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정당 정치의 원리와 역사
11강. 정당 활동가가 가져야 할 민주적 자부심
1) 11번째 시간이다. 이제 2부 강의를 시작한다. 2부는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당 내지 정당정치가 차지하는 위상”을 한편으로는 원리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사실 숨겨진 목표는 “안팎의 수많은 도전 속에서 민주적 정당정치론을 옹호하는 것”에 있다(웃음). 이를 위해 본 강사가 알고 있는 정치학 이론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생각인데, 그런 점에서 조금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치 있는 것일수록 거저 얻어질 수는 없는 법이니, 2부 강의에서도 부디 인내심을 발휘해주길 바란다.
참고로 2부 전체의 강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1강. 정당 활동가가 가져야 할 민주적 자부심 / 12강. 정당은 현대 민주주의의 챔피언 / 13강. 현대판 호민관으로서 정당 / 14강. 정당정치에 대한 도전 1 : 시민정치론 / 15강. 정당정치에 대한 도전 2 : 국민후보론 / 16강. 정당정치에 대한 도전 3 : 전문가주의 / 17강. 정당정치의 역사 1 : ① 입헌주의 ② 대의제와 선거 / 18강. 정당정치의 역사 2 : ③ 결사의 자유 ④ 갈등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 / 19강 정당정치의 역사 3 : ⑤ 보통선거권과 대중정당 ⑥ 파당적 참여와 사회 통합 ⑦ 참여에서 조직화로 / 20강. 정당정치의 역사 4 : ⑧ 좌파와 민주주의 그리고 정당
2) 오늘은 서론 격으로 사회운동가/시민운동가가 아닌 정당활동가로서 가질 수 있는 “민주적 자부심”을 이야기해보겠다.
3) 이른바 “운동에 복무하는 사람들”이 정당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을 들을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대개는 운동을 하는 것이 “좀 더 순수한 일”일 뿐 아니라 “민주적으로 우월”한 반면, 정당 정치는 권력 지향적인 사람들이 하는 “뭔가 민주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정당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그런 주장을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고 본다.
민주화 이전 권위주의 시절이라면 운동이 보다 더 민주적인 실천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이후에는 정당 정치가 민주주의의 중심이며, 따라서 정당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 스스로부터가 민주주의의 중심에서 활동하고 있음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4) 민주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평등한 시민 참여” 위에 정초하는 것을 말한다. 누가 정부를 운영하고 공공정책을 결정할 정치권력을 행사하는가? 정당한 절차에 따라 시민주권의 위임을 받은 정당이다.
선출된 개인이 통치하는 것이라면 과거 중세 때도 있었다. 왕을 선거로 뽑는다고 민주주의는 아니다. 민주주의는 “공동체를 어떻게 이끌겠다는 특정한 의견을 가진 시민들의 집합체”로서 정당이 시민 다수의 지지를 얻고자 자유롭고 평등하게 경합하는 것이 가능한 정치체제를 말한다. 종교적 명령도, 특별한 혈통을 가진 가문의 권위도, 시민주권 위에 설 수 없는 것이 민주주의다. 행정관료제보다도, 또 법치의 힘보다도, 선출된 대표가 우위에 서는 문민통치(civilian control)라는 원리가 자리 잡아야 하고, 그럴 때 그 위에서 민주주의 정치과정을 정당성 있게 만드는 것이 정당이다.
5) 시민 개개인이 모두 참여해 논의하고 정부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은 민주 정치의 현실이 될 수 없다.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시민이 광장에 모여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공적 논의와 공적 결정을 할 수 있다는 망상을 가질 수는 없다. 국가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거대한 조직 - 예컨대 관료제와 법인기업으로 대표되는, 행정 권력과 경제 권력 - 이 작동하는 현실에서, 이들이 만들어내는 불평등의 효과를 제어하고자 한다면, 시민 권력 역시 조직되지 않으면 안 되는 데, 그것이 정당이다.
강한 정당이 없다면 시민은 시민이기 이전에 행정 권력의 선처를 바라는 “민원인”이거나 시장 권력에 휘둘리는 무기력한 “개인 소비자” 이상이기 어렵다. 재산과 교육 자원이 큰 중산층 이상이라면 모를까, 대다수 가난한 보통 사람들은 더더욱 타인의 온정에나 의존하게 되는 사회 약자로서의 지위를 벗어날 수가 없다.
6) 물론 사회운동/시민운동도 시민 참여를 조직하고 정치체제에 다양한 요구와 압력을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운동으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다. 운동으로 정부를 이끌어 갈 수 없다. 운동으로 시장경제체제와 사법질서를 운용할 수 없다. 운동으로 정치 과정 밖에서 불만과 항의를 조직할 수는 있지만, 공공 정책의 내용을 형성하고 이를 정책 수용자 집단에게 전달할 수 있는 체계와 절차를 만들 수 없다.
정치 체제 밖에서 항의와 압력을 행사하는 것에서 그칠 것이냐, 정부 영역에 “독립적인 대안 세력”으로 참여할 것이냐의 차이는 크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항의와 압력 행사가 자유롭다고 민주주의가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권위주의 체제에서도 항의와 압력 행사는 허용한다. 하지만 집권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권위주의다. 민주주의라면 달라야 한다. 응당, 집권할 수 있어야 한다.
7) 정당은 동일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시민들의 집합체이다. 정당은 사회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공통의 의견을 형성해낼 수 있는 조직이다. 정당은 인간과 공동체에 대해 유사한 문화적 정향 내지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의 생활세계이다. 누가 다수 시민의 주권을 위임받을 것인가를 둘러싼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조직이다.
8) 선거는 중요하다. 선거를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된다.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다면, 체제나 정부의 운영에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항의를 하고 압력을 넣을 수는 있지만, 거기까지다. 결국 공공 정책은 기성세력에 의해 주도될 수밖에 없다.
선거는 시민 주권을 위임받는 최고의 정당성을 가진 민주적 절차다. 선거에서 위임받은 시민 주권의 크기를 바탕으로 공공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민주주의다. 결국 민주주의란 공공 정책의 결정권을 둘러싼 경쟁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학자들은 선거를 “민주적 계급투쟁(democratic class struggle)”이라고 부르고, 투표를 “종이 짱돌(paper stone)”이라고 비유해 말한다.
선거 승리에만 매몰된 정치를 비판하는 사람이 많다. 선거에 매몰되어 정당으로서 해야 할 일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라면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정당의 선거 승리가 아니라, 후보 개인 내지 의원 개인의 선거 승리에만 몰두하는 것을 비판한다면 옳다. 그런 식이면 엘리트 개인을 뽑는 귀족정치라 할 수 있을지언정, 민주적 정당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정당이 선거에 매몰되면 선거에서 이기기 어렵다. 선거를 잘하기 위해서 정당은 넓은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하고, 아주 유능해야 한다. 선거에서 성과를 내려면 정당은 정말로 엄청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9) 정당은 공공 정책의 내용과 방향을 주도적으로 결정할 대안 정부(alternative government)이다. 한마디로 말해, 미래의 통치조직이 될 수 있는 주체다. 시민 권력을 제대로 정당하게 행사하고자 한다면 강한 정당을 조직하고, 선거 경쟁에 참여해 승리하고, 집권하고, 정부를 운용해 공공정책을 자신들의 세계관에 맞게 이끌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국가관료제의 위계적 범위 안에서 소외된 가난한 시민들에게도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실현하게 해주어야 한다.
왜 우리가 브라질의 룰라를 말하는가?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가난한 노동자도 노동운동의 지도자가 되고, 정당을 만들고 그 정당의 리더가 되고, 선거에서 승리해 정부를 책임지는 대통령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 오바마라고 하는 미국 흑인 대통령의 등장에 주목했는가? 인구의 13%도 안 되는 흑인들도 인종적 편견을 넘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고 실제로 대통령에 선출됨으로써 시민적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룰라와 오바마의 등장으로 노동문제나 인종문제가 하루아침에 해결될 거라고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은 없겠지만, 민주정치는 그러한 변화의 가능성을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더 넓게 열어준다. 그것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자는 거기에서 출발한다.
10) 민주주의에서라면 운동의 에너지는 정당과 접맥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정당이 아니라 운동”이라거나 “대의민주주의는 가짜고 직접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편협한 주장을 고집하는 것은 실제의 민주주의로부터 대중을 떼어놓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운동 그 자체에만 매몰되는 것, 대중을 선거와 정당 그리고 의회와 같은 정치의 세계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자칫 정치와 정당, 정부를 기성질서의 영향권 아래 방치함으로써 실제로는 가장 강력한 현상유지적 정치관으로 기능하기 쉽다. 민주주의론 전체를 놓고 볼 때 “운동론 중심의 민주주의관”은 “정당 중심의 민주주의관”에 비해 훨씬 좁고 편협하다.
정당 정치에 복무하는 사람은 스스로 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운동적 요구와 비운동적 요구 모두를 아울러 다수 시민의 권익을 당당하게 옹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스스로부터 왜 정당은 “현대 민주주의의 챔피언”일 수밖에 없는가를 이해하고 또 당당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2부 첫 강의를 이렇게 가볍게 시작했는데, 다음 시간부터는 다시 빡빡한 내용이다. 각오들 하시도록(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