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부르짖던 공정론의 민낯...한국의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의 최첨단
[장석준 칼럼]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결합으로 나아간 오랜 여정
지난번에 이 지면에서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유강은 옮김, 이매진, 2020)를 읽으며 떠오른 단상을 풀어보았다("60년 전에 지금의 "능력 독재"를 정확히 예언하다", <프레시안>, 2021. 1. 4). 영의 책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뚜렷한 지지 집단이 있음을 환기시킨다는 점이었는데, 이들은 "지식인-중간층"이라 불리는 게 가장 적당한 이들이다.
이번에는 이들 지식인-중간층이 자본주의 역사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역사적 과정을 엉성하게나마 소묘해보고 싶다. 영이 "소설" <능력주의>에서 전개하는 가상 역사 말고 그것과 비슷하면서 또 다른 실제 역사 말이다. 칼럼 한 편에서 한 대목으로 다루기에는 벅찬 주제인데도 이에 도전하는 이유는 단지 한국 사회가 도달한 현재 모습과 비교하기 위해서다.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결합으로 나아간 오랜 여정
지난 글에서 능력주의가 자본주의와 친화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부속물은 결코 아니며 처음부터 역사를 함께 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능력주의와 더 뿌리 깊이 얽힌 것은 국가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다양한 능력을 만인의 우열을 판가름하는 단일한 척도로 일원화하려는 열망을 처음 세상에 선보이고 이후 줄곧 이 열망의 대표자가 돼온 조직이 국가다. 이런 국가가 유럽에 비해 훨씬 일찍부터 정연하게 발전한 유라시아 대륙 반대쪽(동아시아)에서 근대적 능력주의의 조숙한 원형이 등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업자본주의가 시작될 때만 해도 자본과 능력주의 사이에서 이 정도로 친근한 관계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친근성의 기준이란 단지 세습에 반대해 능력을 내세운다는 것 이상이다. 더 나아가, 능력을 측정 가능한 무엇으로 만들고 그래서 모든 인간을 그 측정 결과에 따라 배열할 수 있어야 한다. 제1차 산업혁명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은 자본주의 현실이 아직 이를 강렬히 요구하지 않았고, 그럴 여력도 없었다.
근대 능력주의의 본격적인 역사는 제2차 산업혁명과 함께 열렸다. 새로운 산업혁명의 핵심은 전기를 주된 동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이에 따라 기계를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중화학공업 작업장이 당대 산업의 중심이 됐다. 생산 과정과 과학기술 지식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게 유기적으로 결합하자 당연히 이런 지식의 담당자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그러나 이보다 더 커다란 변화를 낳은 것은 제2차 산업혁명과 함께 기업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산업 혁신을 선도한 두 나라, 미국과 독일에서 흔히 "독점기업"이라 불리는 거대 기업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엄청난 생산력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으로까지 발전시켜 시장을 사실상 지배하는 만큼, 이런 지배의 대선배인 다른 조직을 닮아갔다. 다름 아닌 국가기구다. 국가기구를 모태 삼아 발전해온 관료제가 신흥 대기업들로 확산돼 기업 관료제가 대두했다. 그리고 이는 공학도에 대한 수요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기업 공무원의 수요를 늘렸다.
하지만 제2차 산업혁명이 시작된 19세기 말부터 곧바로 지식인-중간층이 자본주의의 미래를 결정할 핵심 변수로 등장한 것은 아니었고, 따라서 능력주의 역시 아직은 "주요"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미국, 독일에서 시작된 새로운 산업 구조가 무르익고 널리 퍼지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려서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지식인-중간층을 대량 배출할 사회적 기반이 갖춰지지 못한 데 있었다. 그러려면 미국에서 발전한 대중적 고등교육 체계가 다른 중심부 국가들에도 뿌리내려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결국 서유럽 여러 나라와 일본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하위 중산층과 노동계급 가족의 실질 소득이 상승하고 대학 등 고등교육기관의 수용 능력이 확대되면서 이들 계급-계층의 자녀 가운데 대졸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들 중 다수는 물론 대자본이 요구하는 기업 관료, 기술 관료로 진출했지만, 자본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이 집단(하위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대졸 1세대)이 체제에 어떤 충격을 낳을지는 아직 불분명했다. 영의 <능력주의>가 나온 게 바로 이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이 충격이 영의 예상과는 사뭇 다른 방향, 그러니까 자본주의에게는 가장 불길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듯 보였다. 1960년대에 자본주의 중심부 곳곳에서 대학 분규와 학생운동, 신좌파운동이 폭발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사자 가운데 단호히 민족해방전선 쪽에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각목이나 화염병을 들고 거리에 나선 이들의 이념이 지금도 모두 다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들을 능력주의의 주역으로 보기는 힘들었고 오히려 "대학 해체" 등의 주장을 통해 그 정반대 편에 섰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은 패배했다. 적어도 이때 이들이 대변하던 그 역사적 가능성은 철저히 패배했다. 1970년대에 자본주의가 발 빠르게 착수한 세 가지 자기혁신운동, 즉 지구화, 금융화, 정보화가 지식인-중간층의 대규모 등장을 1960년대 대학가에 잠재하던 가능성과는 전혀 다른 역사의 방향과 접합시켰다.
첫째, 지구화. 중심부 자본이 생산 설비를 해외로 옮기면서 생산직 일자리는 줄었다. 그러나 전 지구적 생산 사슬을 관리하는 초국적기업의 관료 체계가 확장되는 바람에 중심부 국가들의 전문직-관리직 일자리는 반대로 늘어났다. 20세기 후반부터 일상적으로 대량 배출된 지식인-중간층은 노동계급의 패배로 두텁던 중산층의 다른 부분이 와해되는 시대에도 이 사다리를 부여잡고 중산층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둘째, 금융화. 영의 <능력주의>에서 능력주의의 수혜자인 새로운 지배 계급은 지금 우리 현실에 견줘보면 차라리 청빈한 편이다. 그들은 그저 능력에 따른 급여 격차에 만족한다. 그들에게는 "재테크"의 세계가 없는 것이다. 주식 투자도, 부동산 투기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실현된 능력주의는 영이 상상한 능력주의보다 더 강력하고 반동적이다. 중심부 국가들에서 전문직-관리직 일자리를 획득한 지식인-중간층은 금융화에 가담해 거대한 불로소득자 집단을 형성했다. 더불어, 불로소득자의 세습주의("세습 중산층")와 기묘하게 결합된 우리 시대의 능력주의가 부상했다.
셋째, 정보화. 제3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모든 지식을 0과 1의 디지털 신호로 환원하고 융합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는 오늘날의 능력주의에까지 이르게 된, 고대 국가 이래의 유구한 열망에 전에 없던 날개를 달아줬다. 만인의 능력을 지능이라는 단일한 기준에 따라 판정하고 이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배열하려는 열망 말이다.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노동이 맡던 역할을 완전히 자동화하려는 기획("제4차 산업혁명"이라 잘못 명명된)은 이런 열망을 완성하려는 시도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기획이 자본주의 구조 아래에서 실현된다면 오직 지식인-중간층만이 "1% 지배자들"과 함께 "능동 시민"의 범주에 들리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렇게 지구화, 금융화, 정보화가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역사적 결합에 기여한 것만큼이나 중요한 또 다른 요인이 있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패배다. 지식인-중간층이 성장하고 능력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부상하던 바로 그 시기에 그간 대안 세력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항 세력으로는 상당한 역량을 과시했던 중심부 국가들의 노동계급이 돌이킬 수 없이 패퇴하고 해체됐다. 이는 단지 비극적인 대비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둘 사이에 어쩌면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위에서도 얼핏 이야기했지만, 능력주의란 단순히 다른 가치에 비해 능력이 중시된다고 하여 대두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만인을 "단일한" 능력 관념과 기준에 따라 재단하려 할 때에 능력주의가 부상하고 힘을 얻는다. 반대로 말하면, 능력의 다원론이 무너지지 않은 사회에서는 능력주의가 지배할 수 없다. 능력주의의 필수 구성요소가 능력의 일원론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말까지 중심부 자본주의, 특히 서유럽에서는 노동계급이야말로 이러한 능력의 다원론을 지탱하는 주역이었다. 자본가, 관리자, 정치인, 대학 교수가 뭐라 떠들든 노동자는 늘 그들 나름대로 할 말이 있었고, 그들이 믿는 제대로 된 삶이 따로 있었다. 그들이 버티고 있을 때에 자본주의 사회는 능력의 일원론을 실현시킬 수 없었다.
반면에 지식인-중간층은 능력의 일원론의 신실한 신자가 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한때 노동계급에 뿌리를 둔 지식인-중간층의 대규모 등장은 "지식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이름으로 일부 좌파의 환영을 받은 바 있다. 이들의 부상이 자본주의에 맞서는 노동계급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데 새롭고 결정적인 자원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결과는 정반대다. 지식인-중간층은 자본주의가 계급투쟁에 선수 치며 선택한 방향, 즉 지구화, 금융화, 정보화에 편승하고 여기에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자원을 더해주면서, 오히려 위로부터의 진지전, 즉 수동혁명의 강력한 토대가 됐다. 이들을 통해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역사적 결합이 완성되려 하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능력주의 결합의 최첨단?
이런 자본주의 역사의 전반적 흐름과 비교해보면, 한국 사회가 처한 상황을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우선 한국은 근대 능력주의의 조숙한 원형이 등장하고 오랫동안 지속된 동아시아의 두세 나라 가운데 하나다. 이 기억은 지금도 대학 입시나 대기업 입사 시험, 공무원 시험 등을 현대판 과거제도로 여기는 관성으로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양반신분제가 과거제도와 결합됐던 경험 역시 세습주의와 능력주의의 역설적인 결합이 재연될만한 예외적인 토양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전에 이미 이렇게 오랜 능력주의의 역사가 있더라도 이것이 자본주의 현실과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면, 아무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남한은 처음부터 제2차 산업혁명이 도달한 결론을 학습하고 재연하는 방식으로 산업화를 추진했다. 국가가 주도해 포항제철을 만들고, 재벌 독점기업들을 키워 중화학공업에 진출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국가 관료기구와 기업 관료기구를 채울 인력이 대규모로 필요했다. 이는 먼저 산업화한 나라들과 달리 지식인-중간층과 노동계급이 동시에 성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이런 지식인-중간층 수요를 충족시킬 사회적 기반도 급하게 마련해놓은 상태였다. 대학이 빠르게 성장했고, 이를 통해 자격 증서를 획득하려는 젊은이들의 숫자도 충분했다. 농지 개혁의 혜택을 입은 농민층은 마치 전후 복지국가의 노동계급 가족처럼 적어도 집안에 한 명은 대학에 보낼 여력을 확보했다.
이렇게 하여 20세기 말에 한국에서는 어느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지식인-중간층 집단이 성장했고, 그만큼 능력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될 만한 토대 역시 강력히 구축됐다. 영이 <능력주의>에서 제시한 IQ 테스트보다 훨씬 더 세련된 현대판 과거시험들을 통해 경제사회적 위치를 나누며 부와 권력을 배분하는 체계가 완성되어갔다. 그리고 한국의 지식인-중간층 역시 민주화 이후에 동시대 자본주의의 거대한 흐름, 즉 지구화, 금융화, 정보화에 올라타며 전 지구적인 지식인-중간층 대열에 합류했다.
이 과정을 살펴보며 우리가 시야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은 서구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서도 이것과 노동계급 형성(혹은 탈-형성) 사이에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한국의 노동계급은 자본주의가 이미 고도화 단계에 접어들던 1980년대 말에야 사회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몇 년간을 돌아보면, 한국 사회에서도 노동계급의 독자적인 문화가 발전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 속도는 지식인-중간층 헤게모니가 확산되는 속도에 종내 미치지 못했다. 더구나 뒤늦게 타올랐던 노동운동조차 1997년 외환위기의 일격으로 기세가 꺾여 버렸다.
그렇다. 지식인-중간층 헤게모니가 유례없이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절반쯤은 노동계급 쪽의 도전이 실패한 탓이었다. 지구자본주의의 오래 된 중심부에서 세기 전환기에 벌어진 것과 비슷한 상호작용이다. 다만 커다란 차이가 하나 있다. 오래 된 중심부에서는 한때 성장했던 노동계급 문화가 해체됐지만, 이 나라에서는 그런 문화가 채 등장도 하지 못하고 압살됐다. 현재는 똑같이 그런 문화가 부재하지만, 적어도 한 쪽에는 기억 정도는 살아 있다.
이런 비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잠정 결론은 능력주의 문제에서 한국은 (아마도 중국과 함께) 지구자본주의의 최첨단에 서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유독 능력주의가 심각하다면, 이는 과거제도의 기억 같은 전자본주의 유산이 너무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그런 기억은 강렬하다. 그러나 이는 다름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가 밟은 독특한 궤적 때문에 살아남아 재활용되고 번성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다른 사회가 100여 년은 훨씬 넘는 여정 끝에 도달한 결론, 즉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결합을 불과 한, 두 세대만에 그것도 가장 순도 높은 형태로 달성했다.
영미 자본주의보다 더 앞서간, 자본주의적 능력주의의 이상형이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더 투명한 능력 검정을 요구하는 이른바 "공정"론이 세습-능력주의 결합체를 더욱 강화하는 자기 모순적 주장이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시험제도나 고등교육 체계에 대한 개혁론이 그것만으로는 무력한 제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진짜 과제는 우리도 모르는 새 도달하고 만 자본주의의 가장 첨단의 형태에 어떻게 도전할 것인가이다.
그러려면 답해야 할 근본적 물음이 여전히 많다. 노동계급 문화가 부재할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부재했던 사회에서 능력의 다원론은 어떻게 복구될 수 있는가? 지금이라도 우리는 21세기에 맞는 그런 대항 세력을 형성할 수 있는가? 나는 감히 능력주의 극복의 가능성이 온전히 이 물음들에 대한 답변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다음 글에서는 부족하나마 이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12017074039223&utm_source=naver&utm_medium=mynews#0DKU 프레시안(www.press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