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노회찬 공동대표 고별사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원동지 여러분!
지난해 10월 21일 진보정의당이 창당하는 자리에서 저는 당대표 수락연설을 통해 여러분들께 6411번 버스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6411번은 서울 구로구 거리공원에서 출발해서 강남을 거쳐 개포동 주공 2단지까지 대략 2시간 정도 걸리는 노선버스입니다. 내일 아침에도 이 버스는 새벽 4시 정각에 출발합니다. 새벽 4시에 출발하는 그 버스와 4시 5분경에 출발하는 두 번째 버스는 출발한지 15분 만에 신도림과 구로시장을 거칠 때쯤이면 좌석은 만석이 되고 버스 안 복도까지 사람들이 한명한명 바닥에 앉는 진풍경이 매일 벌어집니다.
새로운 사람이 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매일 같은 사람들이 같은 정류소에서 타고 같은 곳에서 내립니다. 그래서 시내버스인데도 마치 고정석이 있는 것처럼 같은 좌석에 앉고 내립니다. 어디서 누가 타고 어디서 누가 내리는지 서로 다 알고 있는 매우 특이한 버스입니다. 이분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이 버스를 타고 새벽 5시 반이면 직장인 강남의 빌딩에 출근해야하는 분들입니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시각이기 때문에 매일 이 버스를 탑니다. 한명이 어쩌다 결근을 하면 누가 어디서 안탔는지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시간이 좀 흘러 아침 출근시간과 낮에도 이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고 퇴근길에도 이용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러나 새벽 4시와 4시 5분에 출발하는 이 버스가 출발점부터 거의 만석이 되어 강남의 여러 정류장에서 5.60대 아주머니들을 다 내려준 후에 종점으로 향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분들이 아침에 출근하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 딸과 같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 빌딩을 드나들지만, 그 빌딩에 새벽 5시 반에 출근하는 아주머니들에 의해서 청소되고 정비되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92만원 받는 이분들은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투명인간들입니다. 지금 현대자동차 그 고압선 철탑위에 올라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24명씩 죽어나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용산 남일당 그 건물에서 사라져간 다섯 분도 투명인간입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들은 아홉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 분들이 진보정의당도 모르고 조준호를 모르고 심상정을 모르고 이 노회찬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분들의 삶이 고단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겠습니까?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 있었습니까? 그들 눈 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
오늘은 진보정의당이 출범한지 정확히 7개월이 되는 날입니다. 당을 둘러싼 국내외 정세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저 또한 7개월 전엔 자랑스런 진보정의당 당원으로 이 자리에 섰지만 오늘은 현행 법률상 당원이 될 수 없는 자가 되어 여러분께 고별사를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지만 변하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내일 새벽에도 6411번 버스는 정해진 시각에 출발합니다. 수많은 투명인간들은 여전히 피곤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이 손에 닿는 거리에 아직 우리는 없었습니다. 이 분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우리의 신념과 의지는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분들과의 거리 또한 변하지 않고 있다는 괴로운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진보정의당의 앞길에는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기만 하면 되는 철로는 놓여 있지 않습니다. 진보정당의 앞길에는 이정표도 신작로도 없습니다.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선 우리는 더 바뀌고 더 채워야 합니다. 우리는 혁신의 주체이지만 동시에 우리 스스로가 혁신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할 때 우리는 조금이라도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에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모로 부족한 저를 믿고 여기까지 함께 온 분들께 감사와 격려의 인사를 드립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가장 소중한 사람은 함께 손을 잡고 그 길을 걷는 길동무들이라 합니다. 당원동지 여러분 사랑합니다.
2013년 7월 21일
노 회 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