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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3강. 민주주의와 정당
 

 

 

 

5부. 어떻게 하면 정당 정치를 좋게 만들 수 있을까


33강. 민주주의와 정당

 

1) 33번째 시간이다. 원래는 4부의 마지막 강의로 "정치 양극화" 문제를 다룰 예정이었으나, 바로 5부 강의로 넘어가고자 한다. 정치 양극화에 대한 강의는 5부 끝에서 다룰 생각인데, 사정이 이렇게 된 이유는 그때 말하기로 하겠다.

오늘부터는 5강에 걸려 우리 현실에서 제기되는 정당 개혁 관련 논의들을 다루겠다. 바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2) 지금까지 본 강사는 현대 민주주의는 곧 정당 정치이고 정당 정치가 좋아야 민주정치가 지향하는 가치나 이상에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말했다. 그런데 민주화이후 4반세기를 지나오면서, 점점 더 거부감을 갖게 하는 정치 용어를 꼽으라면 대표적으로 “정치개혁”, “정당개혁”, “제도개혁”을 들고 싶다. 그런 용어를 앞세우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신뢰도 느껴지지 않고, 경청할 의사도 잘 생기지 않는다. 그보다는 있는 정치 똑바로 하고, 해야 할 정치 제대로 하기 위해 자신의 정당을 수습 내지 다져 나가고 그리하여 실체적 변화를 주도하겠다는 것이 훨씬 더 실감이 느껴지는 유익한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한국정치가 지금처럼 퇴락한 것은 그간의 이상한 개혁론 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 결과 이제는 어느 정치가도 자신의 정당을 하나의 팀이자 공통의 정체성을 갖는 통합된 조직으로 여기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들 사이에 지배적인 것은 재선과 대권을 위한 수단으로서 정당을 보는, 도구적 관점뿐이다. 차기 공천권을 행사할 당권과 차기 대선에 나설 대권 후보 선출 문제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는 것을 정당 개혁이라 할 수 있을까? 왜 정당 개혁론을 말하는 누구도, 조직적으로 강한 정당 만드는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할까? 참으로 알 수 없는, 본말이 전도된 개혁”론“ 경쟁만 있는 게 그간의 한국정치가 아니었나 싶다.

 

정당은 민주주의 문제의 단순한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중심이며, 따라서 정당의 시대는 끝났다라고 말하는 것은 곧 스스로 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 고백과 다름없는 일임을 강조하고 싶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어떻게든 좋은 정당을 만드는 일에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정치가라면 다른 무엇보다도 이 문제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정당을 정당답게 만드는 일에 헌신하기를 진심으로 촉구하고 싶다.

 

3) 민주주의가 갖는 최고의 규범성은 가난하고 못 배운 시민들이 자신의 열악한 조건과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도록 정치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갖게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빈부의 갈등이야말로 인간의 어떤 정치체제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갈등이고, 이 문제를 둘러싼 진보와 보수의 좋은 경쟁체제를 만드는 일이 지금의 민주 정치에서도 지향해야 할 가중 중요한 과업이라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는 그 어떤 정치체제보다 높게 평가될만한 이유가 있다.

 

가난한 보통의 사람들, 일반 대중이 정치의 중심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현대 민주주의가 유일하다. 고대 민주주의가 놀랄만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아무리 그래도 “고향이 같은” “중산층 이상의” “남성 가부장들”만의 민주주의였다. 어디에서 태어나든, 가난하든, 교육을 받았든 못 받았든 일반 대중이 이처럼 대규모로 정치의 일상에 참여할 수 있는, 이른바 “대중정치(mass politics)”와 “대중민주주의(mass democracy)”는 놀라운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을 정치에 동원한 것도 정당이었고, 이들이 평등한 시민권을 갖도록 노조와 공제조합 등 다양한 형태의 조직을 개발하고 실천한 것도 정당이었다. 일반대중을 통치의 영역에 깊숙이 관여시킨 것도 정당이었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고 자유를 평등하게 향유하는 것이 당연한 권리임을 주장하고 제도화하려 한 것도 정당이었다.

 

정당이 있고 없고는 그저 있을 게 하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가난한 시민의 이익과 열정을 제대로 조직하고 표출하고 대표하는 정당이 없다면,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그 자체는 사회경제적 강자 집단을 견제하기는커녕 불평등과 불균형을 더 심화시킬 수도 있다. 정당은 시민을 더 단단하게 조직해 주어야 하고, 더 실체적으로 대표해주어야 하고, 이들의 이익과 열정을 공공 정책의 형태로 더 확고하게 제도화해주어야 한다. 정당이 약하면 민주정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부속물이자, 사회 강자집단들에 의해 조롱받는 모조품, 나아가서는 많이 배운 중산층 전문가 집단의 허영심을 채워줄 놀이터에 불과할 수 있다.

 

 

 

4) 정당이 단단하게 응집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개방적이 되려 하고 시민 친화적이 되겠다고 해도, 기껏해야 당 내부만 분열시킬 뿐이다. 외부적으로 개방과 혁신을 말하며, 실제로는 당권과 대권 후보를 선출하는 방법과 관련해서만 다툼이 벌어지는 정당이 잘 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대통령권력이 한 정치가 개인과 그의 계파가 배타적으로 품는 야심이 되는 한, 그들이 집권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민주주의의 가치에서 볼 때 대권을 추구하는 사람이 윤리적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정당을 제대로 만드는 “정당 리더(party leader)”로서의 열정과 성과를 먼저 보이는 데 있다.

 

당조직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 없이, 정당 후보라는 이름만 빌리고 실제로는 “개인 정치”의 도구로 소속 정당을 활용하는 정치가들만 양산된다면, 민주정치의 미래는 없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인류 역사에서 정치를 직업이자 소명으로 삼은 사례는 단 두 경우뿐이다. 하나는 고대 그리스민주주의에서 등장했던 “데마고그”로서 그 첫 번째 인물은 기원전 5세기 중엽 아테네민주주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였다. 다른 하나는 현대 민주주의와 더불어 등장한 ‘정당 리더’다. 이 두 경우를 빼고는 정치라는 일에 자신의 직업적 소명을 가졌던 예는 없다며, 베버는 귀족 내지 군주정 하에서 다양한 정치 보좌역을 했던 주교, 인문학자, 귀족, 양반 등에게 정치는 ‘부업’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정당 리더는 현대 민주주의에서 핵심적 위치를 갖는다는 것으로, 정당 리더를 거쳐 수상도 되고 대통령도 되는 일이 자연스러워야 정치도 사회도 좋아진다. 정당은 이제 인기가 없다며 개인 이미지나 네트워크형 시민정치로 대통령이 되겠다면 “베를루스코니 식 정치”와 다를 바 없거나, 기껏해야 “착한 베를루스코니” 이상이 될 수 없다고 본다.

 

5) 그런데 왜 우리 정치에서는 정당 리더가 되어, 좋은 정당을 만들고, 당내 다양한 계파들 사이에 좋은 경쟁과 협력의 체계를 이끌어내고, 정당의 구성원과 지지자, 당원들에게 자부심과 보람을 갖게 하는 일에 자신의 정치 인생을 걸겠다는 정치인을 볼 수가 없는지, 몹시 답답하다. 모두들 당 밖 여론시장에만 소구하려는 노력만 있을 뿐, 정작 당 내에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아무도 하지 않는다. 소통 기술상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좋으나, 정당 안에서 할 일을 버리고,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자신만의 추종자를 만드는 등의 여론 동원 정치에 몰두하는 것은 정치는 물론 사회도 분열시킬 수밖에 없다. 당연히 시민성만 사나워지게 만든다.

 

6) 현대 민주주의는 ‘정당의 충격(impact of parties)’이 가져온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규모의 하층 대중을 정치에 참여시킨 것도 정당이고, 시민에 대한 최고의 민주주의 교육자 역할을 한 것도 정당이고, 다양한 사회정책과 공공정책을 통해 복지와 재분배를 이끌어 낸 것도 정당이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정당의 충격’을 통해 민주화된 것도 아니고, ‘정당의 충격’을 통해 민주화이후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도 못했고, ‘정당의 충격’을 통해 경제민주화나 복지 등 사회경제적 전환의 과제를 실현하지도 못했다. 정당은 약화되었고 곧 국가 관료제와 재벌의 강화로 이어졌고, 정치인 내지 정치 활동가를 우습게 여기는 지식인과 언론 엘리트들만 양산해 놓았다. 그 결과는 한국사회를 전대미문의 불평등한 사회로 바꿔놓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주의에서 정당 정치가 약해지면 필연적으로 사회적 강자 집단들의 발언권은 강해진다. 신자유주의의 충격을 예로 들면, 원리상으로는 국가 관료제와 재벌에게 불리하게 작용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노조와 정당이라는 현대 민주주의의 두 중심 제도만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좋은 경제와 좋은 정치의 전망은 더 취약해졌다. 불행하게도 이 과정을 더 급진화시킨 주체 가운데 하나는 정당이었다. 정당 스스로 신자유주의의 중심 가치인 개방과 외주화의 논리로 스스로에 대한 ”자해적 정당개혁“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당원의 틀을 넘어서 더 넓게 지지자를 구하고 새로운 스타일과 행위 패턴을 정치에 도입하고 하는 일은, 정당 내부가 단단해지는 것에 비례해 시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적으로는 그럴 듯한 시도가 정당 내부를 공허하게 만든다.

 

자신의 당원과 당 관료들에게 지지받고 그러면서 당 구성원의 질도 높아지는 데 기여하는 순환의 사이클이 정당 내부의 문화와 기풍으로 자리 잡지 않으면 어느 정당도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당 내부의 요구는 애써 주목하려 하지 않으면서 당 외부에서 개인적 정치 자산을 추구하려는 경향만 과도하게 허용되는 정당에서 좋은 정치로의 변화 에너지가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가 절대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호모 폴리티쿠스(정치적 인간)는 제대로 된 정당 만들기에 헌신하는 사람이다.

 

7) 그러나 우리 현실 속에서 정치 개혁의 방안이라며 제기되고 있는 주장들은 본 강사의 바람과는 거리가 많다. 뭔가 자신이 말한 대로 하면 한국 정치에 일대 혁신이 있을 것 같은 허구적 “구호 정치”만 많다. 그 가운데 개헌론과 선거제도론, 정당모델론, 전문지식인 중심의 국민운동론에 대해서만 몇 가지 생각을 말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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