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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강. 2개의 정당체계와 제3시민론?

 

 

 

 

4부. 정당 조직과 체계의 변화
 
32강. 2개의 정당체계와 제3시민론


1) 32번째 시간이다. 오늘부터 앞으로 두 시간은 한국 정당정치의 변화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두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하나는 지금의 정당체계에 의해 대표되고 있지 못한 제3시민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내용 없이 싸우기만 하면서 사회공동체를 분열로 몰고 가는 정치양극화의 문제이다. 오늘은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2) 우선 보수정당에게도 민주적 소명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서 오늘의 강의를 시작하고 싶다. 앞서 우리나라 여당의 가장 큰 특징을 “국가파생 정당”으로 정의했는데, 국가에 매달려 프리미엄을 좇는 것에 만족하면 “민주적 보수정당”의 길은 없다. 정당은 사회에 기반을 둔 자율적 통치체일 때, 그 가치를 갖는다. 이 점은 보수정당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국가 내지 대통령 의존적인 정당”으로부터 이제는 좀 달라져 “사회에 기반을 둔 정당”으로 발전해 가야 한다. 그냥 여당이어서는 안 되고, 집권당(government party)이자 행정부 운영에 책임성을 가질 수 있는 정당정부(party government)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여당 역시 보편적 의미의 보수정당이 되어야 할 텐데,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적 토대를 튼튼히 하길 촉구하고 싶다.

 

자유주의의 핵심은 평등한 개인 권리에서 출발하고 자율적이고 공정한 경쟁을 중시하며, 그 기초 위에서 공동체의 통합을 이룩하려는 것에 있다. 적어도 이 문제에서 보수 정당이 제 역할을 해 줘야, 과도한 국가 중심성과 중앙 집중성 그리고 획일적 문화와 과도한 관료의존과 재벌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혁신적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창업하고 일에 대한 헌신의 기회를 갖고자 하는 노동자들이 자립적 의지를 갖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

 

노동자들이 경제활동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엄연한 현실에서, 노동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민주적 보수”의 길이 아니다. 함께 땀 흘려 협동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서 보수 또한 더 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 문제에서 보수가 실력으로 말하고 결과로 일해야, 좋은 진보가 성장할 기회도 커진다. 진보와 보수는 어느 하나가 없으면 각자도 좋아지기 어려운, 경쟁적 보완재의 성격을 갖는다. 보수와 진보가 멋지게 경쟁해야 민주정치가 좋아진다.

 

3) 민주당과 진보정당 등 야권의 정당에 대해서는 그간의 강의를 통해 많은 말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사실 강의의 상당 부분 내지 문제의식의 출발점은 야권의 정당들이 해 온 경험에 있다. 따라서 그들 스스로 해야 할 정당조직 차원의 과제에 대해서보다는, 정당체계 차원의 과제와 관련해 몇 가지 생각을 말해보고자 한다. 이와 관련해 판단해야 할 작은 주제들은 수두룩하다.

 

① 앞선 강의에서 정당체계의 안정화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하층동원”에 있다고 했는데, 우리의 경우 하층동원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까? ② 87년에서 90년 초에 이르는 시기를 그렇다고 볼 수 있을까? ③ 지역균열이 대규모 대중정치의 양상을 가졌던 것 역시 정당체계 이론에서 말하는 “결빙효과”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있을까? ④ 아니라면 향후 하층동원의 계기가 어떤 형태로든 등장 가능하다고 볼 수 있을까? ⑤ 신자유주의적 양극화로 인한 대규모 피해 집단의 누적은 그 자원이 될 수 있을까? ⑥ 노사모 현상을 반권위, 분권 등 탈물질주의적 새정치(new politics)의 한 특징으로 볼 수 있을까? ⑦ 안철수 현상을 뒷받침했던 지지자들은 노사모와 비교해 어떤 성격의 시민들인가? ⑧ 우리에게 서유럽적인 진보-보수 정당체계로의 경로는 불가능한 것일까? ⑨ 중산층 중심의 정치 즉, 노동과 진보에 시민권을 허용하지 않는 “보수 대 보수의 양당체계”는 지속될 것인가? ⑩ 그렇다면 부자와 빈자의 보편적 갈등, 자본주의적 계층 갈등, 좌와 우 등과 같은 인간사회 보편의 경향은 한국 정당체계에서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 ⑪ 민주당은 한국형 진보정당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 ⑫ 진보정당이 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이 되고 집권당이 될 수 있는 경로는 열려 있는가, 아니면 한국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경로일까?

 

이 모든 것이 흥미로운 문제들이지만, 사실 이 질문들의 대부분은 정당 스스로가 행동으로 답해 줘야 할 문제들이다. 그런 이유에서 한국 정당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 하나에 모든 실천적 문제를 집약시켜 이야기해볼까 한다.

 

4) 본 강사는 한국 정치의 최대 갈등은 지금의 여야 사이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현재의 정치와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진 비판적 시민들이 기대하는 미래의 정치 사이의 갈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여야 간 갈등이 아니라 “두 개의 정당체계” 사이의 갈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제1의 정당체계는 지금의 정당체계인데, 크게 세 정치세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 하나는 국가 파생정당으로서 새누리당이 있다. 처음 자유당이 만들어질 때부터 우리나라 보수정당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로부터 파생되어 만들어졌다는 특징이 있다. 그렇기에 늘 보이지 않는 프리미엄이 있고, 애초부터 불공정한 경쟁인 면도 적지 않다. 이 정당의 조직적 이익은 1당우위체계를 공고화하는 데 있다.

 

② 다른 하나는 국가 파생정당의 다른 짝으로, 국가로 상승하려는 욕구로 정의되는 정당이다. 민주당은 어느 모로 보나 자체의 사회적 기반도, 대중 조직도, 이념적 정체성도 없는데, 이를 유지시키는 힘은 역시 강한 국가 파생정당에 대한 “반대”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일종의 “부정적 정체성(negative identity)”에 의해 그들 내부를 결속시키는 정당이다. 그러나 그들 내부는 매우 이질적인 생각과 개성을 가진 정치 자영업자들이 모여 경쟁하는 유사 “장터 정당(arena party)”에 가깝다. 조직으로서의 정당의 면모가 매우 약하다는 뜻이다. 이들 내부에서 이탈 효과를 제어하는 것이 있다면 그 가운데 하나는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의 이점이다. 두 제도 모두 제1야당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제도에 매달려 있는 정당”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이유 때문에 이 당의 이해관계는 양당제를 공고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3당 이하의 정당들과 그 지지자들이 가진 열정을 강한 국가/집권세력에 대한 “두려움의 동원”을 통해 흡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③ 셋째는 출발 자체는 “보수양당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했지만, 선거를 거듭할수록 “보수야당”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압박 때문에 정신적으로 방황했던 진보정당들이다. 비례대표제와 다당제를 바라지만, 전체 정당체계가 다당화 되기는커녕 그 전에 진보정당 블록 내부가 복수의 정당으로 먼저 분열된 세력이기도 하다. 분열이 상처를 남기고, 상처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면서, 결과적으로 묘한 패배주의적 심리상태를 보이는 문제도 안고 있다. 진보 내부의 심리적 거리감은 큰 반면, 어느 진보정당이든 야권후보 단일화테이블 참여권을 놓칠 수 없어 제1야당에 다가서게 되는 복잡한 심리가 그들을 늘 괴롭히고 있다. 그러면서도 제1야당이 분열해 새로운 연합의 가능성이 만들어지기를 내심 기대하는 수동적 상황에 몰려 있는 형국이기도 하다.

 

5) 앞서 살펴 본대로 “제1의 정당체계”는 해결할 수 없는 긴장과 딜레마를 동반하고 있고, 그 때문에 정당들의 경우 적극적 지지자를 조직하는 데 어려움을 갖는다. 따라서 많은 유권자들에게 주어진 상황은 충성(loyalty)이나 항의(voice)보다 끊임없이 이탈(exit)을 상상하는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제2의 정당체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정당체계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사람들의 기대와 바람으로서 “미래 정당체계”가 아닐 수 없다.

 

늘 강조해온 것이지만, 한국 정치의 최대 에너지는 “다른 정치”가 가능하길 바라는 “매우 비판적이고 정치적인 무당파 시민”이다. 이 점에서 전통적인 정치 무관심층과는 매우 다른 무당파들이다. 본 강사는 이를 “제3시민”이라 부르고 싶고, 제2의 정당체계는 이들 제3시민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본다. 이들은 누구인가?

 

그간 투표는 기존 정당에게 던졌지만, 그들을 지지해서라기보다는 상황의 압박 내지 차선이라도 추구하겠다는 생각으로 전략적 선택을 해야 했던 시민들이다. 온-오프라인에서 다양한 항의와 압력 활동을 하고, 다양한 시민조직이나 운동에 후원도 하는 등 적극적 시민으로서 할 역할을 다하고자 했으나, 늘 적극적 정당 대안을 갖지 못해 새로운 정치 가능성을 추구했던 시민들이다. 진보적인 정당을 지지하지만 그들 내부의 분열 때문에 잠시 주춤하고 있는 시민들이다.

 

 

6) 이들이 이념적으로나, 계층적으로 어떤 존재들인지는 불확정적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사실은 중요하다. 이는 “안철수 현상”을 이해하는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우선 안철수 현상을 만든 사람들을 기존 여야 사이의 “중도”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이라고 본다. 분명 안철수 현상은 기존 여야당 사이에 빈 공간이 매우 크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두 정당 블록 내부에 분화의 요인으로도 작용했던, 이른바 “중간정당”적 특징을 가진 것도 분명했지만, 이를 가능케 했던 비판적 제3시민의 정치적, 이념적, 계층적, 지역적 특성은 어떤 고정적 내용을 갖지 않는다. 앞으로도 이들이 어떤 정치, 이념, 계층, 지역적 정체성을 발전시키게 될지는 누가 이들을 불러들일 대안정당이 될지에 따라 결정되리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특징을 “반정당적”, 혹은 “정당 기피적”이라고 정의한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그들이 정당에 비판적인 표현을 했다면 그것은 제1의 정당체계에 대한 것이었고, 그들의 의식적/무의식적 세계를 지배한 진정한 기대는 제대로 된 새로운 정치세력과 정당에 대한 바람이었다고 본다.

 

7) 새로운 제3정당의 출현 가능성은 어떨까? 문제의 핵심은 그런 외생 정당을 위한 사회적 에너지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노동운동? 학생운동? 아니면 새로운 사회운동? 글쎄, 누가 제3당에게 집합적 에너지를 제공할 수 있을까? 긍정적으로 판단하기에는 지금 한국 사회운동의 조직적 에너지는 너무나 빠르게 약해졌다. 여론의 주목을 잠깐 동안 불러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정당 형성의 긴 시간을 견디게 해줄 조직화된 사회적 힘은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가 않는다.

 

사회 속에서 조직화된 외생적 에너지가 새로운 정당을 뒷받침하기 어렵다면, 새로운 정당을 준비하는 주도 세력이 감당해야 할 “조직화의 비용”은 상상도 하기 어려울 만큼 클 수밖에 없다. “기존 정당들은 틀려먹었다!”고 말로 부정하기는 쉬우나, 그것과 대안정당을 실제로 조직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그간의 진보정당 실험도 아직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상태이고, 안철수 현상 역시 조직화의 단계에서 좌절해버리고 말았다. 정당 만들기에 필요한 조직화의 비용을 감당할 세력이나 뭔가 특별한 가치 기반이 분명치 않다면, 앞으로도 제3정당의 실험은 성공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제3시민은 있되, 그렇다고 제3정당의 가능성을 쉽게 말하기는 어려운 현실, 이것이 오늘의 한국정치가 아닌가 한다.

 

8) 자신의 정당 내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통해서 변화를 조직하는 일이, 비록 “시간은 걸릴지 모르나 가장 확실한 길”일지 모르겠다. 자신의 정당조직 안에서 변화를 조직할 수 없는 사람은 더 나은 조건을 가져다 줘도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다. 이미 있는 당원, 지지자, 활동가, 정치엘리트 등의 자원을 효과적으로 재통합하는 데에서 실력을 보일 수 없는 세력이나 리더에게, 어느 조직이나 사회도 간헐적인 기대만 줄뿐 실제 가능성을 오래 허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현대 민주정치의 수많은 사례들이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제약을 뚫고 제3정당의 실험을 성공으로 이끈다면, 아마도 대단한 역량이 있어야 할지 모른다. 단순히 기존 정당들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이 만들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조직된 사회 세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간의 제3당 실험의 좌절을 지켜봐왔던 제3시민들 스스로가 기대감을 많이 낮게 갖고 있기도 하다. 결국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하는 한, 그저 옳은 이야기만 반복하는 한, 변화는 생각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자신의 정당이든 아니면 새로운 정당이든, 스스로 제대로 된 강한 정당을 만드는 문제에서 성과를 내는 “정치적 인간”을, 오늘의 제3시민은 강렬하게 열망한다.

 

9) 어찌될 것인지에 대한 객관적 예측 같은 것은 없다. 누가 성과를 낼지, 결국 개별 정당 내지 정당이 되고자 하는 세력의 의지와 실력이 어떤지가 우리에게 답을 말해줄 것이다. “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여기서 뛰어보라!(Hic Rhodus, hic saltus!)” 자신이 대안이다 라거나 자신만이 옳다는 말은 그만 두고, 누가 시민의 지지를 더 많이 조직할 수 있는지 하는 성과로 말하라. 그게 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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