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이정미 대표·심상정 前대표·김호규 금속노동자, 故 노회찬 원내대표 국회장 영결식 조사
일시: 2018년 7월 27일 오전 10시
장소: 국회의사당 정현관 앞
■ 이정미 대표
사랑하는 대표님!
수만의 시민들이 전국 곳곳에서 대표님을 추모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초등학생부터 구순 어르신까지. 막 일을 마치고 땀자국이 선연한 티셔츠를 입고 온 일용직 노동자부터 검은 정장을 정중히 입은 기업 대표까지.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많은 분들이 오셔서 원내대표님의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 했습니다.
나이도 성별도 하는 일도 다르지만 이 분들이 저의 손을 잡고 울먹이며 하시는 말씀은 모두 같습니다.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꼭 필요한 사람’. 이보다 노회찬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노회찬 원내대표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단체가 추모 성명을 냈습니다. 그들은 해고 노동자이고, 산재로 자식을 잃은 어미이자 아비였으며,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였습니다. 노회찬이 우리 정치에 없었다면 간절한 외침을 전할 길이 없었던 약자들이 노회찬의 죽음에 누구보다 슬퍼하고 있습니다.
노회찬의 정치 이력은 바로 이들을 대변하고, 이들의 삶을 바꾸는 길이었습니다. 대학생 노회찬은 노동 해방을 위해 용접공이 되어 인천으로 향했고, 일하는 사람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을 만들기 위해,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하기 힘든 진보정치 단체들을 두루 이끌며 청춘을 바쳤습니다. 진보정당 탄생 후에는 그 성공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 그가 만들고 키워 온 정의당을 위해 그의 삶을 통째로 바쳤습니다.
그래서 노회찬을 잃은 것은 그저 정치인 한명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약자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민주주의의 가능성 하나를 상실했습니다. 노회찬, 당신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인은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2013년 2월 14일 삼성 X파일 대법원 선고로 의원직을 상실한 날, 억장이 무너진 당직자들에게 당신이 처음 했던 말이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였습니다. 분노의 눈물을 삼킨 동료들에게 오히려 웃음과 유머를 보였습니다. 당신은 하늘이 주신 이 재능으로 시민들에게 정치의 통쾌함과 즐거움을 안겼습니다. 그 유쾌함은, 위기와 역경을 낙관으로 이겨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내면의 단단함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노회찬은 불같은 분노와 강직함을 함께 갖고 있었습니다. 2013년 의원직 상실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삼성 X파일을 공개 하겠다”고 말하는 지독한 고집쟁이였습니다. 마지막 유품인 10년이 넘은 양복 두벌과 낡디 낡은 구두 한 켤레에서, 스스로에게 엄격했지만 너무도 소박했던 노회찬을 봅니다. 우리 정치를 이상적이고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노회찬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국민들은 이런 노회찬을 보며 저기 국회에도 자기 편이 한명 쯤은 있다고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한결 같은 노회찬을 보며, 많은 정치인들은 정당과 정견은 다르더라도 그를 존중했습니다.
이처럼 소중한 노회찬이, 무겁고 무거운 양심의 무게에 힘겨워 할 때 저는 그 짐을 함께 나눠지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오직 진보정치의 승리만을 염원하며 스스로가 디딤돌이 되겠다는 선택을 할 때도 그 곁에 있어주지 못했습니다. 당원들과 국민들께 너무나 죄송합니다.
정의당은 약속드립니다. 조문 기간 백발이 성성한 어른께서 저의 손을 잡고 “정의당 안에서 노회찬을 반드시 부활시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저와 정의당은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노회찬의 정신은 정의당의 정신이 될 것이며, 노회찬의 간절한 꿈이었던 진보집권의 꿈은 이제 정의당의 꿈이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문희상 의장님과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노회찬 대표의 2012년 정의당 창당대회 연설을 기억합니다. 노 대표는 투명인간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매일 새벽 4시 서울 구로구에서 6411버스를 타고 강남의 빌딩으로 출근하는 여성노동자들은 진보정당에서조차 투명인간이었다고, 그는 반성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들이 냄새 맡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으로, 이 당을 함께 가져가자”고 했습니다.
노회찬의 이 다짐이 정의당만의 다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국 정치가 너나 없이 투명 인간으로 취급해 온 일하는 사람들, 소수자들, 약자들을 향해 이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정치개혁과 시민의 삶을 바꾸는 개혁에 나서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여기서 멈추겠다.”고 했던 노회찬은 결코 멈추지 않고 우리와 함께 “당당히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 정치 변화의 상징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벗, 존경하는 나의 선배 노회찬 이시여. 부디 영면하십시오. 먼 훗날 다시 만나면, 수많은 노회찬의 부활로 진보정치의 큰 꿈을 이루고 이 나라가 평등 평화의 새로운 대한민국이 됐다고 기쁘게 이야기 나눌 것입니다.
■ 심상정 前대표
노회찬 대표님!
나의 동지, 사랑하는 동지, 영원한 동지여!
지금 제가 왜? 왜?
대표님께 조사를 올려야 한단 말입니까?
저는 싫습니다.
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뒤로 숨고만 싶습니다.
생각할수록 자책감에 서러움이 밀려옵니다.
쉬운 길 놔두고 풍찬노숙의 길을 자임한 우리들이었기에,
수많은 고뇌와 상처들을 기꺼이 감당해왔던 믿음직한 당신이었기에,
우리 사이의 침묵은 이심전심이고 믿음이며 위로였기에,
지금껏 그래왔듯 그저 침묵으로 기도하면 될 줄 알았습니다.
저의 아둔함에 가슴을 칩니다.
칠흑 같은 고독 속에 수 없는 번민의 밤을 지새웠을 당신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노회찬 동지여!
돌아보니 우리가 함께 한 세월이 30년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인천에서, 저는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가로 알게 되어
이후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그리고 정의당에 이르기까지
노회찬, 심상정은 늘 진보정치의 험준한 능선을 걸어 왔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패배로 점철되었던 진보정치의 역사에서
함께 좌절하고, 함께 일어섰습니다.
그 간난신고의 길,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던 시간이었습니다.
당신이 열어주셨기에 함께할 수 있었고
당신과 함께였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역사와 국민의 부름 앞에서
주저 없이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의 뜻을 국민들께서도 널리 공감해주시기 시작한 이 때,
이렇게 황망하게 홀로 떠나시니 원통합니다.
당신 없이 그 많은 숙제를 어찌 감당해야 합니까?
그러나 이제 슬픔을 접으려 합니다.
당신을 잃은 오늘, 우리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깨끗하고 정의로운 정치를 위해 당신이 감당했던 천근만근 책임감을
온몸으로 받아 안을 것입니다.
저와 정의당이 그 유지를 가슴깊이 아로새기겠습니다.
당신이 목숨보다 아꼈던 진보정치,
정의당은 더 강해지겠습니다.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아름답고 품격 있는 정당으로 발돋움 하여
국민의 더 큰 사랑 받겠습니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노회찬 없는 진보정당, 상상할 수 없습니다.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노회찬과 함께 할 것입니다.
당신이 끝끝내 지켜내고자 했던 진보정치의 꿈, 정의로운 복지국가,
저와 정의당 당원들이 함께 기필코 이뤄낼 것입니다.
사랑하는 노회찬 동지여! 나의 동지여!
마지막으로 생전에 드리지 못한 말을 전합니다.
노회찬이 있었기에 심상정이 있었습니다.
가장 든든한 선배이자 버팀목이었습니다.
늘 지켜보고 계실 것이기에 ‘보고싶다’는 말은 아끼겠습니다.
대신 더 단단해지겠습니다.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2011년 대한문 앞에서 함께 단식농성하며 약속했던 그 말,
‘함께 진보정치의 끝을 보자’던 그 약속, 꼭 지켜낼 것입니다.
정의당이 노회찬과 함께 기필코 세상을 바꿔낼 것입니다.
노회찬 대표님,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편히 쉬소서.
국민들과 함께 소탈하고 아름다운 정치인
노회찬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
■ 김호규 금속노동자
노회찬 선배께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너무나도 소박한 요구를 밤새 가르방으로 긁어 유인물로 만들고 새벽찬 어둠을 뚫고 잰걸음으로 인천, 부천지역 공단 주변 집집마다 돌리고 먼 길을 돌아 출근했던 노동자 생활이 떠오릅니다.
서로 얼굴도 모른 채 가명으로 활동한 1986년 늦가을이 생각납니다.
벅찬 가슴안고 뚜벅뚜벅 걸었던 노동자의 길을 기억 합니다.
그 길에서 만난 노회찬 선배.
30년이 지난 오늘 영원한 안식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제가 부족했습니다.
노동운동의 노선과 조직이름이 바뀌어도, 함께했던 선배였기에,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산별노조 양날개론을 증명해보고자 실천한 선배였기에,
온갖 시련과 갈등이 혼재된 진보정당운동에서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우뚝 선 선배였기에,
그저 믿었습니다.
저희가 안일했습니다.
예전 조직활동을 했던 때처럼 분명하게 비판하고 조직적으로 결정했다면 이렇게 허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필요할 때만 전화했던 이기심이 부끄럽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선배의 고민을 함께하지 못했던 얄팍함을 반성합니다.
그래도 노동자 민중의 정치를 위해 희망을 만들었던 선배를 존경합니다.
푸근한 호빵맨으로, 적절한 비유로 비판의 경지를 한 단계 높여 대중적인 진보정치의 새로운 길을 열어낸 선배의 열정을 사랑합니다.
낮은 울림이 큰 첼로를 연주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온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 할 수 있는 나라를 꿈꿨던 선배의 감성을 배우겠습니다.
1986년 부천에서 노동자의 길을 시작한 저에게 지난 30여 년 동안 선배와의 인연은 일선의 현장활동가로서 가까웠지만 사안에 따라 다소 멀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울산에서의 다양한 활동에 대한 선배의 지도는 늘 좋았고 명쾌했습니다. 갈등했던 기억은 잠시 뒤로 미루고, 울산 바닷가에서 의기투합했던 도원결의는 간직하겠습니다.
선배를 보내는 이 자리는 회한과 슬픔이 앞서지만 넋 놓지 않고 다시 한 번, 진보정당운동과 노동운동의 후배로서 선배의 유지를 받아안고 산 자의 결기로 나아가겠습니다. 더 이상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선배를 통해 체득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활동하는 동안 놓치지 않고, 노동자의 길로 나아가는 발걸음마다 나지막이 퍼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장례기간 동안 선배를 추모하는 긴 추모행렬을 보았고, 다양한 국민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노동자의 길을 걸었던 노동운동가에서 진정한 정치인으로 우뚝 선 선배이기에 영원한 안식의 공간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가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광화문 정동길 금속노조 사무실 옥상에서 선배를 기억하며 서성이는데 붉은 고추잠자리가 제 주위를 맴도네요.
추억과 동심의 잠자리 모습에서 씨익 웃는 선배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번뜩 내려와 ‘귀로’라는 노래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노래 중에 이런 대목이 다가옵니다.
“무지개가 뜨는 언덕을 찾아
넓은 세상 멀리 헤매 다녔네
그 무지개 어디로 사라지고
높던 해는 기울어가네
새털구름 머문 파란 하늘 아래
푸른 숨을 쉬며 천천히 걸어서
나 그리운 그 곳에 간다네
먼 길을 돌아 처음으로
엄혹했던 노동운동가에서,
치열한 진보적 대중 정치인으로.
이제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국민들의 가슴 속에 첼로의 운율을 남긴 만큼 먼 길 돌아왔습니다.
처음처럼, 아가처럼 편히 쉬십시오.
2018년 7월 27일
정의당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