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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강. 정당체제의 변화 1 : 사회균열과 정당체계

 

 

 

 

4부. 정당 조직과 체계의 변화

 

30강. 정당체제의 변화 1 : 사회균열과 정당체계


1) 30번째 시간이다. 앞서 두 시간은 정당 조직 차원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이제 정당체계 차원에서 정당 정치의 변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2) 서구의 앞선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종교, 문화, 지역, 계층, 이념, 가치 등등이 정당이 되었다. 기민당의 예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언어와 문화 차이가 만든 벨기에 정당 정치도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고, 스페인의 지역 갈등과 영국의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문제도 익숙하다. 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 정당의 이념 차이도 교과서적 상식이 되었고, 좌파 내 사회당과 공산당의 갈등은 물론 생태 및 정보 주권 등의 가치를 내건 녹색당과 해적당의 실험도 주목을 받았다. 이 예들이 보여주듯, 사회적으로 동원력 있는 큰 갈등과 균열은 모두 정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떤가? 왜 종교정당이 없나? 왜 중앙집권적인 사회구조임에도 지방의 이익과 열정은 정당으로 조직되지 않는가? 농민도 노동자도 자영업자도 배타적 정당채널을 갖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좌-우 정당이 있는가, 없는가?


3) 그러나 사실 흥미로운 것은 정당이 되는 균열이 무엇인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정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균열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약해지거나 사라지는 균열에 대한 것이다. 앞서 민주주의 국가들의 경험을 놓고 말할 때, 종교 및 문화, 언어, 지역적 갈등은 그 강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민당으로 대표되었던 종교 균열이 대표적인 예이다. 왜 신-구교 갈등은 급격히 줄어들고 세속적 가치는 지속적으로 점점 더 강해졌을까? 현재의 기민당을 종교정당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일랜드 정당들은 영국과의 관계를 둘러싼 갈등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뒤 그 갈등에 의해 정당 간 차이가 유지되기보다 다른 균열에 의해 더 많이 설명되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제기되어야 할 질문은 이밖에도 아주 많다. 아무튼 정당의 이념과 정책에 있어서 그간 있었던 변화에는 뚜렷한 경향성이 있는데 그것은 사회경제적인 균열을 중심으로 한 좌-우의 갈등이 점차 정당 정치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기민당 그러면 이제는 종교정당이라기보다 사회경제적 정책에 있어 중도 보수적 입장을 갖는 정당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해졌다.


4) 왜 그런가? 강한 문화적 정체성에 기반을 둔 정당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왜 애초의 정체성이 약화되고 사회경제적인 좌-우 균열에 반응하는 정당이 되었나? 무엇보다도 현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 국가형성 과정에서의 중심-주변의 갈등, 종교적 갈등, 도-농 갈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느 정도 해소 내지 완화된 반면,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만들어내는 갈등과 균열은 점점 더 사회 구성원들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사회경제적 계층의 문제는 자본주의 문제를 넘어, 어쩌면 더 보편적인 갈등인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계층갈등 즉, 빈자와 부자의 갈등은 인간 사회의 영원한 갈등이 아닐까 한다. 정당 정치가 지속되는 한 가장 강력한 분화는 빈부격차의 문제를 둘러싼 보수정당과 진보정당 사이의 갈등일 것이고, 이는 우리의 경험에서도 분명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주당을 진보정당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어색하고 불편한 정의였을 것이지만 요즘은 민주당 스스로도 진보라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 역시 여여 관계가 빈부의 갈등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5) 이와 관련해 전후 서유럽 정당체계의 변화와 무변화 문제를 보는 것은 흥미롭다. 이 분야를 정초한 것은 립셋-로칸(S. M. Lipset & S. Rokkan)의 “결빙 테제”인데, 그것은 서유럽 국가들이 본격적인 대중정치 시기에 들어갔던 1920년대의 정당체계가 그 뒤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저자들이 글을 썼던 1960년대 말을 기준으로 볼 때, 그때의 정당체계는 1920년대와 달라진 것은 없다는 말이다. 정당체계를 결빙시켰던 이때의 지배적인 균열이 계층 갈등이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다시 말해 1920년대는 보통선거권이 유럽 전역에 본격적으로 적용된 시기였고, 그와 함께 “하층동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난한 대중들이 대거 정치에 들어왔던 시기인데, 이때 이들을 둘러싸고 좌-우 계층갈등이 본격적으로 동원되면서 과거 정당을 만들어낸 많은 균열들이 좌-우의 계층 균열로 수렴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하층동원의 시기에 조직된 이때의 정당 간 경쟁의 구도가 그 뒤에도 지속성을 갖는다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1970년대 들어와 이에 대한 반론이 시작되었는데, 반론자들은 1960년대 말이후 유권자들의 투표 선택이 특정 정당으로 결빙이 유지되기보다는 그런 결빙이 해체되고 불안정해졌다는 증거를 강조했다. 이에 대한 피터 마이어의 대응 반론은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립셋-로칸이 말했던 것은 좌-우 정당으로 분기된 계층 균열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이 균열이 해빙 내지 이완되었다면 좌파 블록 내지 우파 블록 안에서의 선거 유동성이 아닌 블록 간 유동성의 증가로 나타나야 한다. 실제는 어떤가? “블록 간 유동성”은 말할 것도 없고 전체적으로 보아도 유동성이 1920년대 비해 더 커진 것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표면적으로 많이 바뀐 듯 주장되었지만, 사실 자본주의적 경제체제 내에서의 좌-우 균열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6) 정당체계의 변화 문제와 관련해 가장 강력한 도전이 있었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좌-우의 물질주의적 균열이 아닌 (반권위, 생태, 환경, 여성, 인종, 문화 등등) 탈물질주의적 가치(post-material value)의 충격으로 새로운 유권자 층이 등장했다는 주장이다. 정치학에서는 이를 “새정치(new politics)”라고 부르는데, 안철수씨가 주창했던 새정치와는 맥락이 많이 다르다. 아무튼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탈물질주의적 새정치란 유럽의 68혁명과 미국의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운동을 전환점으로 하는 신좌파적 현상을 가리킨다. 그 뒤 히피 등 “반문화운동”의 출현도 있었고, 유럽의 경우 정치적으로는 녹색당의 강력한 도전이 있었다. 미국 역시 민주당 지지자 안에 노동조합과 갈등하는, 인종문제나 소수자 문제, 문화적 취향 등을 강조하는 새로운 진보파의 흐름이 분명히 생겼다.


그러나 이 역시 과장되어서는 안 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서구의 경험으로부터 볼 때 탈물질주의적 가치에 반응하는 신흥 유권자 군은, 피터 마이어 분석에 따르면, 15% 안팎이 최대 규모였다. 그 뒤 기존 정당들이 탈물질주의 이슈에 반응함에 따라 독일을 제외하고는 독자 정당으로서 녹색당의 생존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분명 탈물질주의 가치는 좌파 안에서 노동운동과 갈등하는 신좌파의 기반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것이 정당체계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음은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존 정당들의 적응 능력도 빠르게 성장했다. 아마 앞으로도 기존 정당체계에 충격을 줄 새로운 가치는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고, 기존 큰 정당들이 대변하지 못하는 빈 공간을 공략하는 “틈새정당(niche party)”은 계속 출현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계층갈등에 기반을 둔 진보-보수의 정당체계가 보편성과 함께 아주 강한 적응력을 갖는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분명해 보인다.


7) 우리는 어떨까? “민주냐 독재냐” 같은 주장의 동원력이 아직도 큰 만큼 정당체계의 다원적 분화는 아직 제대로 진행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역균열이나 안철수현상도 정당다원주의의 저발전을 보여주는 징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사회경제적 분배와 재분배를 둘러싸고 진보 - 보수 간의 갈등이 정당체계에 부과하는 압력은 커지면 커질까, 약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정당들이 어떻게 받아 안을지는 알 수 없는 문제이지만, 누구도 피해갈 수는 없다. 정부 정책이 호남이냐 영남이냐, 여성이냐 남성이냐, 20대냐 30대냐 40대냐 50대냐 등에 따라 달리 갖는 지역별/성별/세대별 분배효과보다, 소득 구간이 어떠냐의 문제 즉, 빈곤층과 차상위계층에서부터 상층에 이르기는 계층별 분배효과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일은 더욱 더 분명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민주당이 조직적으로 안정되어 사회경제적 계층문제를 진지하게 다뤘다면, 나름 정체성을 갖는 정당으로서의 내실 있는 발전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상황은 그런 방향으로 전개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진보정당들이 민주당의 역할을 대신할 기회는 아직도 열려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이는 진보정당의 조직적 실력이 그 사이 얼마나 빨리 늘 것인지에 달려 있는 일이지만 말이다.


8) 어떻게 하면 한국의 정당체계가 (“민주냐 독재냐”, “종북이냐 아니냐” 같은 정서적 이슈 내지 상호 조정 불가능한 갈등을 위한 갈등 이슈보다, 조세나 재정 그리고 노동시장과 산업정책 등과 같이 계층 간 나눌 수 있고 조정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갈등에 의해 분화되고 재편되고 안정화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답할 수 있는 정당 정치가 될 때, 한국 민주주의에도 뭔가 의미 있는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이를 기대하면서 오늘 강의를 마친다. 다음 시간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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