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청년 남성들의 '보수화'가 아니라 '객체화'이다
이재랑
(정의정책연구소 청년위원)
20대 남성들의 보수화가 화제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20대 남성의 지지율이 급감했다는 통계가 발표된 이후다. 이 지지율(29.4%)은 심지어 사회적으로 가장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 60대 남성의 지지율(34.9%)보다 낮은 것이었다(2018.12.10~14. 전국 19살 이상 유권자 2509명 대상 조사 결과). 이를 둘러싸고 수많은 논평이 따라붙는다. 사회에 첨예한 젠더갈등의 결과라는 반응, '대체복무제'를 둘러싼 남성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반응 등 저조한 지지율의 요인을 분석하는 말들이 많고, 한 명의 20대 남성으로서 주변을 돌아보자면 청년들 스스로의 생각도 그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물론 이들은 문재인 정부 출범의 주역이었다. 탄핵 이후 문재인 대통령 당선이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해도 뒤이어 추격해오는 보수 후보들을 따돌리며 높은 지지율로 문재인 대통령을 만들어낸 데에는 분명 20대 남성들의 몫이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이야기 되고 있는 저조한 지지율의 충격이 더욱 크게 느껴질 것이다. 사실 여기에 시사점이 있다. 청년들 스스로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할 때,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높았다. 청년들의 의지가 정치에 반영되지 않고 그들이 배출한 대통령이 그들을 버렸다고 생각할 때,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낮아진다. 결국 문제는 이들을 정치적 주체로 만들어내는 민주주의로 돌아온다.
20대 남성들은 사회적 패배자들이다. 학교에선 여성들에게 성적으로 뒤쳐지고, 가장 소중한 젊음은 군대에서 박탈당하며, 일자리는 이미 '꼰대들'에게 다 빼앗겨버렸다. 특히 군대는 20대 남성들에게 열패감을 제공하는 핵심적 요인이다. 위수 지역 밖으로 군인들의 외출, 외박을 허가할 수 있다는 말에 지역 상권 다 망한다며 반발하는 모습이나 군인에게 흰 우유가 아닌 다른 우유를 배급한다고 했을 때 낙농업계의 부정적 반응이 바로 그 열패감을 다 설명한다. 군대 뿐 아니라 이 사회 전체가 군인을 인간이 아닌 소모품으로 여긴다. 20대 남성들은 대부분 군대를 갔다 왔거나 또 가야한다는 점에서, 또 군복무 문제를 어떤 식으로 해소할 것인지가 생에 너무나 큰 변수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병사에 대한 처우의 문제는 이들에게 당사자 문제가 된다. 군대를 제대한 남성들은 사회가 나를 소모품으로 여긴다는 열패감을 깊숙이 체화한 채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자신은 분명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페미니즘'은 자신을 가해자로 대우한다. 마치 후퇴한 여성 인권이 자신들의 책임인 양 돌린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이 겪어야 했던 삶의 족적은 불쌍하지만, 그런 사회를 만들어낸 기성세대 남성들은 정작 우리가 당하고 있을 때 어디론가 숨어서 아무 말 않는다. 이러한 '젠더 갈등'을 기회로 20대 남성들의 분노는 폭발한다. 이에 대해 정치인들의 반응은 젠더 문제에 집중하지 말고 청년 복지에 신경 써야 한다거나(정혜연 정의당 부대표), 워마드를 다 때려잡겠다는 식(바른미래당 하태경, 이준석)이다. 그것들이 무의미하진 않겠으나, 본질은 후려치고 현상에만 매몰된다는 점에서 좋은 정치의 언어라고는 보기 어렵다.
문제는 이들이 정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라는 점이다. 문화평론가 최태섭은 그의 저서 <한국, 남자>에서 한국 남성은 "사회적으로는 폭력과 억압의 주체이고, 내적으로는 실패와 좌절에 파묻혀 있다"며 사회적 존재로서 '한국 남자'들이 갖는 이중적인 곤란함을 이야기 한다. 사회에서 이들에게 허락된 지위의 최대치는 돈 쓰는 '소비자'에 불과하므로, 이들은 소비자로 격하된 자신의 실패와 좌절을 여성이라는 '상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해소하려고 한다. “취업하면” 혹은 “자동차 이 정도 있으면 ‘보픈’ 가능?(여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단어와 ‘오픈’의 합성어·여성과 섹스가 가능하냐는 의미)”이라는 글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버젓이 올라오지만 그것이 바로 여성 차별이고 성적 대상화임을 인지하는 남성들은 많지 않다. 인간을 매매하는 상품 정도로 여기는 논리가 그들이 사회적으로 받은 대접의 전부이므로, 여성을 그리 대하는 것 역시 어색하지 않다. 그들은 이 매매의 논리를 비판하는 대신, 자신과 비슷한 가격의 상품이면서 자신에게는 서비스(성)를 제공하지 않는 여성들을 ‘김치녀’, ‘된장녀’라고 욕할 뿐이다.
여성들은 '페미니즘'의 언어로 이 사회의 주인으로서 연대하고 있으나, 20대 남성들은 더더욱 게토화되고 있다. 이런 20대 남성들의 열패감을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들을 조롱하는 데서 그치지 않기 위함이다. 여성들에 대한 차별적 조롱이 여성들을 단결시켰듯, 자신들도 피해자임을 역설하는 남성들의 아픔을 조롱으로만 맞이한다면 반동적 집단으로서 남성의 단결을 독촉하는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이 트럼프에게 투표한 건 그가 삶을 나아지게 만들 거라 믿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인종주의자라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펀치를 날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보다 무엇을 증오하는가에 따라 투표한다.” 여성을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는 남성들이 단결하는 순간, 그것은 우리 사회 전체의 불행이 된다.
그러므로 종국에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 사회를 진보시키는 '주인'으로서 20대 남성을 세우는 일이다. 소비자는 불매하지만, 주인은 지붕을 고친다. 소비자는 페미니즘을 불매하지만, 주인은 페미니즘을 고민한다. 소비자는 정치를 불매하지만, 주인은 정치를 통해 사회를 수리한다. 물론 선행해야 할 것은 남성들 역시 가해자로서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인식하고 반성하는 일이다. 그러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들을 사회의 '주인'으로서 대우하는 사회적 인식과 제도의 개선이다. 칸트의 말처럼 "먼저 자유를 누리지 않고서는 자유를 누릴 만큼의 성숙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젠더 문제를 단지 회피하는 것도, 워마드를 폐쇄하겠다는 식의 언어도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정치의 본령에 닿지 못한다. 우리가 이 사회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어려운 길은 이야기 하지 않고 표면적인 갈등만 재생산하는 정치적 언어는 그 자체로 이미 비겁하다.
현재의 청년들은 한때 '촛불 세대'로서, '안녕들 하십니까' 운동의 주체로서, 탄핵과 촛불 대통령 탄생의 주역으로서 이 사회를 움직이는 주인이었다. 그리고 이 땅의 정치는 그런 청년들에게 '너희들에게 허락된 자리는 없다'는 깊은 절망감만 선사하였다. 이 땅의 민주주의가 청년들을 주인으로 호명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 역시 언젠가 불매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청년 정치'의 복원이다.
청년 정치의 복원은 종종 청년 정치인의 등장과 동일시되어, 한 때 오디션 프로그램 식으로 청년 비례대표를 선발하는 일이 정당마다 빈번했다. 그러나 이는 그 과정조차 기성세대들에게 '간택'받아야 된다는 점에서 지극히 반정치적일 뿐더러, 그렇게 뽑힌 청년 비례대표들조차 나중엔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회귀하게 되어 청년 정치 세력을 재생산하는 데에는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제도 정치가 청년 정치 세력을 떠받치지 못한 한계가 드러난 셈이다. 차라리 '청년 할당제'와 같은 기획을 통해 청년 정치 세력이 정당과 제도 내에서 주인이 될 수 있음을 경험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청년이라는 이유만으로 특권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 역시 이 정치의 주인임을 또 국민의 대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의지의 반영이다.
물론 이는 비단 청년에게만 주어져야 하는 권리가 아니다. 이를 통해 여성, 성소수자, 소수 민족 등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나름대로 정치의 주인으로 활동하는 '비례성 강화'로 이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국민의 대표라고 하는 국회의원들의 구성이 국민의 구성과 비슷해지는 모습으로 변할 때, 국민들 역시 우리의 대표로 기능하고 있는 국회에 대한 신뢰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조차 받지 못해 지역구 의석수를 53석이나 줄여야한다는 현실성 없는 선거제도 개혁 방안을 내밀은 '더불어민주당'과 그건 협상용 카드에 불과하다며 상대를 비난하지만 아예 선거제 개혁 방안조차 말하지 않는 '자유한국당'의 모습이다. 그 둘을 모두 비난하면서도 자당의 청소년 당원조차 당의 주인으로 일떠세우지 못하는 제도권 내의 진보 정당의 모습이다. 청년들의 이해가 반영되지 않는 당파적 이익만이 우리가 마주하는 정치적 셈의 전부이다. 정치가 청년을 외면하는 동안, 연대의 언어를 찾지 못한 20대 남성들의 열패감은 층층이 쌓여가고만 있다. 이들의 열패감이 마침내 몇 남지 않은 ‘공화국 정신’마저 불매하게 된다면, 이 땅엔 야만과 다름없는 적자생존의 논리만이 횡행하게 될 것이다. 청년 남성들의 '보수화'는 주인 되지 못한 자들이 현존하는 정치에 보내고 있는 마지막 경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