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정신적 아픔을 표현하는가>
정신건강 분야에는 잘못된 가정이 널리 퍼져있다. 정신질환은 당대의 전문적이고 대중적인 믿음들과 문화의 흐름과는 별도로 존재하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가정이다(81p). 그러나 아픔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뿐 아니라 사회마다 다르다. 게다가 정신적 고통을 표현하는 사회의 서사마다 다르기도 하다. 홍콩에서 거식증은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었다. “마른 몸매에 대한 강박 때문에 젊은 여성들이 거식증에 걸린다”는 서구 사회의 서사가 홍콩에 유입되기 전에도 홍콩에는 거식증이 존재했다. 그리고 거식증 환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다이어트와 거식증을 연결시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링이 거식증이라는 질환 범주가 있다는 사실을 맨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그것이 어떻게 자신에게 적용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 자신의 행동은 음식에 집중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문제는 자신의 무의미한 삶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자신의 경력이나 사랑, 사회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신경을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음식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살고 싶지 않은데 왜 음식을 원하겠는가?”(75)
홍콩에서 거식증이나 폭식증 같은 식이장애들이 늘어나고 정신적 고통이나 다이어트 등과 같은 활동과 연결짓게 된 것은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같은 서양식 질환 범주들이 유입되고 우세해지며, 90년대에 대중매체를 통해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폭식증을 ‘큰 소리로 도움을 청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였다. 젊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고통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해 유명인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따라 하게끔 조장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 사회의 폭발적인 우울증의 증가와 우울증 환자들의 자살 시도들에 대해서도 하나의 해석의 관점을 제공해준다. 일본에서 우울증은 전혀 자살과 연결돼서 사고되는 질환이 아니었다. 우울증과 자살이 연결된 것은 오시마라는 한 일본인의 자살에 대한 책임을, 오시마의 부모가 오시마가 일한 회사에 책임을 물어 소송을 걸고 또 승리한 게 알려지면서였다.
“처음에 이 소송에 관한 이야기가 퍼져나갔을 때, 사람들은 가족이 아니라 회사가 종업원의 자살 때문에 발생한 손해를 보상받기 위해 소송을 제기한 것이냐고 묻곤 했습니다. 대중매체에서 원고가 승소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많은 일본인들이 자살이 우울증이라는 정신질환 때문에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를, 아마 난생 처음 들었을 겁니다.”(276)
이러한 이야기는 우울증과 자살을 너무도 쉽게 연결시키곤 하는 우리들에겐 굉장히 생소한 애기일 것이다. 일본인들은 오시마의 자살 이후에도 자살이 도덕적 또는 철학적 의미를 지닌 의도적 행위인가, 아니면 정신질환을 앓는 개인의 절망적 행위인가에 대해 견해가 계속 엇갈렸다. 자살의 유행 또는 자살 행위 자체를 정신질환의 결과로 보는 공통의 여론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의 역사, 문학, 영화에는 일본 무사가 할복을 하거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병사들이 포로가 되지 않으려고 목숨을 끊는 등 ‘고상한’ 자살 이야기가 많이 등장했다. 1998년에 정신의학자인 마사오 미야모토가 자살 증가와 우울증 사이에 큰 연관성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이것은 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마사오는 일본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 중 대부분은 우울증과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인의 특수성은 그들이 종종 집단을 위해 죽는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수치심 때문에 죽는다.”(277)
일본에서 우울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제약회사들이 사람들에게 우울증에 걸렸을 때 전문적인 도움을 구하라고 격려하는 ‘공익광고’로 제품을 홍보하면서였다. 광고는 우울증을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잘못 규정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최대한 넓은 범위의 불편함에 적용시킬 수 있도록’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우울증이 ‘마음의 감기’라는 표현은 크게 히트를 쳤다.
SSRI(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 :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 우울증 치료제로 쓰인다) 제조사들은 SSRI들의 과학적 타당성을 자신있게 공언하는 마케팅 메시지들을 제시한다. 세로토닌의 고갈이 우울증의 근본 원인이며 SSRI들이 뇌에 있는 ‘선천적’ 화학물질들의 ‘균형’을 회복시켜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서 우울증이 세로토닌 부족과 관계가 있다거나, SSRI들이 뇌에서 그 신경전달물질의 정상적 ‘균형’을 회복시켜준다는 과학적 합의는 전혀 없다. 50년대에 우울증이 세로토닌 결핍 때문이라는 생각을 처음 제기한 조지 애쉬크로프트도 70년 이전에 세로토닌과 우울증의 연관성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우울증 환자들에게서 낮은 수치의 세로토닌 또는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을 입증한 사례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 정신의학출판사의 《임상정신의학교과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금까지 추가적인 실험에서도 (세로토닌을 부분군으로 포함하는) 모노아민결핍 가설은 입증된 바가 없다.”(297~ 298)
SSRI들은 환자의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에 균형을 회복시켜주는 게 아니라, 화학작용을 폭넓게 변화시킨다. 그 변화가 가끔 우울증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세로토닌의 자연적인 균형을 회복시켜준다는 주장은 증거 없는 이론에 불과하다. 과학적 사실이라기보다 문화적으로 공유되는 이야기에 가깝다.
하지만 SSRI들이 뇌에서 자연적 화학물질들의 균형을 회복시켜준다는 이야기는,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이 마케팅 문구는 일본에서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SSRI 제약사들은 SSRI에 대한 부정적인 데이터는 알리지 않고, 유리한 데이터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확대해석했다. 또한 부작용은 감추었다. 팍실이라는 약의 실험 결과, 위약을 복용한 10대들보다 팍실을 복용한 10대들에게서 자살 시도를 포함한 심각한 위험, 우울증 악화, 정서적 불안정, 두통, 적대감 등의 부작용들이 네 배에서 다섯 배 높게 나타났음에도 부작용을 두통 하나뿐이라고 축소해서 보고했다. SSRI가 자살이라는 부작용을, 특히 10대나 나이 든 사람에게서 나타낼 수 있음은 유명하다. 미국에서는 항우울증 치료제가 자살을 일으켰다며 고소한 중년 여성이 승소해 300만 달러의 보상 판결을 받기도 했다(www.yna.co.kr/view/AKR20170421084900009).
우울증이 아니라 오히려 우울증 약이 자살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야기는 분명 우리들과 일상적으로 들을 수 있는 얘기들과는 대치되기 때문에 놀라울 수 있을 것이다. 우울증이 자살을 많이 일으킨다는 얘기 또한 실제 현실과는 차이가 있다. 예컨대 우울증은 여자들이 더 잘 걸리지만, 자살은 남자들이 더 많이 한다. 사회학의 고전이 된 에밀 뒤르케임의 『자살론』은 정신질환과 자살률 사이의 상관성을 실증적으로 부정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우울증이 자살률을 높인다는 생각은 많은 정신과 의사들로부터 유포되지만 SSRI 제약사가 자사 제품을 홍보하는 것의 신뢰도에 비해 특별히 더 나은 근거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자살했으니까 우울했겠지’라는 사고방식은 증명이 아닐뿐더러, 실제 현실의 사회 문제를 감추기 일쑤다. 예컨대 어떤 사회 문제가 우울증과 자살을 야기했다면, 자살의 원인은 우울증이 아니다. 자살 혹은 정신적 아픔을 표현하는 방식의 ‘병리화’는, 사회 문제의 해결이라는 올바른 방식 대신 약물 처방이라는 간편하고도 잘못된 길로 우리를 이끌곤 한다.
우울증 환자들이 자살 시도를 많이 한다는 건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우울증 환자가 자살한다는 건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하나의 ‘문화적 서사’이며, 그 서사는 우울증 환자들에게서 자기 고통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자살 시도를 하게끔 유도할 수 있다. 우울증 환자들의 추정된 자살 시도율은 높지만, 그에 비례해 자살률이 높지는 않다. 사실 지금은 정신의학 분야에서 상식이지만, 우울증 환자의 자살 시도는 비우울증 환자가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진지하게 죽음을 시도한 것이라기보다 ‘더 잘 살고 싶은 마음’ 혹은 고통을 표현하는 방식의 하나라는 건 널리 알려진 것이다. 물론 우울증 환자 앞에서 전혀 신중하지 않게, 자살 시도를 부정하는 말을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일 수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정신질환에 대해 치유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고려해야 될 점은, 우리가 쉽게 ‘어떤 정신질환자는 이러이러하게 행동할거야’라는 편견을 갖고 대하면 그것이 대단히 부정적인 방향의 피드백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서사는 그만큼 큰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성찰적으로 다가가야 한다. 약이 필요한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문제를 사회적 관계를 개선시키는 것에서 찾지 않고 ‘도구’에 의존한다면 해결책이 무망할 수 있다. 문제를 관계적으로 사유하고 ‘같이’ 치유하려고 다가가는 것, 그리고 문화적 서사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관점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정신질환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리고 치유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한 방식일 것이다.
2021년 5월 24일
청년정의당 정신건강위원회 운영위원 임정빈
청년정의당 정신건강위원회 운영위원 임정빈
※ 이 글은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2011, 에단 와터스)를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