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 하러 왔더니 행정 잡무를 시키네?
이공계 대학원생은 보통 실험을 일상적으로 한다. 실험을 안 하는 이공계 대학원생이라면 컴퓨터로 무언가를 만들거나 종이에 각종 식을 적어가며 공부를 한다. 그리고 인문계 대학원생과 마찬가지로 강의도 듣는다. 그런데, 과연 이공계 대학원생들의 일상을 이것들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의 이공계 연구실에서 진행되는 실험들은 실험 자체도 물론 복잡하겠지만, 실험에 착수하는 것부터 실험을 마무리하는 단계까지의 행정 절차도 복잡하다. 그 행정 절차는 연구실이 어떤 기관에 속해있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공통된 부분들만을 놓고 비교적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다. 실험 기자재부터 학생 인건비 등 연구에 필요한 예산은 연구실이 속한 기관으로부터 지급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연구를 많이 하고 싶다면, 정부 부처 등이 공모하는 연구개발사업에 과제제안서를 제출한 뒤 제출한 연구자가 해당 사업에 선정되면 정부 부처로부터 연구비가 해당 연구자에게 지급된다. 연구가 마무리 될 때엔, 연구보고서를 작성하여 소속 기관이나 연구개발사업을 공모한 정부 부처에 제출해야 하며, 지급된 연구비에 대한 정산 내역 또한 소속 기관이나 정부 부처에 제출해야 한다. 연구실이 속한 기관이 어떤 종류인지에 무관하게 공통된 절차만 이렇게 따져보아도 세부적으로 수많은 행정 업무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행정 업무가 많고 절차가 복잡하다면 그것을 담당하는 행정 직원들이 각종 연구 기관에 존재할 것이라고도 추측할 수 있고,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정 업무 중 상당 부분은 현실적으로 이공계 대학원생들의 몫이다. 그리고 대학원생 몫의 행정 업무는 이공계 대학원생의 본분인 실험 및 연구에 방해가 될 정도로 많은 경우도 흔하다.
최근에 서울대학교의 한 교수가 대학원생들에게 8만 장이 넘는 논문과 서적을 스캔시켰다는 것이 SBS와 경향신문을 통해 알려졌다(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2&aid=0002757377). 학생들은 스캔해야 할 문서량이 너무 많아 이 일을 ‘대장경 사업’이라고 불렀고 한 학생은 항의를 하다가 결국 학교를 그만둔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교수는 SBS에 스캔 업무를 시킨 것은 맞지만 학생들이 그렇게 느끼는 줄은 몰랐다고 주장했다.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이외에도 어떤 행정 업무를 하길래 본분인 실험과 연구에 집중하기 어려워하는지 그 답을 이공계 대학원생들에게 직접 들어보았다. 위에서 소개된 실험에 관한 행정 절차는 가장 공통적인 사항이고, ‘대장경 사업’도 하나의 케이스에 불과하다. 이것들만으로는 이공계 대학원생들의 어려움을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연구를 하는 다양한 이공계 대학원생들로부터 가능한 한 다양한 행정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행정 업무가 무엇인지 판단하고 당장의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행정 업무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고 왜 그런 업무들 때문에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힘들어하는지를 중점적으로 물었다. 기자가 임의로 질문을 정하여 인터뷰 대상이 그것에 답하는 형식으로 할 경우, 다양한 이야기를 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인터뷰 대상에게 아무런 제한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을 요청했다.
A씨: “국민의 혈세가 잘 쓰이고 있는지 확인하는 재물조사? 어차피 잘 쓰이고 있지도 않고 나 같은 대학원생만 고생해.”
재물조사라는 걸 한다. 연구기관의 자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물건들이 잘 사용되고 있는지 파악하는 작업이다. 국민의 혈세로 구입한 물건들이 잘 사용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취지대로 이루어지는 작업인지는 의문이다. 재물조사를 해야 할 때는 몇일 동안 온 연구실을 다 뒤적이며 살펴보아야 한다. 재물조사를 하는 기간에는 연구에 집중하는 게 사실 상 어렵다. 책상, 의자, 컴퓨터부터 각종 연구장비까지 자산 번호 스티커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찾아본다. 자산 번호 스티커는 보통 눈에 잘 띄는 부분에는 붙어있지 않다. 예를 들어 책상의 경우엔 책상 다리 구석에 붙어있다. 이렇다보니 재물조사를 하는 기간에는 연구실 전체를 들어옮기는 이사를 하는 느낌이다. 물리적인 힘을 쓰는 건 그렇다쳐도, 기관의 구성원들이 평소에 자산 관리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다면 매우 골치 아파진다. 분명 연구기관의 전자정보시스템의 자산 목록에는 존재하는 물건이 아무리 연구실을 뒤져보아도 안 나오는 경우도 많다. 알고 보니 그 물건은 다른 연구실에 가있다거나 하는 식이다. 책상이나 의자 같이 범용적인 물건이면 더더욱 이런 경우가 많다. 다른 연구실로 진짜 옮긴다면 전자정보시스템에서도 이관 신청을 해서 정식으로 옮겨야 하는데, 그렇게 물건 하나하나 신경 쓰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보니 이런 경우가 많이 생긴다. 결국에 재물조사를 실제로 진행하는 우리만 고생하고 국민의 혈세로 구비한 물건들이 잘 활용되는지 파악하기는 어려운 셈이다.
“짜장면 먹으면서 연구 회의를 한다고?”
영수증 지급 신청이라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국가연구개발사업 선정에 따라 지급되는 연구비는 후불 방식으로 처리 된다. 즉, 법인카드를 일단 긁고 나서 그 영수증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연구비로 구입한 것인지 보고를 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이러한 영수증 지급 신청 절차가 번거롭고 따져야 할 사항도 너무 많다는 것이다. 연구비도 직접비와 간접비, 그리고 그것을 또 세부적으로 나누어 비목이 다양하다. 비목마다 영수증 지급 신청 시 준수해야 할 사항도 전부 다르다. 특정 비목은 영수증 긁기 전에 기관 내부결재를 먼저 올려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연구과제에 따라서도 준수해야 할 사항이 다르다. 특히 회의비 영수증을 처리하는 것이 가장 괴롭다. 연구 내용과 관련하여 회의를 할 때, 식대로 쓰라고 주어지는 예산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회의비를 사용할 때 진짜로 연구 내용과 관련된 회의를 하는 연구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싶다. 짜장면 먹으면서 연구 회의를 한다고? 결국에 회의비 영수증 지급 신청을 할 때 회의 내용은 거짓말로 가득 찬다. 국민의 혈세로 거짓말 실력이나 늘리려고 내가 대학원생이 됐나 자괴감이 든다.
B씨: “연구실 행정 잡무도 빈익빈 부익부”
공책, 사무용품 등의 소액 물품이나 소모품 등 20~30만원도 안 되는 것들도 견적과 관련된 행정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가끔 바꾸는 물품이라면 몰라도 짧은 주기로 바꾸는 물품들은 되게 귀찮다. 견적은 가격하고만 관련된 것이지만, 실제로 실험을 할 때는 빨리 구입하여 빨리 배송되고 바로 사용하는 것도 중요한데 그런 부분은 고려가 안 되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정부가 안전 관리와 관하여 연구 현장의 상황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화학 물품 중 위험 물품으로 분류되는 것이 있다면 공기 중에 몇 ppm이 있는지까지 다 적어야 한다. 기계공학 쪽 연구실은 몇 데시벨 이상은 귀를 막고 작업하도록 했다는데 소음 측정기를 갖춘 연구실이 얼마나 있나.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현장이 어떤지 살피면 좋겠다. 회식이나 출장 시 학회 사진도 찍고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다 보고하고 복명해야 출장비를 받을 수 있다. 자질구레한 것까지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연구 종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런 걸 정하니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수탁사업 과제비와 관련하여 생물학 장비가 비싸다보니 연구자들이 꼼수 부리게 만들기도 한다. 동물실험계획서도 쥐와 같은 동물을 사용할 때 연구가 유동적이란 걸 고려하지 않는다. 실험 종료 시점이 언제일지 어떻게 알고 몇 마리를 쓸지 미리 어떻게 알겠나. 전체적으로 돈과 관련하여 요구사항이 너무 많고, 행정원이 해야 할 일을 대학원생인 우리가 다 해야 한다. 돈 많은 연구실의 경우는 행정원을 별도로 고용하더라. 내 룸메이트의 경우 연구실이 크고 과제도 많이 따오는데, 문제는 행정원도 교체가 빨리 된다고 하더라. 행정원도 비정규직인데다가 일을 견디지 못 해서 그렇다더라. 아마 연구과제비 중 인건비로 행정원에 대한 급여가 나갈 것 같은데 확실히는 모르겠다. 돈 많은 연구실은 실험에 전념할 수 있는데, 돈 적은 연구실들은 행정 일도 하느라 허덕이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웃기는 게, 돈 많은 연구실이 실험 테크니션들을 두기도 하는데, 반복 실험을 하라고 뽑아놓은 테크니션한테까지도 행정 잡무를 시키기도 하더라. 규제를 만들어놓아도 그걸 뚫는 꼼수를 연구자들이 생각해내게 된다.
C씨: “가난한 대학원생이 이상한 출장 행정 처리 때문에 사비로 학회 다닌다.”
출장 신청이 짜증난다. 이래저래 규정이 많기도 하고, 출장비를 받기 위해서 출장 가서 지출한 내역에 대한 영수증을 사후에 제시하면 이건 이래서 안 된다고 그러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고 그러고 말이 다르다. 안 그래도 적은 출장비인데, 이런 식으로 돌아가다보니 결국 출장비를 못 받은 적도 있다. 학생이 사비로 출장을 가야 한다니. 이런 학생들이 나 말고도 많을 것이다. 대학원생이 학회에 참석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참고 출장을 갈 수 밖에 없다. 연구과제와 관련하여 연차보고서 등도 대학원생의 몫이다. 외국의 경우엔 그런 행정 보고서를 학생이 아니라 지도교수가 한다더라. 외국에서 학생들은 연구만 한다고 한다. 외국의 경우를 듣고 놀랐다.
D씨: “고액 집행이라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면 애초에 책임 없는 학생한테 시키지 말든가”
구매 업무나 행사 또는 손님 방문 관련 잡무를 한다. 연구 과제와 관련하여 박사님들이 소재를 구매하라고 요구해서 구매하면, 안 해도 됐었다고 뒤늦게 말을 바꿔서 무안해지게 만든다. 그냥 사는 게 왜 힘드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구매 행정 절차도 요구서 등을 작성해야 하고 별 걸 다 해야 한다. 게다가 뭔가 잘못되면 학생 탓을 한다. 고액이라서 잘못되면 문제 생길 수 있으면 학생들한테 자기가 다 맡겨놓지 말든가. 회의실 예약 같은 것도 내가 하는데, 다른 행정 업무들이 워낙 힘들다보니 이건 혼자 속으로 이해해준다. 그리고 연구실이 이사하면 짐 나르는 것을 포함하여 이사와 관련된 모든 일들이 나와 같은 대학원생 몫이다.
E씨: “학생이 아니라 무슨 교수 비서 같다”
떠오르는 것들을 나열해보면 영수증(회의비) 처리, 시약재료 등 구매 증빙 작업, 회의록 작성, 연구과제 보고서 작성이다. 외국은 이렇게 문서작성을 연구원이나 학생한테 안 시키고 담당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한다. 교수님 승진을 위한 업적 정리도 대학원생인 내가 한다. 보고서 작성도 매번 포맷이 달라지고 각 항목마다 중복된 내용을 요구하면서 분량이 너무 많아서 결국 양으로 승부하게 된다. 보통 포닥(Post Doctor)이 연구 과제를 수행하기 때문에, 외국인 포닥이 있는 경우 한국어 서류작성은 다 대학원생이 한다. 교수님이 부탁하는 수업 자료도 만들어야 한다. 과 행사가 있으면 그것도 내가 진행한다. 대학원생인 내 친구의 경우, 교수가 벤쳐 욕심이 있어서 관련 일도 내 친구 몫이더라.
F씨: “제발 쓸 데 없는 행정 처리 하라고 하지 마라. 논문 좀 읽자”
회의비 영수증 처리가 가장 쓸 데 없다. 실험에 정말 도움이 되는 재료나 장비 같은 걸 산다고 하면 귀찮더라도 ‘나한테 도움이 되겠지’ 하는데, 회의비는 정말 ‘의미 없게 왜 하지’ 이런 기분이 많이 든다. 회의비 영수증은 회의 주제를 적고 서명을 하라는데 솔직히 거의 지어내고, 서명도 제대로 받은 적이 거의 없다. 이런 거 하는 데에 시간 뺏긴다. 논문 조금이라도 읽을 시간인데. 연구 과제 정산하는 것도 싫다. 당연히 국가 돈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하긴 한데 다 돌려쓸 방법이 생기니까 굳이 왜 해야 하나 싶다. 연구 과제 보고서의 경우 국민의 세금을 쓰는 거니까 제대로 써야 하는 것은 맞는데, 너무 쓸 데 없는 게 너무 많다. 연구 과제 마다 논문 실적을 5년 이내의 논문으로만 작성하라고 하고, 어느 과제는 최근 10년 이내의 논문만 작성하라고 하고, 또 어떤 과제는 전체 논문 실적을 작성하라고 하고, 이런 것에 시간을 엄청 빼앗기고 짜증난다. 연구실이 이사를 할 때도 관련 부서마다 알고 있는 내용이 달라서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다수의 대학원생들과 인터뷰를 하며 개개인마다 수행하고 있는 행정 업무도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학원생들이 공통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행정 업무의 경우, 즉각적으로 논의에 돌입하여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수의 대학원생들이 겪고 있는 특이한 행정 업무에서의 괴로움이 덜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대학원생들이 각자 겪고 있는 어려움이 다양한 것은 연구실 내의 권력 구조 때문이다. 교수가 ‘갑’이고, 대학원생이 ‘을’이기 때문에, 위 인터뷰에서 언급된 것들 외에도 ‘교수가 시키면 대학원생은 그냥 할 수 밖에 없는 셈’이다. 더군다나 각각의 연구실들이 독립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닫힌 구조’라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었다. 공통적인 어려움 외에도 각각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해결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한원석 기자 (g16501@kist.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