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정당의 민주적 기능과 역할
25강. 정당이 공익에 기여할 수 있는 이유
2월 10일 오후 4시, 박상훈 학교장이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 |
1) 25번째 시간이다. 오늘은 정당을 “당리당략이나 자신들만의 파당적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보게 하려는 지배담론에 대해 살펴볼 생각이다. 늘 강조하는 것이지만,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도 대놓고 민주주의를 욕하지는 않는다. 대신 정당과 정치인을 야유하는 것으로, 민주주의가 가진 힘을 빼려는 것이 그들의 상습 작전 같은 것이다.
2) 정당도 당연히 이익을 추구한다. 정당도 선거 승리와 관직 등 다른 정당과 경쟁해서 얻고자 하는, 배타적인 조직 이익을 추구한다. 공직 후보자를 결정하는 공천 과정이 정당 활동 가운데 가장 격렬한 갈등의 원천이란 점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러나 이익집단 내지 압력집단과는 달리 정당은 공익 추구를 존재 이유 내지 규범성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다른 이익 추구 조직과 차이가 있다. 조직 이익을 추구하는 정당과 공적 이익을 추구하는 정당? 서로 배치되는 정의 아닌가? 천천히 생각해보자.
3) 현실의 정당정치가 “공익의 내용을 둘러싼 경쟁”으로 정의될 수 없다면, 그때의 정당은 파벌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 정당이 공익을 추구하는가 혹은 공익 추구가 정당의 진정한 의도이자 목표인가를 따져 묻는 반론은 현실성이 있다. 그러나 사익 내지 조직적 이익의 극대화를 내걸고 경쟁하는 정당은 거의 없고 그럴 경우 의도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는 점도 현실성이 있다. 따라서 정당은 공익의 내용과 방향을 정의하는 것에서 대중적 설득력을 갖는 방법을 통해 조직적 사익을 획득하는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4) “정당은 정책 실현을 위해 선거에서 승리하고자 하는가?” 아니면 “정당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책을 만드는가?” 이 질문은 한때 정치학계 안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적절히 답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분명 정당은 선거 승리를 목표로 하고 더 많은 관직을 추구하는 조직이다. 이는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정당의 구성원들을 넓게 통합해낼 수 없고 선거 경쟁에서도 정당한 이유를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도 정당 구성원이 열정적으로 동의하고 다수의 유권자들이 지지할만한 정책을 잘 만들고 실천해야 한다. 현대 정당론의 대가 사르토리는 이를 “비현실의 현실주의”라고 불렀는데, 참으로 멋진 정의가 아닌가 싶다. 개별 정당이 사익과 조직적 이익을 추구하고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정책을 만든다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도 공익적 목표와 병행하게 하는 내용으로 정당의 목표가 정의되어야 하며, 또 그들 사이의 경쟁이 공익이라는 결과에 객관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에 정당은 이익집단과 다른 것이다.
5) 앞서 말한 대로 정당은 공익 추구를 정당성의 기초로 삼아 권력을 추구한다. 그러나 공익의 내용을 정의하는 역할은 반드시 정당만이 아니다. 언론도 지식인도 그렇고 (우리의 경우 참여연대 같은) 시민운동 등도 그러려 한다. 공익을 넓게 정의하면 문제는 더욱 더 복잡해진다. 사회적 유익함을 추구하는 많은 사회집단도 있고 이익집단도 공익을 내걸 수 있다. 활동하는 방식으로 보면 교회나 노동조합, 사회운동 단체 등과 정당이 유사한 점은 많다. 그러나 이들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려 하거나 통치 집단이 되기를 지향하지는 않는다.
물론, 집권을 통해 국가권력을 통제하려 한다는 기준 역시 정당과 정당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무장 단체나 혁명세력 등도 국가권력의 장악을 추구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절차적 정의를 수용하느냐 여부를 고려하면, 이들을 정당의 유형으로 포함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있다. 이와 관련된 법률 내지 규범적 기준의 높고 낮음은 해당 나라의 역사적 경험에 따라 다르다. 독일처럼 공산당이나 나치당의 정치활동이 법의 힘으로 제어되는 곳도 있고, 이 점에서 한국 역시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아무튼 사회운동단체의 집권, 종교집단의 집권, 무장세력의 집권 등은 민주주의와 원리적으로 충돌한다는 점에서 정당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 스스로 시민의 주권을 위임받고자 하는 선거 경쟁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6) 다른 이유에서도 집권을 지향하는 것이 정당과 정당이 아닌 것을 정의하는 기준으로 충분치 않다. 정당 가운데는 집권과 무관하게 자신들의 이념이나 가치 신장을 위해 활동하는 작은 정당들도 있다. 또한 정당만이 국가권력에 대한 배타적 접근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직 후보를 내는 문제에서도 정당의 독점은 허용되지 않는다. 사실 정당법이 없다면 다양한 형태의 정치 단체들도 자유롭게 후보를 낼 수 있다. 정당과 정당이 아닌 것을 선관위처럼 국가기구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 정치단체 스스로가 결정하면 된다는 뜻이다. 정치 단체가 아니더라도 무소속 출마를 금지하는 사례도 거의 없다. 우리의 경우를 보면 3공화국 때가 유일한 사례가 아닌가 한다.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택하고 있는 경우 명부를 내지 못하는 무소속은 의석 분배를 받을 수 없긴 하지만, 대개의 경우 명부를 제출할 수 있는 요건에 있어서 진입장벽이 매우 낮고, 정당을 결성하는 진입장벽 역시 매우 낮다.
7) 정책 차원에서는 정당 이외의 단체나 조직도 국가권력에 다가갈 수 있다. 예컨대 해당 이해당사자들이 특정 정책 의제를 매개로 국가권력의 범위 안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공동통치영역(condominium)"을 설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사정 위원회도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고, 실업보험을 노조에게 위임해 관리하게 하는 스웨덴의 겐트시스템(Ghent system)도 유사한 예라 하겠다. 요컨대, 다수지배의 원리에 의해 결정되는 국가권력의 최종적 주권의 문제는 누가 집권당이 되느냐를 둘러싼 것이 될 수밖에 없지만, 특정 정책 등 ”부분 체제(partial regime)“에서는 (다수지배의 원리와는 다른) ”이해당사자 민주주의“ 내지 ”코포라티즘“이라고 불리는 노사정조합주의를 실천할 수 있다.
8) 복잡해 보이지만, 이상에서 말하려 한 것은 단순하다. 정당은 무엇이고 또 무엇이 아닌가 하는 문제는 배타적으로 명료하게 구분되기 어렵다. 정당이 아닌 조직 내지 집단과 중첩되는 폭넓은 영역도 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정당은 그것이 가진 애매함과 중첩성 때문에, 민주주의에서 이른바 “결사체 중의 결사체”가 될 수 있었다.
정당이 가진 그러한 중첩적 특징 때문에 정당은 사회에도 있을 수 있고 국가에도 있을 수 있고 언론에도 있을 수 있고 학교에도 있을 수 있고 교회에도 있을 수 있다. 정당은 작은 규모의 사적 결사체일 수도 있고 관료화된 큰 조직일 수도 있고, 특정 사회집단의 이익을 촉진하는 정치단체일 수도 있고, 집권해 정부가 되어 공공 정책을 통제하려는 “대안 정부”일 수도 있다. 이게 정당이고, 그래서 정당인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정당이 중요한 것은 정당만이 할 수 있는 배타적 역할이나 기능 때문이 아니라,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 사이에서 나아가 시민사회와 국가 사이에서 가장 폭넓은 매개자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다변적인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9) 자율적 결사체, 조직적 이익을 갖는 단체, 권력을 추구하고 선거에서 승리하고자 하고 관직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 등등 정당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았는데, 그렇다고 정당이 특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정당이 된 사회적 정체성에는 지역도 있고, 종교도 있고, 언어도 있고 계급도 있었다. 그밖에 정당이 될 수 있는 사회적 요소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정당이 된 순간 이들은 자신의 지기기반 내지 정체성에 기초를 두는 문제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정치체제로부터의 압박”을 경험하게 된다. 정당은 성장할수록 정치체제 전체의 운명에 대해 책임 있는 결정을 회피할 수가 없다. 이 점에서 “정당 정치체제(party polity)"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자율적 결사체가 정당이다. 정치체제 전체를 감당할 수 있는 자율적 결사체는 정당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 어떤 정당도 자기 정파만의 무한 이익을 추구해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어찌어찌해서 살아남는다 해도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이익집단이나 정파 조직과는 달리, 통치 집단으로서의 책임성이나, 공익추구 집단으로서의 규범성 등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은 오로지 정당만이 직면하는 제약이다. 단기적으로는 모든 것이 다 정당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장기적으로 살아남는 것은 그런 보편성에 기초를 두는 정당일 수밖에 없다. 정당은 분명 사회를 구성하는 특정 부분의 이익과 열정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그런 정당의 성장 여부는 “우리가 다른 정당에 비해 공익에 더 잘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동료 시민들에게 얼마나 잘 어필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기에 그렇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에서 정당은 특별하다.
10) 정당을 법률적인 문제로 보는 사람들은 아마 이상과 같은 정당의 정의를 못마땅해 할지 모른다. 그들은 정당이 아닌 것을 명확히 해서 법으로 배제할 수 있는 분명한 기준을 못 만들었다고 짜증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정당이란 시민 집단 스스로 조직할 수 있는 정치적 권리의 결과물이다. 정당과 정당이 아닌 것은 시민이 결정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필요하다면 정당을 만들면 되고, 그 정당의 필요성을 공감하지 못하는 동료 시민들은 선거로 심판하면 된다. 프랑스의 정당은 몇 개일까? 글쎄, 한 2백 개 된다고 해도 될 것이다. 누구든 정치단체 만들고 공직 후보 출마시키면 정당이지 달리 더 필요한 게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게 자기들 맘대로 해도 되나?” 아마 지금의 정당법을 지키려는 우리의 법률가라면, 특히나 헌법재판관들이라면, 그렇게 물을지 모르겠다. 그들을 실망시키겠지만, 그렇게 시민 맘대로 하면 된다. 조직적 사익을 추구해도 되고, 그들 내부에서 공천을 민주적으로 하든 말든 그건 그들 스스로 알아서 하면 된다. 다만 그들이 선거에서 표를 얻고 당선되고 당의 세를 늘려 공적 결정에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동료시민들이 결정한다. 이 모든 게 시민들의 권리이고, 이게 정당이고, 이게 민주주의다. 뭐가 더 필요한가?
11)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정당법은 정말 빨리 개정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런데 모두들 개헌처럼 큰 문제에만 숟가락 얹으려고 하면서, 가장 기초적인 정치관계 법률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정당이나 정치인들을 보기 어렵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부디 이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갖는 정당과 정치인들이 많아지길 기대하면서, 오늘 강의를 마친다. 다음 시간에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