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의사당의 낯선 손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
:국회의원 특권도 낯설다. 동료시민들의 눈높이로 바꿔라
민주노동당식 포퓰리즘 정치, 의원특권 폐지운동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은 월급쟁이, 노동자, 농민, 서민이 국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가 당선 직후 토한 일성이었다.
2004년 4월 22일 여의도 의사당은 낯선 손님들을 맞았다. 당선자 등록을 하러 온 심상정 당선자는 의원 금배지와 공직자 재산등록 서류들이 들어있는 검은색 007 의원 서류가방을 보고는 “남성 중심적인 국회”라는 걸 잘 보여주는 것 같다고 첫 느낌을 말했고, “무거워서 가방을 들 수 있겠느냐”는 심 당선자의 질문에 ‘보좌관이 들면 된다’는 사무처 직원의 대답을 듣고는 “우리 보좌관은 가방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다”며 동료시민으로서의 소박한 견해를 가감없이 드러냈다.
점퍼 차림의 단병호 당선자는 “정문에서 의경들이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 ‘등록하러 왔다’니까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눈치더라”면서 “본청 안에 들어가서도 똑같은 눈치였다”며 낯선 손님에 대한 국회의 반응을 전했다. 심 당선자는 “사무처에 들어갔더니 직원들이 모두 기립하더라”면서 “국회의원들이 들어오면 다 일어나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낯설게 느껴지는 국회의원의 특권부터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의원 전용 출입문이나 전용 엘리베이터와 같은 사소한 특권에서부터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까지 동료시민들의 눈으로 볼 때 의원 특권은 곱게 보이지 않았다. 특히 불체포 특권과 면책 특권은 ‘방탄국회’와 ‘막가파식 폭로정치’에 악용되었기 때문에 제한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당시 불법 대선자금 수수로 구속된 서청원 한나라당 의원이 석방된 것은 비리에 연루돼 구속되더라도 현행범이 아닌 한 국회에서 석방동의안이 통과되면 회기 중에는 바로 석방해야 한다는 불체포 특권의 악용사례였다.
민주노동당은 5월 20일 ‘국회특권폐지운동본부’를 설치해 본격적으로 의원특권 폐지운동에 나서기로 했다. 노회찬 사무총장은 “의원 편의 제공이나 불체포.면책 특권 등과 함께 다수 정당이 갖는 특권도 폐지하거나 현격히 줄이자는 것”이라고 했다. 또 민주노동당은 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 도입도 더불어 추진키로 했다. 그러나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은 국회의 권력견제 기능을 감안한 의원 보호장치라는 측면에서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엇갈리는 문제였다. 어찌 보면 진보정당의 사상 첫 등원으로 기성 보수정당과 차별화하고 서민들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어야 한다는 다급한 사명감에서 추진된 다분히 포퓰리즘적 행보였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민주노동당 당선자들은 월급도 노동자 평균임금 180만원만 받고 나머지는 당비로 귀속시키기로 했고 의원에게 주어지는 자가용 사용을 거부하겠다고 했다. 민주노동당의 의원 특권 내려놓기 목록에는 고급차 안타기, 관광성 해외여행 금지, 명절 때 비행기 및 열차표 청탁 안하기, 피감기관들의 술 대접 안받기 등 '일상적 특권'도 있었지만, 의원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의정활동을 위한 정상적 권리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미국의 경우 의원들의 주말 지역구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워싱턴에 작은 공항을 따로 마련하고 있는데 이것을 특권으로 보아야 하는지 의문이 있다는 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국회의원에 대한 불신이 워낙 커서 정당한 권리조차 특혜처럼 비쳐 의원특권 내려놓기는 스스로 의정활동을 발목 잡는 효과도 있었던 것이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제살깎기식 특권 내려놓기 경쟁의 진정한 목표는 교섭단체 특권에 관한 문제였다. 원내 교섭단체가 된다는 것은 의사일정 조율뿐만 아니라 의제에 관한 협의와 조율 등을 통해 국정 운영의 주체적인 파트너가 된다는 의미였다. 원내교섭단체는 국회운영의 실질적인 핵심으로 윤리심사(징계)요구, 의사일정 변경동의, 국무위원 출석요구, 의안 수정동의, 긴급현안질문, 본회의 및 위원회에서의 발언시간 및 발언자 수, 상임위 및 특별위 의원선임 등에 있어서도 권한을 갖는다. 노동자 서민의 목소리를 원내에 투영시켜 민주노동당의 정책적 차별성을 분명히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는 민주노동당 입장에서 보면, 원내교섭단체가 돼야 하는 것은 등원 다음으로 또 한 번 넘어서야 할 고비였다.
그러나 교섭단체 구성요건은 원내 20석을 가진 정당에 한정되어 있어 민주노동당은 국정운영의 주체적 파트너에서 배제된 것이었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민주노동당이 총선에서 10% 이상의 정당득표율을 얻은 것을 무시하면서 전체 의석수의 10%도 안 되는 20석만을 교섭단체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모순”이라며 “교섭단체 제도를 채택한 24개국 가운데 이런 기준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원내 입성조차 거북해 하는 기성 정당의 입장에서는 민주노동당에 그런 마이크를 내 줄 리 만무했다. 민주노동당으로서도 교섭단체 특권 내려놓기라는 의제를 주구장창 물고 늘어 질 수도 없었다.
어쨌든 민주노동당 초보 의원의 원내 입성은 기성의 제도와 관행을 크게 흔들어놓으면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특권 내려놓기 경쟁을 불 지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