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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착각은 자유가 아니다. -김기식 더미래연구소 소장
과유불급’. 올 한해 우리 사회, 특히 정치와 그 주변을 지켜보며 느끼는 화두 중 하나는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이 말이다. ‘옳은 일인 건 알겠는데 꼭 그런 방식과 태도를 취해야 하나’ ‘비판할 수 있고, 일부 공감도 가는데 말을 꼭 그렇게 해야 하나’ ‘불가피함과 의도는 일부 수긍이 되는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일년 내내 떠나지 않았다.

 

옳은 일이라 해도 일을 추진하는 방식이나 말하는 태도에 따라 반발과 저항이 커진다. 내가 하는 일이 옳기 때문에 방식과 태도의 문제는 부차적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공감할 수 있는 비판도 과하면 반감이 생긴다. 말의 거칢으로 비판의 강도를 표현하듯 요즘 정치인과 식자들의 비판에는 조롱과 비아냥거림, 인신공격이 난무한다. 말과 글에 개인적 감정이 지나치게 묻어난다. 그래서 보는 국민이 피곤하다. 공감은 가는데 불편하고, 다른 한편으로 지겹고 짜증 난다.

 

왜 이럴까. 개인적 차원에선 스스로를 상징화하고, 자신을 무엇의 화신이나 수호자처럼 착각하기 때문이다. 착각은 자유라 한다. 그러나 착각이 내심에 머물러 있으면 되는데, 그것이 표현되면 주변이 피곤해진다. 평범한 사람의 착각은 가족과 주변 지인에게만 피곤한 일이지만, 정치사회적으로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의 착각은 국민을 피곤하게 한다. 그래서 공인에겐 착각은 자유가 아니다. 절제해야 하는 금기다. 권력과 영향력이 클수록 더욱 그러하다. 착각하지 않을 만큼 자신을 객관화하려는 노력, 성찰하는 자세는 공인의 조건이다.

 

공인의 착각은 인용이든 비판이든 끊임없이 써주는 언론과 열정적으로 반응하는 팬덤에 의해 공고하게 된다. 그렇게 착각이 공고해진 공인의 가장 큰 자기합리화는 소명의식이다. 그러나 소명의식은 때론 개인적 희생까지를 감수하는 공적 책임의식이다. 역사적으로도 공인의 소명의식이 빛난 순간은 개인을 희생할 때였다. 가깝게 우리는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무모한 도전을 거듭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서 이를 확인한 바 있다. 그런데 소명의식이 아닌 착각하는 사람의 행위 동기는 자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하고,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민폐다.

 

최근 정치 영역에서 더욱 강해지고 있는 과도함의 문제는 이런 개인적 차원을 넘어 근본적으로는 정치의 극단화가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정치의 극단화는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선 전후 확인되는 양극화된 미국의 정치 현실은 물론, 인종주의 정당의 출현 이후 유럽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의 정치 현실도 마찬가지다.

 

이런 정치의 극단화는 깊은 정치적, 사회경제적 좌절에 기초한다. 트럼프의 지지기반은 인종적으로는 주류지만 사회경제적으로 좌절한 중하층 백인들이다. 서구 인종주의 정당의 주요 지지층이 청년세대인 것도 진보가 만든 기성세대 중심의 노동, 복지시스템에 대한 좌절에 근거하고 있다.

 

정치는 사회경제적 균열 위에 위치하고 그러해야 한다고 한다. 또 정치사회적 균열은 변화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대립과 갈등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정치는 균열 위에 서서 다른 한편으로 대화와 설득, 타협의 과정을 거쳐 통합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백성이, 나라가 편하다.

 

2차대전 이후 소득불평등이 가장 크게 축소되었던 ‘대압축의 시대’ ‘복지국가의 시대’는 현대사에서 그나마 백성이 편하고, 진보가 만개했던 시기였다. 역사적으로 가장 두터운 중산층에 기반해 사회적 통합을 이루었던 그 시기를 주도한 것은 정치였다.

 

물론 때론 기득권적 저항을 돌파하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치의 과정을 돌파로 일관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래서 정치가 어렵다. 판단의 기준은 무엇일까. 30년간 정치를 안팎에서 지켜보며 가진 생각은 정치적 사안은 타협하고,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와 같은 사회경제적 개혁은 과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중도주의를 반대한다. 중도에 서서 좌우를 끌어안겠다거나, 좌우를 넘나들며 무엇을 하겠다는 것은 착각이다. 그렇게 해서 집권한 예는 없다. ‘진보에 닻을 내리고 중원으로 나아가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책으로 집권한다’는 영국 노동당 전략가인 필립 굴드의 명제는 어설픈 중도주의 통합론과 선을 긋고, 정치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진보의 정치는 사회적 균열 위에 서서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옹호하며 사회적 통합으로 나가야 한다. 분열이 격렬하게 지속되었을 때 힘없는 백성의 삶이 나아진 전례는 동서고금에 없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74361.html#csidxd66bec63dec38429623b37ead924b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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