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로 사느니 반역자가 되겠다.”
20세기 초,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끌었던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말했다. 남성에게 귀속된 존재로 사느니 차라리 역적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팽크허스트가 21세기에 살고 있는 여성에게 “°‘정치적’ 자유를 얻었는가”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100년이 흐른 지금, 대다수의 국가에서 여성은 참정권을 가진다. “°자유를 얻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선뜻 답하기 어렵다. 여전히 사회는 여성에게 특정한 여성상을 요구한다. 여성은 발목을 감고 있는 족쇄를 벗어날 수 없다.
“여성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기 힘든 현실”
“여자는 허리가 가늘고 골반이 커야 예쁘다. 그래야 옷을 입었을 때도 예쁘다”,”가슴을 모았을 때 가슴 골이 생겨야 섹시하고 예쁘다”, “민 낯이 예뻐야 정말 예쁜 여자다”,” 적극적인 여자는 무섭다. 여자는 수줍고 부끄러움이 많아야 귀엽다”와 같은 말들이 드라마, 영화, TV 프로그램 등에 서슴없이 등장한다. 다들 화면 속 여자를 기준으로 삼는다. 어느새 나도 화면 속 여자를 기준으로 여겨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일반인이 아닌 그녀가 ‘일반인’의 기준이 된다.
(지난 5월 25일, 숙명여대 중앙 여성학 동아리 S.F.A가 개최한 행사, ‘보지 좀 보지?’ 포스터 / 이다경 기자)
지난 5월 25일,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축제가 열렸다. 중앙 여성학 동아리 S.F.A 의 부스 앞에서 행인들의 발걸음이 일제히 멈췄다. 보드 판에 ‘읍읍 좀 보지?’라는 제목으로 여성의 성기와 가슴을 그린 각기 다른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학교 측의 검열을 거치기 전, 본 명칭은 ‘보지 좀 보지?’ 이었다. 행사 취지도 적혀 있었다. “매체에 의해 왜곡된 여성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여성으로서 자신의 몸을 올바르게 바라보자.” 해당 행사는 온라인에서 ‘뜨거운 감자’가 됐다. 각종 커뮤니티마다 수 백 개의 댓글이 달렸다. 일베(일간베스트)에도 게시됐다. “표현이 선정적이다. 불쾌하다” 부터 “취지는 공감한다. 하지만 조금 순화해서 표현해야 한다”, “이렇게 시작해야 여성에 대한 인식이 변화할 수 있다”까지 수많은 반응이 나왔다.
지난 15일, 행사를 주최한 숙명여대 중앙 여성학 동아리 ’S.F.A (이하 스파)’ 회장 ㄱ씨와 부원 ㄴ씨를 만나보았다. “이번 행사는 ‘축제를 즐기자’ 라는 생각으로 진행했다. ‘우리가 그저 재미있으면 좋겠고 외부 반응도 걱정하지 않는다” 고 말문을 열었다.
“여성은 왜 자신의 신체에 대해 감추고 부끄러워 해야 하나”
‘스파’는 여성의 성기를 가리키는 ‘보지’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사용했다. 자연스레 논란의 중심이 됐다. ㄱ씨는 “작년 6월 퀴어문화축제에서 열린 ’보지 파티’ 행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여성의 몸을 여성이 되찾아 한다’고 생각했다”고 행사 취지를 설명했다. ㄱ씨는 남자의 성기를 본 뜬 상품, 기념물 등 다양한 아이템들이 시중에 있다. ‘사람의 신체인데 똑같이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겼다고 했다. 여성의 신체라는 이유로 부끄럽게 여기고 감추는 것이 의아했다. ‘여성 스스로 기존의 틀을 깨자’고 생각해 행사를 추진했다고 밝혔다.
ㄴ씨는 “미디어나 포르노가 여성의 신체를 드러낼 때 ‘핑크빛 유두’, ‘가슴골이 있는 글래머’와 같이 왜곡된 여성상을 담는다”고 말했다. ㄴ씨는 왜곡된 여성상을 접한 ‘여성’이 자신의 신체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비교하게 된다며 비판했다. ㄴ씨는 사람의 신체는 각기 다른 것이 당연하다. 화면 속 그녀와 다르다고 해서 잘못된 것도 이상한 것도 아니라고 밝혔다.
“외부 반응을 왜 두려워 해야 하나? 처음부터 긍정적 반응을 얻은 페미니즘 운동은 없다.”
페미니즘 운동이 처음부터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 낸 적은 없었다. ‘스파’ 역시 이번 행사가 ‘뜨거운 감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ㄱ씨는 오히려 “욕을 듣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라고 반문했다. ㄱ씨는 “행사를 통해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현실을 지적했다. 일련의 반응을 끌어냈다.소기의 성과를 얻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ㄴ씨는 갑론을박을 통해 여성이 처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행사를 진행하며 반응을 직접 확인했는가’ 라는 물음에 ㄴ씨는 다양한 반응을 겪었다고 말했다.못본 척하고 지나가거나 표정을 찌푸리고 지나가는 사람, 부스 앞까지 와서 놓고 막상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는 사람, 관심있는 표정으로 포스터를 읽고 설명을 들은 사람까지. 온라인 반응도 언급했다. ㄱ씨는 페이스북 게시 글에 대해 “행사 자체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었다. 왜 행사를 열었는지 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한낱 이야깃거리로 여겨져 안타까웠다.”고 밝혔다.
(숙명여대 중앙 여성학 동아리 S.F.A의 활동 포스터 / 이다경 기자)
“여성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대응해야 한다…|..주체성을 가지자”
ㄱ씨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여성이 주체성을 가지려 하면 비난이 쇄도한다고 토로했다. 여성이 자신의 성기를 일컫는 단어인 ‘보지’를 자유롭게 쓸 수 없는 현실을 언급했다. ‘여성의 것’이지만 ‘여성의 것’이 아닌 개념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ㄱ씨는 이러한 활동의 첫 걸음으로 ‘보지 좀 보지?’ 행사를 개최한 것이라고 말했다. ㄴ씨는 뿌리 박힌 성 고정관념이 여성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이 성 고정관념을 양산한다. 교육 과정을 통해 구성원은 획일화 된 성 관념을 주입 받는다. 구성원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재생산하여 성 고정관념이 더욱 공고해 진다.”
여성 운동을 하고 있는 20대 여대생의 입장에서, 여성 스스로가 변화의 목소리를 선뜻 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물음에 ㄴ씨는 ‘개인이 다수와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성의 문제가 크게 주목 받지 못하는 현실도 문제라고 주장했다. ㄱ씨는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가 가장 큰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여성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여성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는사회가 문제라고 설명했다.
ㄱ씨와 ㄴ씨는 공통적으로 여성이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은 자신을 둘러싼 프레임을 깨고 현실의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 문제에 대한 전략을 짜고 대안을 제시해야한다. 그제서야 사회는 여성의 목소리에 주목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전략과 대안이다.” - 페미니즘 운동의 방향성
‘스파’의 행사가 지닌 사회적 의의를 숙명여대에서 여성학 강의를 하고 있는 A교수에게 물었다. A씨는 페미니즘 운동은 목적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목적에 따라 전략과 대안이 도출된다. A씨는 “ ‘스파’의 행사가 만약 사람이나 자금처럼 기반을 모으기 위한 목적이면 실패다. 하지만 ‘스파’의 행사는 기존 질서를 흩뜨리고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A씨는 “여성이 성별 대결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전략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젠더 문제를 권력 관계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가 여성이 스스로 변화의 목소리를 내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물음에 A씨는 사회 전반적으로 젠더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를 위해 젠더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A씨는 페미니즘 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정신은 냉철하게 전략은 부드럽게” 이제는 ‘여성’이라는 성별 하나로 연대를 종용할 수 없다. 여성 안에서도 다양한 정체성이 있다. 각자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 여성 내부에서 횡단의 정치가 이뤄진다. 성별을 나눌 필요가 없어진다. 연대를 위한 외연이 확장된다. 상대의 목소리로 설득하고 포용해야 한다. A씨는“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목소리를 내자고 연대해서 두려움을 이겨내자”고 말했다.
(숙명여대 중앙 여성학 동아리 S.F.A 포스터 / 이다경 기자)
“다양성을인정하는 사회로 나아갔으면, 양성평등이 아닌 성평등, 여성이 아닌 비남성”
‘스파’는 여성학과 함께 젠더 정치학을 다룬다. ㄱ씨는 이번 행사를 통해 다양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교내 수업에 젠더 관련 강의가 추가되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ㄱ씨는 “대자보를 통해 학우들에게 젠더 관련 강의를 들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 할 계획이다”라고 향후 계획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