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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의공감 3호] 사회적 경제 - 내가 만난 칼 폴라니

내가 만난 칼 폴라니

 

김현철 익산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

 

「인류역사에는 언제나 ’시장‘이 있긴 했는데 인간사회를 조직하기 위한 일종의 악세사리 이상의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시장에 의해 구성된 노동 분업조차 없었다 (칼 폴라니)」


전국이 미세먼지로 난리이다.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차량 2부제를 실시하고 있고 조달청장이 공기청정기의 수급상황에 대한 현장점검에 나섰다고 하니 이제는 더 이상 공짜로 마음껏 숨 쉴 수 없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자유재 중 일부는 더 이상 원하는 만큼 소비할 수 없게 되었다. 물에 이어 공기가 그렇다. 모 학자는 우리가 밥을 해먹기 위해 불을 지펴 연기를 내뿜는 그 순간부터 공기는 더 이상 자유재가 아니라고 한다. 자동차, 석유화학 등의 기업들은 대기를 하수구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 공기를 마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과거 어느 권력자도 공기를 상품이나 서비스로 교환할 수 없었다. 권력의 기초는 자원과 보상의 통제에 있는 것이지 공기의 배분이나 판매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자본이 공기를 더 이상 자유재로 이용될 수 없게 만들었고, 이제 그 산업자본이 공기를 상품화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산업자본은 권력을 통제하고 있다.

 

19C, 산업혁명으로 환경과 사회가 파괴되어 가고 산업자본이 최소한의 생을 유지하기 위한 자유재들을 독점하게 되는 영국의 런던을 보면서 윌리암 블레이크는 ‘사탄의 맷돌 (Satanic mills)’이 돌아가고 있다고 하였다. 칼 폴라니는 시장 중심의 탐욕적 자본주의를 경계하면서 이 용어를 쓰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탐욕적 자본주의 즉, ‘사탄의 맷돌’이 돌아가고 있다. 경제개발만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든 그 대가를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경제적 자유주의에 빠져있다. 최근 GM 사태는 이러한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주류경제학자들은 경제에 관련해서는 시장에 맡겨 두어야 한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에 의해 시장이 스스로 조정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조정시장 (self-regulating market)’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정권들이 그랬듯이 자유방임은 국가에 의해 계획된 산물이다. 폴라니는 국가의 여러 정책들이 시장의 자기조정에 더욱 의존하여 사회에서 경제를 뽑아내는 쪽으로 움직인다면 보통사람들은 더욱 비싼 비용을 치르게 된다고 경고하였다.

 

지난 정권들에서 이루어진 자유방임, 엄격히 말하면 정부에 의해 계획된 산물들 때문에 우리는 이미 비싼 비용을 치르고 있다. 출자총액제한제도의 폐지로 인한 대기업의 골목상권 붕괴, 금산분리법의 완화를 통한 대기업의 순환출자구조 강화와 금융기관의 사금고화, (수출)대기업을 위한 고환율 유지로 전방산업의 종속, 그리고 법인세 인하로 인한 사내유보금 증가 등으로 기형적인 경제구조가 형성되어 심각한 양극화와 디플레이션 등에 고통 받고 있다. 통계청 (2017)에 의하면, 10년 우리나라의 경제적 부 (GDP)는 28.6% 증가했으나 삶의 질 종합지수는 11.8% 늘어나는 데 그쳤다. 특히 가족·공동체, 고용임금, 주거 부문에서 삶의 질 향상이 더딘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사람중심의 관계적 삶뿐만 아니라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것들이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대자본에 대한 집중은 가계소득과 기업소득의 양극화뿐만 아니라 가계소득 내에서의 양극화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사회는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대응을 만들어낸다. 19C, 시장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시장에 나오는 재화의 양을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일련의 법령과 정책의 연결망이 노동·토지·화폐에 관한 시장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만든 강력한 제도들로 통합되었다. 폴라니는 이를 ‘이중적 운동 (double movement)’의 결과라 하였다. 이러한 사회보호운동은 사회의 모든 집단이 일구어 낸 자생적이고 비계획적인 대응인 것이다. 2017년 일었던 촛불운동은 계획된 비민주적인 자유방임에 대항하여 생겨난 자생적이고 비계획적인 사회보호운동이었다. 뿐만 아니라, 효순이와 미선이 사건,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세월호 때의 우리가 들었던 촛불은 그러한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시장중심의 경제에 대해서도 사회보호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경제민주화의 요구와 사회적경제 운동들이 그러한 것이다. 특히 민간에서 발현하여 정책화되는 사회적경제 운동은 자생적이고 비계획적인 대응의 전형이다. 우리가 신념처럼 받아들여 왔던 시장 자본주의의 시장실패를 ‘사람중심’, ‘삶의 중심’으로 다시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사회적경제이다. 공동체 중심의 사람과의 관계를 복원하고, 모두가 사는 맛이 나도록 하는 것, 대자본이 아닌 사회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의 성장을 도모하여 부의 양극화를 좁히는 것, 즉 구성원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 이것이 사회적경제이다. 마을에 초상을 치룰 수 없는 경우, 마을사람들이 쌀을 모아 상을 치르게 하였고, 환갑잔치는 마을의 잔치였으며,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학우들에게 도시락 뚜껑에 십시일반으로 배고픔을 나누었던 공동체적인 삶이 바로 사회적경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혹자는 사회적경제를 ‘살림살이 경제’라 부른다. 무역수지가 흑자이다, 경기가 좋아졌다 하는 것들이 반드시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하지 않는다. ‘배고픔’을 상품화 하지 않는 것, ‘생’과 ‘삶’을 돈벌이 수단으로 하지 않는 것, 지역경제를 풍부하게 하는 소비문화로 지역 내 모두의 벌이가 나아지는 것, 약자들에게 배려와 나눔을 실천하는 것, 이로 인해 삶의 경제가 좋아지는 것, 이것이 바로 살림살이 경제이며, 사회적경제가 지향하는 것이다.

 

경제란 경제이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 종교, 사회관계들에 종속되어 있다. 폴라니는 이를 ‘묻어들어 있다 (embeddedness)’라고 하였다. 이는 정치, 종교, 사회관계들에서 ‘사람’의 삶과 생존을 경제 또는 시장의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거대한 전환’이라는 고전을 통해 폴라니를 만났다. 그가 허구상품이라 했던 토지, 노동, 화폐는 현재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으며, 경제가 사회의 전부이고 소유한 부의 많음이 모든 행위를 정당화시켜주는 사회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이런 우리 사회를 보고 폴라니는 어떻게 진단할까?

분명한 것은 경제는 사회의 지속성을 위해 행위 되어져야 하고 따라서 이제는 소수를 위한 ‘경제적 성장’이 아닌 ‘삶의 지속성’을 추구함으로써 사회를 안전하게 만들어 가는데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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