로만 쓰는 탈정치적 행태를 보이는 현상도 마찬가지다.

포퓰리즘은 정치적 전술 가치로서 프레임을 바꾸거나, 문제의 본질을 꽤 뚫는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전략이지만, 계급성을 상실하게 될 때, 결국 이해집단 간의 거래와 협상으로 정치의 영역을 축소시킨다. 

민족주의적 감성에 호소하거나, 정작 탄소중립 2050버전을 말하며 부동산 고밀개발, 신공항건설 추진과 같은 앞 뒤 맞지 않는 정책을 내놓는 일들이 손쉽게 일어난다. 내용에는 관심 없고 언표, 공표, 슬로건으로만 소비되는 포퓰리즘은 늘 작금의 비극과 맞닿아 있다. 특히 한국정치는 ‘남 탓’ ‘내로남불’ 없이 선거가 불가능할 정도다. 가십에 주목하고 저급한 공방을 즐기는 대중은 황색저널에 자주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닻을 내린 배가 쉽게 움직이지 않듯, 대중은 자신이 처음 접한 정보가 기준점이 돼 합리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를 ‘닻내림 효과’라고 일컫는데, 그 이면엔 현란한 작명에 치우친 ‘포퓰리즘’적 수사, 일단 한번 던져보자, 아니면 말고, 식의 팩트가 결여된 담론이 한국사회에 횡행하기 때문이다.

본분이 무엇인지 모를 때, 돌아가는 일이 먼저다, 그렇다면 진보가 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서경덕 선생님의 말을 빌려보자면, 우선 상황파악을 다시하고, 우리가 서 있는 위치, 현실적 조건과 상황을 직시하는 일이다. 잠시 동안 “색깔과 형상이 전도(澱倒)되고, 기쁨과 슬픔이 작용되어 만들어진 망상” 때문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잊고 헤맬 때도 종종 있다. 하지만 우리는 때마다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제 걸음을 믿어야 할 터이다. 그것이 ‘본분’ 찾기에 시작이 아닐까 싶다.

시대의 파편화된 요구, 정체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재결집시키는 내적전선을 되찾을 때이다. 와해된 전선 속에서 서로 이행되지 않는 요구만 외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묶는 집합적 결속을 찾아내는 일이 우선이다. 결코 주어진 사회의 다수 대중으로 호명되지 않는 자, 하지만 부분이면서 전체일 수 있는 탁월한 보편자의 스팩트럼을 갖는 일이 필요하다. 

이에 한 가지 사족을 달아본다. 본분을 향한 그 길목을 찾기 위해 눈을 감았다면, 이제 다시 제 걸음을 찾자. ‘노동자’라는 지팡이가 그 길을 안내할 것이다.


2021년 4월 14일
정의당 서울시당 공동대변인 여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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