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현지에서 보내는 칼럼] 내 편만 있는 광장 (1)
남아공 총선과 한국 정치
장 영 욱 (남아공 스텔레보쉬대학 연구원)
영국 런던정경대(LSE) 경제사학 박사
날이 갈수록 강도를 더해가는 자유한국당의 망언을 놓고 정의당 윤소하 원내대표는 이렇게 일갈한다.
“내 편만 있는 광장에 오래 서다보면 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렇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견제와 균형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 완벽해질 수 없고, 따라서 견제 없는 독주는 언젠가 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진다. 윤 원내대표가 지적한대로 박근혜 정권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동일한 예를 세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필자가 살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이하 남아공) 역시 마찬가지이다. 남아공에서는 지난 5월 8일 국회의원 총선거가 치러졌다. 다수당의 당수가 대통령이 되기 때문에 이번 총선은 대통령 선거나 마찬가지였다. 남반구에 있는 아프리카 국가가 우리와 무슨 상관인지 묻는다면, 남아공 정치 상황이 우리나라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배경: 전 대통령 퇴진 후 첫 선거
우리나라에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지난 2016년 말, 남아공에서도 대통령 퇴진 시위가 일어났다. 배임, 횡령, 직권남용에 재임 전 강간 혐의까지 겹쳐 탄핵 압박을 받던 제이콥 주마 전 대통령은 작년 2월 임기를 1년 3개월 남겨두고 스스로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다. 탄핵 시위를 촉발한 결정적인 위기가 비선실세 굽타 가문의 국정농단이라는 것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다.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 있다면 대통령 퇴진 후 같은 당 아프리카민족회의 (African National Congress, 이하 ANC)의 시릴 라마포사가 대통령직을 물려 받았다는 것이다. 라마포사는 전해 12월 ANC의 전당대회에서, 주마 전 대통령의 비호 아래 선거를 치룬 그의 전부인 들라미니-주마 여사를 제치고 당대표가 되어 있었다. 입지가 좁아진 주마가 결국 사임한 이후, 국회에서 대통령 간접선거가 열리고 라마포사가 당선된다. ANC가 당시 국회 의석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흥미롭게도 주마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을 남아공에서는 흔히 "잃어버린 9년"이라고 부른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다). 1994년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된 이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발전을 해오던 남아공은, 2009년 주마의 당선 이후 다시 내리막길을 걸었다. 주마 재임 말기 실업률은 27% (청년실업률 50%)에 육박하고, 저소득층 교육수준은 후퇴했으며, 전기 등 기본적인 인프라도 제대로 공급을 못하는 수준이 되었다 (실제로 필자가 남아공에 온 지 두 달 만에 전기 끊긴 날이 십 수번도 더 되었다). 21세기 자본론의 저자이자 불평등 연구로 유명한 토마 피케티는 한 강연에서 2017년 현재 남아공의 불평등지수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보다 더 나빠졌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총선을 앞둔 각종 여론조사에서 ANC가 여전히 굳건한 1위를 지켰고, 라마포사 대통령도 무난히 대통령직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ANC는 인권운동가이자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를 배출해낸 정당이며 남아공인구의 약 80%를 차지하는 흑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왔다. ANC에는 극좌 사회주의자부터 온건 자유주의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정치인들이 반 (백인)기득권이라는 기치 아래 함께 모여 있어서, 당대표에 따라 정책 색깔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게 특이한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마포사 대통령은 같은 당임에도 불구하고 줄곧 전임 주마와 대척점에 서있었고, 그의 개혁적이고 온건한 이미지가 부패스캔들 속에서도 지지자들의 마음을 여전히 ANC에 머무르게 한다고 볼 수 있다.
남아공의 제1야당은 민주연합 (Democratic Alliance, 이하 DA)인데, 주로 백인과 컬러드 (비흑인 유색인종을 부르는 통칭)들이 주축이 된 보수주의 정당이다. ANC에 비하면 부패나 연고주의로부터 훨씬 자유롭다고 할 수 있고, 각종 지방정부 평가 지표 상 가장 좋은 점수를 받은 지역들은 대부분 DA 소속 단체장이 이끄는 곳이었다. 하지만 백인 정당이라는 이유로 지지율은 약 20% 내외에 불과했다.
라마포사 대통령
총선 결과: ANC의 건재, 포퓰리스트의 약진
총선 결과 예상대로 ANC가 과반 이상의 득표를 하며 단독 집권에 성공했으나, 득표율은 57.5%로 지난 2014년 총선에 비해 5% 가량 하락한 수치를 보였다. 전 대통령의 부패스캔들을 생각하면 5% 하락 정도는 선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권자의 지지가 제1야당 DA로 옮겨 간 것은 아니다. DA의 득표율은 20.8%로 예년에 비해 오히려 1.5% 정도 낮아졌다.
ANC에 실망하고 백인정당에 표를 줄 수 없는 남아공 흑인들은 대략 두가지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예 투표장에 안 가거나 (투표율 73%->66%로 하락), 또다른 흑인정당 경제해방투사(Economic Freedom Fighters, 이하 EFF)에 투표하거나 (EFF 득표율 6.4%->10.8%). EFF는 극좌 포퓰리스트 정당으로, 백인들의 땅을 강제수용해 흑인들에게 재분배하겠다는 공약이 대표적이다. 또한 DA에서 이탈한 일부 백인표는 극우정당 자유전선+ (Freedom Front Plus, 이하 FFP) 로 간 것으로 보이는데 (FFP 득표율 0.9%->2.4%), EFF의 약진과 더불어 기존 정치권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좌우 가리지 않고 포퓰리스트 정당을 지지하는 전세계적 트렌드가 남아공에도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어찌됐든 ANC가 여전히 과반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게 되면서 현 대통령 라마포사가 향후 5년간 대통령직을 유지하게 되었다. 1994년 넬슨 만델라가 당선된 이래 ANC의 집권이 30년간 계속되게 된 것이다. 전임 대통령이 나라를 망쳐놓고 떠났는데도 ANC가 여전히 건재한 것을 보면, 94년 이전 국민당 집권의 트라우마가 그만큼 강력하거나 여당에 대항할 야당이 그만큼 빈약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라마포사 대통령의 개혁의지도 ANC의 붕괴를 막는 버팀목 중 하나인데, 앞으로 얼마나 바뀔지는 두고 볼 일이다.
내편만 있는 광장에서 나오는 법: 선거제 개편
남아공 정치상황을 우리나라에 바로 적용하기는 어렵겠지만, 몇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는 있다. 제이콥 주마가 범국민적 퇴진 운동 끝에 사임했어도 사실 ANC와 새누리당에 비교하는데엔 무리가 있다. ANC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맞서 흑인인권 운동, 민주주의 운동에 헌신한 정당이며 넬슨 만델라를 비롯한 기라성 같은 지도자들을 배출해냈다. 민족주의에 기대어 있으며 온건 진보와 온건 보수를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우리나라의 민주당과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남아공 정당 중에 굳이 현 자한당의 비교 대상을 찾자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주역 국민당 (National Party)을 꼽을 수 있겠다 (국민당에 대한 설명은 다음 칼럼에서).
ANC를 대체할 마땅한 정치세력이 없다는 점 역시 민주당과 비슷한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제1야당 DA는 역사적 이유로 인구 절대다수인 흑인들의 지지를 받기 어렵고, 극좌 혹은 극우 정당 역시 확장성에 문제가 있다. 각종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25년 이상 유지하는 이유로 대안세력의 부재를 들 수 있다.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면 민주당 역시 마땅한 경쟁상대가 없다. 자한당은 극우 지지세력만 타겟으로 삼는 폐쇄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으며, 안타깝지만 진보세력이 주류가 되기엔 우리 사회의 토양이 여전히 척박하다.
물론 ANC와 민주당이 완전히 유사하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흑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과반을 넘은 ANC와 달리, 보수 지지세력 결집과 다당제로의 전환 때문에 민주당의 지지율은 40%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이 가까운 시일에 제1당의 지위에서 내려올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몇몇 눈에 띄는 리더들 덕분에 대선에선 민주당이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고, 이로 인해 당분간은 정권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문제는, 견제와 균형 없이 계속해서 건강한 제도를 세워간 예는 역사상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세계 민주주의의 표본이 된 넬슨 만델라와 그의 정당 ANC가 20년 간 독주한 끝에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 된 것도 견제와 균형의 미비가 가져온 비극이라 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민주당에 대한 견제세력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지난 정권에서 일어났던 헌정 사상 최악의 국정 유린이 현 여당에서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다수당의 독주를 막을 가장 현실적인 제도적 대안은 비례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선거제를 개편하는 것이다. 여당에 대한 효과적인 견제의 목소리는 정의당을 위시한 소수정당 들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고, 비례제를 통해 소수정당의 원내진출이 활발해지면 정당간 균형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제한적이나마 비례대표 의석을 늘리는 선거제 개편에 여야가 합의한 것은 우리 민주주의를 위해 바람직한 선택이라 평가할 수 있다. 동기가 어찌됐든 다수당 입장에서 비례제를 확대하는데 동의한 것은 어느정도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제스처인데, 남아공의 예에 빗대보면 이 선택이 민주당을 위해서도 결코 실이 되진 않을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어떻게든 밥그릇을 지켜보겠다고 발목을 잡는 제1야당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칼럼에서 다루기로 하고 이번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