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정당 정치의 원리와 역사
17강. 정당정치의 역사 1 : ① 입헌주의 ② 대의제와 선거
2월 10일, 박상훈 학교장이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 |
1) 17번 째 시간이다. 지난 시간까지는 정당정치를 발전시키는 일과는 배치되는, 일종의 정당정치에 대한 도전적 비전을 살펴보았다. 정당의 후보를 당당하게 말하기보다는 국민의 후보를 앞세우는 것(15강), 이해당사자와의 갈등과 타협 속에서 “대안의 조직자”로 역할하기보다는 전문가를 앞세워 마치 최선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듯이 말하는 것(16강), 듣기만 좋은 막연한 시민 참여나 직접 민주주의를 앞세우는 것(14강)이 그것이다.
이를 비판했던 지난 강의 내용이 얼마나 수용되고 있는지 정말로 궁금하다. 우리의 정치문화가 지나치게 차이와 갈등을 싫어하고, 제도와 절차에 따른 지루한 과정보다는 빠른 해결을 급하게 요구하는 국가 중심성이 강하며, 전문가를 과도하게 우대하는 엘리트주의적 정향을 갖기 때문이다. 좀 더 친절하게 자세히 설명했어야 했나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사실 그런 불충분함 내지 부족함을 존중해야 하는 게 인간의 현실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니 오늘도 본 강사는 예정된 길을 그냥 가겠다(웃음).
2) 오늘부터는 정당이 민주정치의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 역사적 대전환 과정을 개념사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① 입헌주의, ② 대의제와 선거, ③ 결사의 권리, ④ 갈등과 싸움을 이해하는 방법, ⑤ 보통선거권과 대중정당, ⑥ 파당적 참여와 사회통합, ⑦ 혁명적 좌파와 정당 정치가 그것인데, 오늘은 대의제와 선거까지만 살펴보겠다.
3) “입헌주의와 초기 정당의 출현” : 현대 민주주의의 형성과정에서 정당의 등장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전환은 입헌주의와 의회주권을 확립하고자 하는 일이었다. 이는 통치권에 대한 정당화의 원리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즉, 군주정이나 귀족정에서처럼 혈통이나 가문의 원리가 아닌 헌법의 규범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고, 그런 규범은 입법권을 가진 의회에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명예혁명을 들 수 있다.
이 시기 초기 정당의 모습은 어땠을까? 국왕과 의회의 대립 과정에서 궁정당(court party)과 대립했던 세력들이 내세운 나라당(country party)은 흥미로운 예가 될 수 있다. 이들은 궁정당와 대립하면서 정당의 중요성을 자각했지만, 이들 역시 정당으로서 나라당의 역할은 궁정당을 물리쳐 정당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모든 국민의 나라를 만드는데 있다고 생각했다.
좀 더 대표적인 사례는 토리와 휘그였다. 입헌주의의 기초 없이 정당 정치가 시작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 민주적 정당 정치가 바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토리와 휘그라는 명칭은 서로에 대한 경멸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용어였다. 휘그는 스코틀랜드 게일어에서 유래한 “말 도둑”을 의미한다. 토리는 아일랜드어로 “무법자”를 뜻한다. 정당이란 더 나은 사회운영의 원리나 이념, 가치를 뜻하는 것인데 비해, 당시는 그런 의미의 정당으로서가 아니라 상대를 부정하는 언어로 싸웠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정당에 대해 최초로 보편적인 정의를 내린 사람은 19세기 중엽 활동했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년 ~ 1797년 )인데, 그는 정당을 “여러 사람들이 모두 동의하는 어떤 특정 원리에 입각해서 그들의 합치된 노력을 국민적 이익에 헌신하고자 결합된 집단”이라고 정의했다. 한마디로 말해 보편적 원리가 있어야 하고 비록 시민 집단의 부분을 결집한 조직이라 할지라도 사회 전체에 기여할 수 있어야 정당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명예혁명을 전후한 시기의 정당은 여전히 귀족과 부르주아의 명망가들로 이루어진 명사정당 내지 네트워크정당(연줄정당)이었고, 일반 시민대중에 대한 책임정치의 채널도 없었다. 엄밀히 말해 아직 정당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기에 프랑스 출신 정치이론가 베르나르 마넹(Bernad Manin)은 이를 "정당정치 이전의 대표 체계“를 뜻하는 말로 ”의회주의(parliamentarism)“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말해 ”정당 정치 없는 대의제“라고 할 수 있겠다. 요컨대 입헌주의는 ”의회에 책임지는 내각“이나 ”왕의 충성스러운 반대당(loyal opposition)“ 등 정당의 등장을 가능케 하는 관념적 조건을 가져다주었지만 그것으로 정당이 정치의 중심이 된 것은 아니었다.
4) “대의제와 민주주의” : 앞서 말했듯, 입헌주의와 짝을 이루는 변화는 대의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참여와 대표 없이 공공정책에 대한 복종의 의무는 없다” 라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직접민주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현대 민주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대의제는 의심의 대상인 적이 없었다. 선거가 귀족정적인 제도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추첨제를 주장한 적이 없었듯이 말이다. 영국의 수평파나 프랑스 혁명파 모두 자신들의 대표를 대의제에 보낼 권리를 주장했지, 대의제 폐지를 추구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는 고대 민주주의와는 사실상 아무런 연장선을 갖지 않는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그 어떤 철학자도 민주주의를 옹호한 적이 없었고, 혁명파들이 내세웠던 것도 공화정이었는데, 그런데도 현실의 변화는 점차 "democracy"나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단어인 “democratical" 같은 말로 정의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미국 민주주의의 설계자라고 할 수 있는 제임스 매디슨의 경우만 보더라도, 자신들이 만들고자 하는 것은 공화정이라고 하는 “대표의 체계(representative system)”이며, 민주정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선동에 취약한 "다수의 전제정(tyranny of majority)"을 낳을 거라고 생각했다. 파당을 만들고자 하는 열정은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해야 파당이 만들어내는 유해함을 통제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조지 워싱턴 역시 초대 대통령 고별사에서 "정당 정신(party mind)"이 국가를 분열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공화정과 민주정은 유사한 의미로 병행 사용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매디슨은 헌법을 만들 때 자신이 했던 말과는 달리 그 뒤 현실 정치에 참여하면서는 미국 최초의 정당을 만든 사람이 되었다. 그 정당의 이름을 "민주공화당(Democratic Republican Party)"이라고 함으로써 “민주”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 역시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결국 현대 민주주의와 정당은 그 어떤 정치철학적 옹호자도 기획자도 없었지만, 현실 속에서 자신을 뚜벅뚜벅 형성해 갔다고 할 수 있다.
5) 이상의 논의를 좀 더 현실적인 맥락에서 다시 살펴보자. 당혹스럽게 들릴지 모르나, 선거 그 자체는 민주적인 제도가 아니다. 애초 선거는 귀족정을 뒷받침했던 대표 선발 제도였고, 순수 제도론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엘리트 편향적인 효과를 가진다. 투표자와 선출된 자 사이에 아무런 매개 없이 선거가 치러진다면 특출한 후보가 선호되고 그런 특출함은 교육과 재산 등의 이점을 통해 만들어진다. 엘리트(elite)라는 말이 선거(election)와 같은 어원을 갖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대의제 역시 그 자체로 민주적인 제도가 아니다. 대의제의 역사적 기원은 중세에 있다. 그렇기에 당시의 역사 속에서 삼부회나 신분의회와 같은 대의기구는 물론 선거를 통해 뽑히는 왕 내지 그런 왕을 뽑을 권리를 가진 선제후의 사례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런 대의제와 선거가 민주적인 제도가 된 것은, 귀족이 아닌 가난한 보통사람들도 자유롭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 후였다.
6) 그렇다면 입헌주의, 의회주권, 대의제, 선거 등의 원리가 새롭게 제도화되는 과정이 결국 정당이 중심이 되는 정치로 귀결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우리가 관심을 갖는 이 문제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는데, 그러나 아직 좀 더 살펴봐야 할 근대적 전환이 있다. 그것은 결사의 자유와 갈등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했음을 말하는 것인데, 이 문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럼 다음 시간을 기약하면 여기서 17강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