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정당 정치의 원리와 역사
16강. 정당정치에 대한 도전 3 : 전문가주의
2월 초, 박상훈 학교장이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 |
1) 16번째 시간이다. 얼마 전 한 수강자로부터 여러 질문을 받았다. 우선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강한 정당을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런데 강한 정당 그러면 국가주도 정당이 먼저 떠오른다. 선거에 직접 참여해보면 정당 같은 정당은 새누리당밖에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의석수도 많고, 정부를 통제하는 집권 정당 이미지도 있는 새누리당이 강한 정당 아닌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질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히 답하고 시작하겠다.
2) 우선 새누리당은 강한 정당이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 강한 정당은 없다. 강한 정당은 정당으로서 기대되는 역할을 잘해서 대중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는 정당을 말한다. 정부를 이끌 수 있을 만큼 실력 있는 집권당, 행정부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유능한 야당, 사회 속에 다양한 형태의 조직적 기반을 가짐으로써 일상의 시민 삶을 보호하는 생활 지킴이 정당, 당직자들의 얼굴에서 열정과 자부심이 느껴질 정도로 잘 질서 잡힌 정당, 당원과 지지자들이 함께 참여하면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공동체 같은 정당이 강한 정당이다. 어느 하나 맞아 떨어지는 정당이 있나? 야당은 말할 것도 없다. 기준에 턱없이 모자란다.
새누리당은 청와대에 종속적인 위성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강해보이는 것은 국가가 가진 권력 자원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특권 때문이다. 일상의 삶 속에서 새누리당 당원임을 떳떳하게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사회적으로는 자율적 기반이 매우 약한 정당이다.
3) 수강자의 질문은 다시 이어졌다. “국가의 권력 자원을 독점할 수 있는 정당도 강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럴 경우 강한 것은 국가이지 당은 아니다. 흔히 전체주의 국가의 정당체제를 일당제라고 하는 데 사실 정확한 규정은 “당-국가 체제”이다. 당이 사회를 동원할 능력을 갖고, 그 위에 국가를 세운 경우를 말한다. 당이 확장된 것이 국가이므로 이 경우는 당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민주적으로 강한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적으로 강한 경우라고 표현해야 정확할 것이다.
우리나라 집권당은 역사적으로 국가에 종속된 부속물이었을 뿐, 사회적으로 강했던 적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집권당이지만, 청와대라는 대통령 비서조직들에게 늘 휘둘려 책임 정치를 할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새누리당도 사회적으로 자신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 집권당으로서 책임 정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내각은 집권당이 주도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게 되어야 당정협의라는 책임 정치의 틀을 갖출 수 있다.
4) 수강자는 다시 질문했다. “사회적인 기반이 튼튼한 강한 정당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런 강한 정당이 만들어진다면 그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 체제가 갖는 좋은 점은, “사회 속에 뿌리내린 정당은 강할수록 덜 권력적이 된다”는 데 있다. 정당이 사회 속에 뿌리를 더 깊고 넓게 내릴수록 국가권력은 지배나 강제의 특징보다 공적 기능의 측면을 더 많이 갖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웨덴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예컨대 스웨덴 사민당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수정하고 관리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정당이지만, 특권이나 강권력과는 거리가 먼, 공익에 봉사하는 기능집단 같다. 지금 우리의 경우 국가가 너무나 강한 원인 중의 하나는, 정당이 약해서 국가를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이 국가의 후원 아래로부터 나와 사회적으로 더 튼튼한 기반을 가져야 민주적 보수정당이 될 수 있다.
5) 이것으로 질의응답이 더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마 이상의 설명으로도 충분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강한 정당의 문제는 3부 강의에서도 다시 이야기될 것이니,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하자. 더 늦기 전에 본래 오늘 하기로 한 강의 내용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현대판 귀족정의 논리라 할 수 있는 전문가주의를 정치가들이 너도 나도 앞세우는 것을 좀 차분히 살펴본다. 앞서 현대판 군주정의 논리를 살펴보면서 오늘 다룰 주제도 많이 이야기되었기에, 짧게 끝내겠다.
6) 보통 사람들의 판단을 불신하면서 전문가가 정치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우리의 정치 현실을 돌아보더라도, 전문가주의의 강력한 영향력은 금방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최근의 한국 정치야말로 전문가 전성시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대중 참여의 기반이 급격히 축소되면서 정당들마다 전문가라는 이유로 공천을 주는 사례가 급격히 늘었다. 대선 때만 되면, 캠프들은 전문가 영입 경쟁에 내몰린다. 전문가들이 정책을 만든다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일로 분주하다. 집권 뒤에도 정책은 정치인이 아니라 전문가에게 맡길 것이며, 대통령의 역할은 행정적 대표 기능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7) (앞서 살펴본 철인 왕 내지 수호자와 마찬가지로) 전문가가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이익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실현할 도덕성을 갖추고 있으며, 모두에 대해 평등한 배려의 원칙을 완전하게 준수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라면, 전문가에 의존하는 정치가 시끄러운 민주정치보다 우월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가정은 현실이 될 수 없다.
전문가란 누구일까. 그들은 <절반의 인민주권>의 저자 샤츠슈나이더가 말하듯 “어느 한 분야에 관해서는 전부를 알고자 하면서도 그 밖의 많은 것들에 대해서는 무지하기로 작심한 사람들”이다. 대개는 집안에서 “자기 일 이외는 도대체가 할 줄 아는 게 없어!”라는 핀잔을 자주 듣는 존재들이다. “자기 분야만 편협하게 많이 아는 존재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8) 그들은 잘못된 신념의 노예가 되기 쉽다. 미국의 수학자 J. C. 케메니는 원자력 문제에 관한 대통령 자문위원장 직을 마친 후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다. “나는 계속해서 종교적 믿음 내지 때로 광신적인 믿음을 가진 과학자들과 싸웠다. 그들은 단지 약간의 가능성밖에 없음에도 틀림없다고 말함으로써 편견 없는 조언자가 아니라 편견의 옹호자가 됐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와튼스쿨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전문가들의 예측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검증해 본 것으로 유명한 J. S. 암스트롱 교수 역시 “놀랍게도 나는 전문가들이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연구를 발견할 수 없었다.”라고 결론 내린 바 있다.
9) 도덕적 능력이라는 측면에서도 전문가가 보통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말하기 어렵다. 미국 독립선언문 작성에 참여했던 토머스 제퍼슨은 이렇게 말했다. “도덕적 사건을 농부와 교수에게 말해 보라. 농부는 교수만큼이나 혹은 때로 교수보다 더 훌륭하게 판단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문가와 달리 농부는 인위적인 규칙에 의해 혼란에 빠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육군장관을 지낸 정치가 클레망소는 “전쟁은 너무 중요해서 장군들에게 맡겨 둘 수가 없다.”라는 유명한 격언을 남겼는데, 그의 말을 변용한다면 ‘국가 정책은 너무나 중요해서 전문가들에게만 맡겨 둘 수가 없다.’라고 결론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10) 민주주의는 시민 참여의 효과에 기초를 둔 체제이지, 통치자의 전문적 자질에 기초를 둔 체제가 아니다. 정치 참여를 통해 소수만이 아니라 다수가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시민으로 행동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희망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했듯이 그것은 소수의 탁월함에 의존하는 공적 결정보다 다수에 의한 결정이 공동체에 더 유익하다는 믿음 위에 서있다.
오해의 여지가 있어 강조하지만, 민주주의는 전문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전문가를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당연히 아니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현대 민주주의는 전문가와 대중이 서로 협력적인 역할을 주고받는 체제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민주주의에서 그들의 역할은 일반 시민의 역할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정당으로 조직된 일반 시민의 집합적 지혜를 뒷받침하는 데 기여할 때 가치를 갖는다. 정당도 엄밀히 말하면 정치 전문가들이라 할 수 있다. 그 안에서도 다양한 정책 전문가와 선거 전문가, 조직 전문가, 홍보 전문가들이 역할을 해야 한다. 전문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정당과 무관하게 초당적인 전문가들에게 행정을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는 전문가“주의”가 문제라는 점을 다시 강조하면서 오늘 강의를 마친다.
다음 시간부터는 정당 정치가 역사적으로 발전하고 정당화되었던 과정을 주요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오늘 강의를 마친다. 모두들 수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