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정당 정치의 원리와 역사
15강. 정당정치에 대한 도전 2 : 국민후보론
2월 초, 박상훈 학교장이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 |
1) 15번째 시간이다. 오늘은 정당의 후보가 아닌 “국민 후보”를 앞세우는 경향에 대해 살펴본다. 국민 후보를 말하는 것이 반드시 정당을 부정하거나 뭔가 나쁜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좀 더 사회를 넓게 대표하고자 하는 선의를 가진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사에서 늘 문제는, 좋은 의도가 가져온 나쁜 결과들이다. 엄밀한 논의가 필요해 이론적인 차원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보겠다.
2) 민주주의를 중우정(衆愚政)이라 야유하거나 기득권을 둘러싼 파당 싸움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반 대중과 정치의 접촉면이 늘수록 부정과 부패만 양산된다고 생각하거나, 정당을 유권자 눈치만 보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일수록 “정당의 후보”가 아닌 “국민의 후보”를 앞세우며 국민 모두를 위한 수호자의 비전을 앞세운다. 이때 국회와 정당의 역할은 정쟁 대신 협력을 통해 입법적 뒷받침이나 하는 것으로 한정된다.
2014년 초에 세상을 떠난 20세기 최고의 민주주의 이론가 로버트 달(Robert A. Dahl)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주도하는 민주정치를 옹호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논리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는데, 그가 집중했던 주제는 ‘수호자주의’(guardianship)다. 그것은 대중의 변덕이나 파당적 경쟁에 휘둘리는 민주정치가 아니라, 공동선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소수의 능력자들에게 통치를 맡겨야 한다는 주장을 말한다.
3) 달은 수호자주의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이라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모두를 위한 최고의 선을 이해하고 실현하는 플라톤의 ‘철인 왕’(philosopher king)이 있다. 아마도 세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그런 수호자주의는 민주주의보다 더 우월한 체제일 수 있다.
4) 첫째,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이익을 발견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진 소수의 능력자가 있다. 둘째, 그들은 모두에 대해 평등한 배려의 원칙을 준수할 수 있는 도덕적 덕성을 갖고 있다. 셋째, 이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도구적 지식을 그들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달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① 우선 공공선이 무엇인가는 논쟁적인 문제일 뿐, 그 누구도 논란의 여지가 없는 제안을 할 수 없고 그럴 지식을 갖출 수도 없다. 공적 문제에 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혜와 이성적 사고 사이에 있다. 민주주의란 그 사이에 있는 다양한 주장들 사이에 공적 토론과 정당한 절차를 통해 불완전하나마 합의를 형성해 가는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보통 사람들의 지적 능력과 책임성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고, 소수의 수호자나 전문가에 비해 못하지 않다는 것을 그간의 인간 역사가 실증하고 있다.
② 만인을 평등하게 배려하는 수호자의 도덕적 선의가 지속될 수 있다거나, 그들의 덕성을 믿고 따르면 시민들 모두가 최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 역시 허구이다. 수호자가 가진 절대 권력은 그를 부패하게 할 수 있다. 그게 인간이다. 개개인의 이익을 모으는 문제와 공공의 이익을 나누는 데 있어서 모두에게 최선일 수 있는 합리적 대안도 있을 때보다 없을 때가 더 많다. 존 스튜어트 밀이 말했듯, 누구든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옹호할 수 있을 때에만 무시되지 않는다. 따라서 수호자의 덕성에 의존하는 것은 불합리하기도 하고, 그것은 또한 시민들이 자율적 통치 능력을 키울 기회도 억제한다.
③ 전문성과 같은 도구적 지식으로 공동체를 운영할 수 있으려면 그것이 규범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분야별 전문 지식과 판단들 사이에 충돌도 없어야 한다. 핵무기 정책에서 볼 수 있듯, 전문적 기준으로도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사안은 많다. 한 분야에서의 합리적 결정이 다른 분야에서는 파멸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역사상 가장 위험한 선택은 보통 사람들의 시민권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 체제에서 내려진 불완전한 결정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불완전한 체제에서 소수의 권력자와 전문가들에 의해 내려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5) 수호자주의는 소수에게 공적 문제를 다룰 자유를 주는 반면,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그 자유를 누리면서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시민으로 행동하는 것을 배울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선택하는 윤리적 기초는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구든 좋은 정치가가 되려면 민주주의자로서 그러해야 하지 국민 모두를 위한 수호자가 되고자 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6) 한때, 국민은 권위주의의 언어이며, 따라서 국민이라는 말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동의를 얻었던 시절이 있었다.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권위주의 대통령의 담화를 보고 들었던 본 강사와 같은 세대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 이제 모두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국민을 앞세우는 세상이 됐다. 국민 배우, 국민 MC, 국민 여동생 등등 대중문화에서 “접두사 국민”이 무차별적으로 사용되는 것도 듣기 불편한 일이지만, 가장 괴로운 것은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정치인들이 언제부터인가 국민 담론을 즐겨 사용한다는 데 있다.
아마도 그것은 오늘의 민주정치가 유권자 속에서가 아니라 유권자 앞, 아니 언론 앞에서 마치 대형 쇼처럼 이루어지면서 심화된 현상인 듯하다. 각 후보 진영의 담론을 보면 국민이라는 용어가 얼마나 자주 사용되는지를 금방 알 수 있는데, 그렇듯 상투어로 자리 잡은 국민 홍수 시대에 이른바 시민 주권이라는 민주적 이상이 얼마나 공허한 것이 됐나를 생각하게 된다. ‘국민 여러분께서’라는 후보들의 말을 듣는 순간 본 강사는, 계층과 지역 나아가 이념과 가치를 달리하는 사회집단으로서 시민의 구체성이 조각처럼 부서져 무정형의 투명한 빛 속으로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7) 물론 국민이라는 말을 안 쓸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가 국민국가라는 정치 단위에 기초를 두고 있기에 다른 말로는 대체될 수 없는 존재 이유가 있고 또 필요한 용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국민이라는 말이 무차별적으로 과용되면서 민주정치의 다른 언어들이 왜소화되거나 사라지고 있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국민이라는 표현은 절제되고 줄어드는 것이 정상인데, 그 반대의 경향이 점점 커져 어느덧 ‘국민’이 우리 정치를 지배하는 언어가 됐다.
나아가 정당과 후보가 대표하는 국민이란 마치 케이크 조각처럼 나뉜 여론조사 지지율 숫자로 획일화됐다. 모두가 더 큰 케이크 조각(여론조사 지지율)을 받아야 한다며 연신 “국민 여러분”을 외쳐 대는 게 오늘날의 선거가 돼버렸다. 그 속에서 정치는 기존 미디어든, 뉴미디어든 “매개된 추상의 영역”에 있을 뿐, 시민 생활과는 거의 완벽하게 유리돼 있다. 영세 인쇄업자들에게 일감이 됐던 그 많던 유인물들도 사라졌고, 후보자와 유권자 사이를 연결하는 그 많던 모임들도 이제는 볼 수가 없게 됐다. 시민 생활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선거의 “분배 효과”가 사라지면서, 선거 때문에 불경기가 되고 장사가 안 되는 이상한 일이 나타나고 있다.
8) 앞서도 강조했지만, 민주주의란 “부분(들)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집단적 갈등과 차이, 열정들이 몇 개의 “부분(part)”으로 조직될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이 공익을 둘러싼 경쟁을 통해 사회를 통합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 부분들을 가리켜 정당(party)이라고 하며, 그런 복수의 정당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체제를 구분한다. 중국이나 북한 사회주의가 제아무리 "인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하고, 과거 군부정권들이 "민족"과 "국민"을 소리 높여 외쳐도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집단적 차이와 열정, 그리고 그것에 기반을 둔 파당적 경쟁이 정치의 과정을 활력 있게 만들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그 가치에 맞게 기능하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일수록 갈등적이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 이견?차이?토론?경쟁을 민주주의의 엔진이라고 부르는 것은 절대 빈말이 아니다. 그런데 국민을 앞세워 그런 차이를 초월할 수 있는 어떤 "일반 의지"가 있는 듯이 말하고, 정당과 같은 조직화된 의견 집단의 공익적 역할을 폄훼하면서 국민이 직접 공천하고 국민이 직접 정치하면 좋을 듯한 환상을 자극하고, 마치 국민과의 소통을 잘하면 모두를 위한 공익을 거저 실현할 수 있을 듯이 말하고, 사회 갈등을 표출하고 조직화하는 것을 집단 이기주의라고 비난하고, 토론과 논쟁 대신 콘서트를 하고,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시대 정신"을 너나없이 앞세우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정치가 되고 말았다.
9) 모두가 국민을 앞세우지만 그때의 국민은 선량한 백성이나 민원인 아니면 소비자 이상이 될 수 없는 이런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국민이 선출하니 민주주의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본 강사는 이를 군주정이나 귀족정에 가까운 민주주의 혹은 파시즘적 충동이 스멀스멀 불러들여지고 있는 민주주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주권자로서 보통의 시민을 더 깊고 넓게 소외시키고 있는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불러야 하는 일이 더는 지속되지 않았으면 한다.
이상으로 오늘 강의를 마친다. 수강자 여러분들만큼은 너무 국민, 국민 안 했으면 한다(웃음). 다음 시간엔 현대판 귀족주의라 할 수 있는 “전문가주의”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수고들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