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오세훈의 자살골과 서울시장 보궐선거
: 안철수 현상, 한국 정치 태풍의 눈으로 성장하다
이명박 정권 4년간의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인 시민들은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에서 투표로 심판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국민들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747’ 선거공약(7% 성장, 국민소득 4만불, 7대 경제 강국)으로 권력을 거머쥔 이명박 정권이 지난 4년 간 한 일은 한마디로 서민 주머니를 털어 부자 곳간을 채워준 것이었다. 게다가 4대강 사업 등 각종 토건사업에 혈세를 쏟아 부어 국고를 탕진했다. 부족한 세수는 부가세나 유류세를 올리는 수법처럼 서민 증세로 메웠다. 부자는 감세, 서민은 증세였다. 세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연말이면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 때처럼 세금 징수액을 할당해 자영업자들을 쥐어짰다. 심지어 반려동물 치료에까지 부가세를 매기는 등 꼼꼼히 수탈해갔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야권연대의 위력을 확인한 야권도 전열을 정비하고 2012년 총선과 대선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2011년 10월 26일 치러진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야권이 기세를 올리는 신호탄이었다. 오세훈 한나라당 서울시장이 무상급식을 ‘복지 포퓰리즘’이라며 맹공을 퍼붓고 주민투표에 시장직을 거는 만용을 부렸다가 패퇴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울시장 보궐선거 공간에서 야권이 결집했다. 가장 주목을 받은 이는 안철수였다. ‘청춘콘서트’로 전국을 돌며 바람을 일으키던 안철수가 가장 유력한 서울시장후보로 떠올랐다. 더불어 ‘참여연대’와 ‘희망제작소’ 등을 통해 시민운동의 리더로 이름을 떨치던 박원순도 출사표를 던졌다.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인 ‘V3’를 무료로 배포하며 공익적 가치를 추구해온 안철수가 가진 힘은 막강했다. 그러나 그가 드러내 보인 정치관은 고대 플라톤이 꿈꾸었던 ‘철인 정치’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기성 정치인들의 ‘갈등의 정치’는 백신을 통해 제거해야 할 그 무엇이었고, 기술관료 전문가에 의해 가장 이상적인 ‘솔루션’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 안철수의 정치관에는 반(反)정치의 냄새가 풍겼다. 그러나 대안을 두고 경쟁하지 않았던 기성 정치세력이 안철수의 전문가 정치를 비판할 힘은 별로 없었다. 안철수는 심지어 박원순에게 후보 자리를 ‘쿨하게’ 양보함으로써 자리를 탐하기보다 대의에 복무하는 감동 정치까지 연출했다. 기성 정치세력은 모두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안철수의 후광까지 업게 된 박원순의 지지율은 크게 뛰어올라 한나라당 나경원 시장후보를 앞섰다. 그러나 제 1 야당이라는 민주당이 서울시장에 후보도 출마시키지 않고 찌그러져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무소속 전문가 정치에 눌려 정당정치가 숨죽이는 상황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민주당은 박영선 의원, 민주노동당에서는 최규엽을 후보로 내세워 박원순과 범야권 단일화 경선을 치렀다. 시민들은 제 1 야당 후보를 젖히고 시민후보를 선택했다. 시민후보로 범야권 단일후보가 된 박원순은 강남3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선거구에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압도해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10.26보선은 안철수 현상의 자장 안에서 치러진 선거였으며 반MB와 반정치의 거세 바람 앞에 야당을 포함한 기성정치가 맥을 못 춘 사건이었다. 비록 제 1 야당이라 하더라도 매력적인 대안이라고 인식되지 않는 한 쉽게 표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폭발하기 시작한 안철수 현상은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안고 있었다. 안철수는 꿈을 잃어버린 청년들과 소통하며 진영을 넘어 대한민국을 다시 일으켜 세워보려는 지도자의 강림으로 받아들여졌다. 87년 체제의 낡은 대립구도를 넘어 사회경제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강한 욕구가 안철수 현상으로 분출했다. 박근혜 대세론도 꺾일 정도였으며 여야를 막론하고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걸지 않으면 안되었다. 2012년 대선에서 ‘저녁이 있는 삶’과 같은 슬로건이 채택되는 배경이 그것이다. 안철수라는 개인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대표할 정도의 기량을 가진 인물이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지각 밑에 꿈틀대는 마그마 같은 거대한 사회적 잠재의식이 안철수라는 화산을 통해 분출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한 때 그것은 진보정당의 것이었다. 부유세를 주장하고 나온 민주노동당이 대표한 것이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이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서민적이며 대중적인 구호를 들고 나왔을 때 대중들은 진보정당에 대한 의구심을 풀고 거기에 호응했다. 그러나 진보정당은 종파적 삽질로 스스로 분화구를 막았고, 종북 딱지가 붙으며 이내 닫혀버렸다.
다른 한편 안철수 현상은 기성정치에 대한 부정, 정당정치의 부정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한국정치의 짙은 그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주권을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은 정치에 있다. 그리고 현대적 정치는 탁월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 계급, 계층의 요구를 대표하는 조직화된 정당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소위 ‘인민주권’은 민주주의의 확장으로부터 나오고 민주주의의 확장은 정당 정치의 활성화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만 과대 대표된 한국정당체제는 이런 대중의 요구를 봉쇄하거나 왜곡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안철수현상은 이런 정치를 바꾸자는 것이긴 했지만 소외된 사회세력을 대표하는 강한 정당을 통해 문제를 풀려는 문제의식 보다는 공공선을 지향하는 ‘전문가’ 정치를 지향했다. 안철수는 이후 의원 정수 축소나 기초단체 정당공천 배제와 같은 반정치적 담론을 퍼뜨리는 진원지가 되어 정치 축소에서 이익을 얻는 기득권자들의 이익에 본의 아니게 복무하게 되는 역설이 빚어졌다. 그럼에도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안철수 ‘현상’은 정치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으로 그 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