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일심회’ 사건의 불똥이 민주노동당에 옮겨 붙다.
민주노동당은 국가보안법체제 하의 공안세력에게 종종 먹잇감을 제공했다. 원내 정당이 된 민주노동당은 국민들이 주시하는 ‘공당’으로서 남북관계와 관련된 정치활동을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운영해야 했다. 진보-개혁진영으로부터 악법으로 비판받고 있는 국가보안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엄연한 실정법인 이상 당직자가 연루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은 민주노동당이 애써 쌓아온 긍정적 이미지를 한순간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입성하기 전에 발생한 2003년 8월의 세칭 ‘강태운 고문 간첩사건’은 민주노동당의 국가보안법 취약성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당시 공안부에서는 강태운고문이 일본에 거주하는 공작원 박춘근에게 포섭되어 민주노동당 관련 자료와 국내정세 분석 자료를 전달하고, 중국의 북한 대외연락부 부과장 김문수 등 북한 공작원들과 접선을 계속해왔다며 강고문을 국가보안법 상 간첩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민주노동당으로서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민주노동당은 강태운씨를 ‘통일운동가’로 예우해 고문에 위촉했을 뿐 당내 일에 관여하지 않은 인사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수구언론들은 민주노동당의 해명을 무시하고 강고문이 민주노동당의 정강 정책에도 깊숙이 개입한 듯 소설을 써댔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강고문의 활동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민주노동당은 고문직 해촉과 당적 박탈 등 후속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국가보안법은 위반사건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불의의 율법이다. 따라서 합법 대중정당인 민주노동당으로서는 국가보안법체제를 상수로 놓고 당을 규율하지 않으면 당이 연루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의 리스크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원내 입성 이후 2006년 10월에 발생한 소위 ‘일심회’ 간첩단 사건은 민주노동당의 뒤통수를 친 끔찍한 재앙이었다. 검찰은 북한 공작원과 접촉한 혐의로 민주노동당 전 중앙위원 이정훈, 개인사업가 장민호(마이클 장), 모 학원장 손정목,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 최기영 등을 체포했다. 보수 언론은 6.15선언 이후 최대 간첩단 사건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민주노동당의 연루 사실을 부풀렸다.
그러나 재판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이 사건은 연루된 이가 마이클 장 등 4인에 불과했고, 강령과 규율을 별도로 정하지도 않았고, 조직을 결성한 것도 아니었으며, 구성원 서로가 조직의 구성원이라는 사실 자체도 몰랐다는 점에서 ‘이적단체를 구성’한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일심회’는 조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들이 북한 공작원에 제공했다는 국가 기밀이라는 것조차 민주노동당 사업계획이나 ‘자민통 서울모임’ 내부 회의자료 정도여서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고, 유죄 증거물조차 “국가 안보를 위협할 만큼 중대하지 않다”고 인정되는 등 사실상 ‘태산명동에 서일필’식으로 전형적인 부풀리기 수사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건에 연루된 민주노동당의 당직자가 344명의 당직자 성향분석 자료를 작성해 소위 ‘본사(북측)’에 넘긴 사실이나 “김정일 장군께 충성의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는 따위의 맹세문을 보내는 등 친북 일탈행위는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당 내부에서는 “국가보안법 위반 이전에 당직자 신상정보 유출은 심각한 인권침해이며 진보운동의 일탈행위”라는 비판이 일었다. 그러나 자주파 인사들은 “당을 음해하려는 검찰의 공작”이라고 일축하고 국민이 납득할만한 공식 브리핑이나 논평을 내놓지 않았다. 2003년 강고문 사건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공식적 대응이 이렇게 모호해지면서 세칭 ‘일심회’사건의 불똥은 민주노동당 전체로 옮겨 붙었다. 보수세력은 연일 민주노동당을 ‘친북당’, ‘간첩당’이라고 몰아붙였다.
당시 심상정의원은 “당이 진상조사를 통해 깨끗이 해명하고 일탈행위엔 국민적 눈높이에 맞는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지도부에 촉구했으나 ‘책임 있는 조치’는 굼뜨게 유보되었다.
당 내부에서 제기된 비판의 핵심은 ‘일심회’사건은 공안세력이 부풀린 작품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으나 문제는 그들이 만들고 싶어 하는 ‘작품’의 재료를 끊임없이 공급해주는 당 내부의 취약성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심회’ 사건에 수세적인 대응으로 일관하는 진보세력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박노자교수 조차 “민족해방파(NL)에 대한 제 솔직한 의견을 묻는다면 한국 진보운동이 앓고 있는 ‘소아병적 질환’이라고 답하겠다. 민주노동당에 표를 주고 싶어도 거기에 주사파가 너무 많아 주저한다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봤다”며 “운동담론이나 당 차원에서도 북한의 국가주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무슨 ‘민족해방 이념’ 쯤으로 착각하는 분들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민주노동당은 국가보안법 리스크를 짊어지고 다니는 정당이었다. 결국 자주파가 “동지를 버릴 수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함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국민적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북한 추종 노선에 대한 온정적 태도를 비판하는 측의 분당 압력도 점차 커져갔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비합법 운동을 해왔던 이들이 제도권 대중정당에서 일하기로 했다면 각종 제도적 제약을 감안하고 이른바 ‘체제 안에서 일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체제 안에서 일하며 민주주의의 힘으로 체제를 넘어서는 운동이 진보적인 대중정당 노선이라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민주노동당의 키를 쥐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