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원교육
  • 당비납부
  • 당비영수증
    출력
  • 당비납부내역
    확인

이사장/소장 칼럼

  • [작은 역사 이야기 '오늘'] 21. 7월 30일 <정치의 세계, ‘미션 임파서블’을 ‘미션 파서블’로>

 

조현연 (정의당 부설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미션 임파서블 5>가 오늘 개봉했다. ‘불가능한 임무’에의 도전! 정치의 묘미는 권력을 갖고서 가능의 세계를 넓히는 데 있으며 그만큼 매력적인 일이다. 동시에 정치는 사람의 목숨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다룬다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7월 30일 ‘오늘’의 주제는 <정치의 세계, ‘미션 임파서블’을 ‘미션 파서블’로>로, ①7월 30일 동작 재보궐선거와 노회찬의 ‘신의 한 수’ ②이승엽과 조봉암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연장선 위에서 <양반제 폐지와 과외 금지>를 다룬 뒤, <맺음말>에서는 7월 30일 오늘 삶을 마감한,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 했던 두 거인”인 ①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와 ②일본의 메이지 천황에 대해 살펴본다.


1. 정치의 세계

1) 2014년 7월 30일 동작 재보궐선거와 노회찬의 ‘신의 한 수’

(1) ‘재보선=여당의 무덤’이라는 등식이 통용될 만큼 그동안 재보궐선거는 야당이 강세를 보이던 선거였다. 김대중 정부 당시 있었던 32곳의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여당은 25곳에서 패배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22곳에서 열린우리당은 단 1석도 얻지 못했으며,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4.29 재보선에서도 여당은 5곳 모두에서 패배하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등식이 깨지기 시작했다. 그 정점은 1년 전 오늘인 2014년 7월 30일 재보궐선거였다.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은 대승을 거뒀다. 전체 15곳 중 4곳(경기 수원정, 광주 광산을, 전남의 나주·화순, 담양·함평·영광·장성)을 제외하고 모두 승리한 것이다. 심지어 제1야당의 텃밭인 전남 순천·곡성에서도 ‘왕의 남자’라고 일컬어지는 이정현 후보가 승리했다.

 

선거 직후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압승에 힘입어 대통령과 청와대가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 그대로를 국정을 운영해 나갈 공산이 더 커졌다는 것이다. 박근혜 청와대의 이후 행보는 예상 그대로였다. ‘지금 이대로’ 국정 운영 기조 특징이 선거 이후 그대로, 아니 오히려 더 강화되어 나타났다. 그 특징과 패턴은 이렇다. ①야당을 국정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독단적인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한다. ②‘정부여당의 전략 참모’ 역할을 하는 언론을 앞세워 공론(公論)을 공론(空論)으로 만들어버린다. ③반공주의와 성장주의를 앞세워 보수우파층을 동원하면서 비판세력들의 주장을 왜곡하고 무력화시킨다. ④정치는 “국회에서 알아서 좀 하세요”라고 하면서 정치적 갈등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방치하는 통치방식을 엄청 즐긴다. ⑤문제가 발생하면 ‘유체이탈’ 화법을 통해 책임을 회피한다. ⑥결국 책임져야 할 사람과 집단이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갈등은 심화.증폭되고 국정은 농단되며 급기야 파탄지경에 이른다.


(2) 2014년 7.30 재보선에서 단연 주목을 끈 것은 동작을구 선거였다. 무엇보다도 노회찬 정의당 후보의 ‘신의 한 수’가 선거전을 흥미진진하게 이끌었기 때문이며, 석패의 결과가 진한 아쉬움과 여운을 남겼기 때문이다.

 

‘신의 한 수’란 말을 처음 사용한 건 7월 20일 ‘길거리 즉문즉답 번개토크’에서 조국 서울대 교수였다. “대한민국의 정치판을 바꾸기 위해 새정치민주연합 후보 한 명을 추가하는 건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니다. 노회찬 후보를 국회에 보내는 것이 새누리당은 물론, 새정치연합까지 긴장하게 만들어 정치의 전체 판을 바꿀 ‘신의 한 수’가 될 것이다.” 이틀 뒤인 ‘7월 22일 긴급기자회견을 통해 노회찬 후보는 선민후당(先民後黨)의 심정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의 기동민 후보에게 후보단일화를 전격적으로 제안한다. “24일까지 단일화 논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노회찬이 사퇴하고 기동민 후보를 지지하겠다.” “‘신의 한 수’이자 탁월한 승부사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이라는 언론보도가 뒤따랐다.

 

노회찬 후보는 대단히 선전했지만 석패하고 말았다. 929표 차. 무효표가 1403표였음을 고려할 때 좀 더 빨리 단일화가 이루어졌다면 승리했을 것이라는, 1076표를 얻은 김종철 노동당 후보와도 단일화를 이루어 냈더라면 아마도 승리 가능성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천호선 정의당 후보는 새정치민주연합 박광온 후보의 승리에 기여했다. 최소 7~11%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던 천 후보가 사퇴함으로써 박광온 후보는 새누리당 임태희 후보를 7% 차이로 누르고 신승한 것이다. 천 후보의 지지표가 거의 대부분 박광온 후보에게 갔다는 분석을 볼 때, 수원 정에서의 박광온 후보의 승리는 조건 없는 사퇴를 통한 단일화 효과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회찬 후보의 경쟁력과 단일화를 이끌어 낸 정치력, 그리고 천호선 후보가 수도권에서 야당의 유일한 승리에 기여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의당은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정의당도 내분에 빠져들어 존립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공상 소설에 불과했다. 그동안 정의당을 있어도 없는 정당 취급하더니 재보선이 끝나고선 갑자기 이길 수도 있었던 정당이 뭔가 제대로 못해서 패배했다는 식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무지의 결과이거나, 아니면 악의적인 해석일 따름이었다.

 

2014년 재보선 직전의 지방선거 때만 해도 정의당은 당 인지도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는 정당이었다. 많은 유권자들이 노회찬 대표와 심상정 원내대표가 정의당 소속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정의당의 지지도가 낮았던 가장 큰 이유는 인지도 때문이었다. 정의당은 7.30 재보선을 통해 좋은 정치인을 보유한 정당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긍정적 인지도를 높였다. 2% 안팎이었던 정당 지지도가 재보선을 거치면서 6.5%까지 오른 것이다. 동작을에서는 10%대에 진입하기도 했다. 물론 긍정적 인지도 제고에 따른 지지율 상승이 당장 정의당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시켜주는 것은 아니었다. 설사 위상이 다소 강화됐다고 해도 그것에 걸맞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지 여부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정의당의 공간은 오히려 더 넓어진 측면도 있다. 문제는 그 공간을 활용할 구상과 기획과 실천이다.


(3) 정의당 전국위원회 결정에 대한 아쉬움

 

2014년 9월 13일 2기 제9차 전국위원회 회의 결과, <7.30 재·보궐 선거 평가에 관한 건>이 통과되었다. 그 내용은 “다른 지역 후보들과 당원들의 당혹감과 어려움을 기술하는 것을 전제로 ‘7.30 재·보궐 선거 평가에 관한 건’을 만장일치로 승인함.”이라고 하면서 아래 두 개의 상반된 평가로 구성되어 있다.

① “당대당 야권연대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이루어진 후보의 단일화 제안은 동작을의 야권후보 단일화를 이루어냈을 뿐만 아니라 수도권 야권 전패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등 당의 정치적 위상을 높여내는 데 기여했다.”

② “다른 한편 후보 사퇴 결단으로 후보단일화가 성사되어, 동작을 선거승리를 위해 수원 영통과 팔달은 후보 사퇴가 불가피해졌고 수원 권선과 김포에서는 사퇴 압박과 사표심리가 더욱 강화돼 곤혹스런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다. 따라서 단일화 안 될 시 후보 사퇴 문제가 당의 선거전략과 다른 후보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측면에 대해 사전 검토나 협의 없이 이루어 진 것은 반복되어서는 안 될 문제다.”

결국 “아쉬운 대목”이라는 원안의 문구가 ②“반복되어서는 안 될 문제”로 수정됨으로써, ①의 긍정적 평가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결정을 전국위원회가 내리게 된 것이다. 혹시라도 나중에 스스로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일로 작용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정치의 세계에서 그것도 ‘신의 한 수’가 요구되는 급박한 상황에서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것의 경계가 어디인지 고민해보게 된다.


(4) “정치는 의지의 발현”이라는 찰스 린블럼(Charles Lindblom)의 말을 인용하면서, 김윤철 교수(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는 7.30 재보궐선거 후에 이런 글을 남겼다. “승리의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치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이기기 위해서 국민의 처지를 더 살피고 요구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특히 야권이 그러합니다. 노회찬 후보가 낙선 소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야권 지지자들은 이기는 야당을 원하고 있습니다. 혁신의 이름으로 우선해야 할 일은 과연 승리의 의지가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자신이 국가와 국민을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스스로의 믿음 속에 나라를 책임져보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변화가 있고, 과감한 선택이 있고 그것을 위한 전략과 정책이 나옵니다. 야권이 제발 승리하겠다는 의지를 갖기 바랄 뿐입니다.”

 

귀담아 들어봄직한 이야기다. 찰스 린블럼은 이런 말도 했다. “정치 과정은 진흙 사이의 통나무 굴리기(Muddling Through)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 사이의 이익을 조정하고 명분과 실제 사이의 간격을 줄여가는 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과연 정의당은 ‘승리의 의지’를 갖고 있는가? ‘통나무 굴리기’를 할 의지와 능력을 갖추어 가고 있는가?


2) 이승엽과 조봉암

<조선인민보> 1945년 12월 17일자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해방 직후 “당시 인천지역은 제2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세력의 아성이었다. 인천은 항구도시이며, 공업도시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선원과 근로자들이 많았고, 공산당의 이승엽, 조봉암 등의 연고지였다.” 이승엽과 조봉암, 두 사람은 각각 남과 북에서 모두 ‘간첩’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1) 이승엽

 

1954년 7월 30일 ‘박헌영.이승엽 간첩사건’으로 이승엽이 사형을 당했다. 이승엽은 일제 강점기의 공산주의 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조선공산당 창설에 관여하였고 조선로동당의 초대 정치위원을 지냈으며 박헌영의 최측근이기도 했다. ‘박헌영 이승엽 간첩사건’이란 1953년 박헌영과 이승엽을 비롯해 임화, 이강국 등 남로당 계열의 거물 정치인들이 미국의 간첩으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전복을 음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최고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정식 명칭은 ‘미제국주의의 고용간첩 박헌영, 이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이다.

한국전쟁 기간인 1952년 12월 15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당의 조직적.사상적 강화와 종파주의 잔재 청산을 강조하는 김일성의 보고가 있은 후, 노동당은 각 정당.단체들에게 당성(黨性) 검토를 하게 하는 한편, 박헌영.이승엽 등을 체포, 구속했다. 1953년 7월 30일 박헌영을 제외한 이승엽.조일명.임화.박승원.이강국.배철.윤순달.이원조.백형복.조용복.맹종호.설정식 등 12명이 기소되었고 8월 6일 판결이 내려졌다. 기소장에는 ①미제국주의를 위해 감행한 간첩행위 ②남반부 민주역량 파괴.약화, 음모와 테러.학살행위 ③공화국 정권 전복을 위한 무장폭동 행위 등 3가지 내용의 죄상이 제시되었다. 박헌영은 재판이 미루어지다가 2년 후인 1955년 12월 3일 기소되어 12월 15일에 판결을 받았다. 재판 결과는 피의자 전원 유죄 판결로,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원조와 윤순달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남로당계를 ‘미제의 고용 간첩’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뒤집어 씌워 처형한 ‘평양재판’. 이 사건은 한국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동시에 유격대 양성기관인 ‘금강정치학원’을 기반으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남로당 계열을 제거하기 위한 김일성의 만주파 계열의 모략이라는 평가와, 이들이 실제 미국의 간첩이었으며 김일성 축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여 처단된 것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있다. 기록상 박헌영 등 남로당계들은 그들의 ‘죄상’을 모두 자백하였다고 하지만, 특히 미제 간첩 부분은 사실의 왜곡과 날조라고 보는 것이 맞다.


(2) 조봉암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는 없는 것이오. (중략)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이승엽 사망 뒤 5년이 지난 1959년 7월 30일 서울 서소문 대법원 법정에서 조봉암 사형판결에 대한 재심청구가 기각되었다. 다음날인 7월 31일 죽산 조봉암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전격적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재심 청구가 기각된지 17시간만이었다.

조봉암은 1920년대 중반부터 화요파 공산당원으로 박헌영, 김단야 등과 교류하며 고려공산청년회를 주도했다. 1932년에서 1939년까지 7년간 옥고를 겪기도 했다. 1945년 1월 지하활동이 적발되어 다시 투옥되었다가 8월 15일에 석방되었다. 건준 위원장 여운형이 그의 출옥을 직접 환영했다 해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박헌영은 1940년 이후 공식 활동을 중단한 조봉암을 불신하였고 공산당 일각에서는 조봉암을 유휴분자라며 비판했다. 해방 이후 조봉암은 박헌영과 완전히 갈라서는데, 항간에는 박헌영이 공산당의 인천 책임자를 조봉암에서 자신의 오른팔인 이승엽으로 교체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었다.

 

조봉암은 한국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대한민국의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지휘했고,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의 권좌를 위협하기도 했다. 1958년 1월 국가변란, 간첩 등 혐의로 체포되어 1심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9년 7월 31일 처형당했다. 이승만 독재정권의 폭력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의 하나였다. 그의 사형집행은 당대에도 정적 제거를 위한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세상을 뜬지 52년째인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재심으로 주요 죄목에 대한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복권되었다.

 

2. 양반제 폐지?과외 금지

 

1) 양반제 폐지(1894년)

(1) 1894년 봄 호남에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청일 두 나라 군대가 아산과 인천에 몰려오는 가운데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영입하여 새 정권을 수립하였다.  타도하고 흥선대원군을 영입하여 신정권을 수립하였다. 7월 27일 개혁추진기구로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고, 영의정 김홍집과 유길준 등 17명이 의원에 임명되어 내정개혁을 3차로 나누어 추진, 약 210건의 개혁안을 제정, 실행했다.

 

1894년 7월 30일(고종 31년) 군국기무처는 오랫동안 조선사회의 폐단으로 지목되어왔던, 양반제도 등 여러 제도 및 관습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문벌과 반상제도의 혁파, 문무존비(文武尊卑)의 차별 폐지, 공사노비법(公私奴婢法)의 혁파, 역인(驛人)·창우(倡優)·피공(皮工) 등 천인의 면천, 죄인연좌법(罪人緣坐法)의 폐지, 양자제도의 개선, 조혼 금지 및 과부재가 허용 등이 그것이었다.

 

갑오개혁은 조선사회에 있어서 근대적인 개혁에의 내재적 지향을 반영한 획기적인 개혁으로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나 청나라 말의 무술변법(戊戌變法)에 대비되는 우리나라 근대화의 중요한 역사적 기점이었다. 그러나 약 19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추진된 갑오개혁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도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2) 여러 개혁 가운데 이 글이 특히 주목하는 건 양반제 폐지다.

양반(兩班)은 조선 시대 최상급의 사회계급으로 사.농.공.상 가운데 사족(士族)에 해당한다. 또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관료와 관료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자격을 가진 가문, 그리고 사림(士林)이라 불렸던 학자 계층까지 포함하는 조선 왕조 특유의 사회계급이다.

 

본래 국왕이 정무를 볼 때 남쪽을 보고 앉은 국왕을 기준으로 왼편인 동쪽에는 문관이 동반으로써 늘어섰고, 오른편인 서쪽에는 무관이 서반으로써 늘어섰고, 그밖에 잡역직은 남반이라 하였다. 이 가운데 남반이 오를 수 있는 최고 품계가 7품이었기 때문에 고위 관직은 동서 양반이 차지하게 되었고, 그들을 두 개의 반이라는 의미에서 양반이라 하였다. 이처럼 양반은 원래 문관과 무관을 지칭하는 관료적 의미였으나, 반상제가 확립되어가면서 신분상의 의미로 변화하였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법에 명문화된 신분은 양민과 천민으로 단순화되었다. 그러나 실제 조선 사회에서는 양반, 중인, 평민, 천민의 구분이 있었다. 양반은 토지와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과거, 음서, 천거 등을 통하여 국가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

 

아무튼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러서는 신분제가 폐지되어 양반 계급이 사라지게 되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한 예로 형평사 운동이 1935년까지 지속된 것처럼 사회적 불평등은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양반 출신, 천민 출신 여부를 따지는 것과 같은 신분제의 잔재가 거의 완벽히 사라진 것은 한국전쟁을 경과한 이후였다.

 

조선 정조 때 연암 박지원이 지은 한문소설인 <양반전>은 조선 후기의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잘 그리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양반 신분을 팔고 사는 과정 묘사를 통해 한편으로는 몰락하는 양반의 무능, 허례, 특권의 가면을 벗기고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양반의 특권 의식을 선망하여 맹목적인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연암은 “하늘과 땅이 아무리 오래되었다 해도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하고, 해와 달은 아무리 오래되었다 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롭다.”라면서 과거의 권위보다 현실 인식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이에 바탕하여 당시의 신분질서를 비판하고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2) 과외 금지

1980년 7월 30일 전두환 신군부의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교육정상화 및 과열 과외금지 방안’(7.30 교육개혁)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1981년부터 대입 본고사가 폐지되고 졸업정원제가 실시되었다. 이와 함께 재학생의 과외 교습 및 입시 목적의 학원 수강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진다. 대학입시 과열로 고교생의 과외가 성행하자 1980년대 이후 정부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되고 법적으로 과외 금지 조치가 시행된 것이다. 5개항으로 제시된 ‘과열과외 추방을 위한 범국민운동 전개방안’의 내용은 이러했다. : ①공직자.기업인 등 사회지도층이 자녀 과외금지 조치 위반시 공직추방 등 사회정화적 차원에서의 강경조치 ②공.사립학교 재직교수 및 교원의 과외행위 금지, 위반자는 교직 추방 ③과외교사 등록 의무화, 소득의 세금징수 ④사설학원의 학생출입 엄금, 위반학원은 인가 취소 ⑤ 비밀과외 발견시 당국에 신고하기 바람.

 

20년이 흐른 2000년 4월 27일 헌법재판소는 과외 교습 단속 행위에 대한 위헌 결정을 내린다. 헌재 재판관들이 위헌 결정을 내린 법적 논리는 지극히 ‘단순명쾌’했다. 현행법의 ‘내용’과 ‘형식’이 모두 최고법인 헌법에 어긋난다는 것이 요지다. 즉 국가가 사회적 폐단을 막는다는 이유만으로 사교육까지 무차별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헌법상 보장되는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것이 헌재 결정의 핵심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준칙은 헌법 제37조 제2항에 나오는 ‘비례의 원칙’, 다른 말로 ‘과잉금지원칙’이었다.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제한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는 없으며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항은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근거규정이면서 동시에 제한입법의 한계규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여기서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라는 표현이 함의하는 바가 바로 비례의 원칙 또는 과잉금지의 원칙이다. 기본권을 제한할 때 준수해야 하는 방법상 넘어서는 안 되는 한계다. 기본권 침해 여부를 가늠하는 데 확고하게 자리잡은 판단원칙인 그것은 ①목적의 정당성 ②수단의 적합성 ③침해의 최소성 ④법익의 균형성 등으로 구체화된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에라도 저촉되면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헌으로 판가름되는 것이다.

 

아무튼 헌재의 과외금지 위헌 판결에 따라 사교육비 시장이 더욱 팽창하고 학교 교육이 위축될 것이라는 교육계의 우려가 있었다. 특히 유명 학원 강사 등에 의한 고액 과외가 합법화되어 자녀를 학원에 보낼 여유가 없는 많은 학부모에게 좌절감을 안겨 주고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심화 및 사회 계층간 위화감 유발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4. 맺음말 :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 했던 두 거인

 

1)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사망 (1898년)

“역사 속을 지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는 것이 정치가의 책무다.”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결정된다.” 1898년 7월 30일 독일 통일과 독일 제국 건설의 장본인인,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가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862년 빌헬름 1세의 지명으로 재상에 취임한 그는 첫 연설에서 군비확장을 주장한 이른바 ‘철혈정책’ 연설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긴급권을 발동하여 예산 승인 없이 국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의회의 예산권은 무력화되었고 군제개혁을 둘려싼 분쟁은 헌법투쟁으로 비화되었다. 철혈정책에 따라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비를 확장하여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및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일제국을 선포, 통일을 이룩하였다. 이후 비스마르크는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고립화를 꾀하고 독일 지위를 튼튼하게 함으로써 국력을 충실히 하려 하였다. 1871년-1890년까지 독일제국의 제국재상으로서 그는 유럽 외교무대를 주도하면서 강대국 간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국내적으로는 남부독일의 카톨릭교도를 억압하기 위한 문화투쟁을 벌였으며, 1878년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 탄압에 나섰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한편 비스마르크는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 산재보험, 노인복지법’ 등 정책을 실행하여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기도 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선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1888년 29세의 혈기왕성한 빌헬름 2세가 즉위했다. 독일 제국 이후 평화주의자로서 전쟁과 폭력에 반대한 비스마르크는 황제와 충돌하였고, 결국 1890년에 사직하였다. 비스마르크는 물러나면서 “이런 식으로 가면 내가 떠나고 15년 후엔 파멸이 올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계은퇴 이후 수많은 방문객들이 비스마르크를 찾아가 경의를 표하면서 그를 ‘게르만의 영웅’으로 칭송하기도 했다. 방문객들의 이러한 찬사는 1895년 비스마르크가 80회 생일을 맞았을 때 절정을 이루었다. 450개 이상의 도시들이 비스마르크에게 명예시민증을 주었고 9875통의 전보와 45만 통의 편지가 3월 25일부터 4월 2일까지 비스마르크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비스마르크에 대해서는 ‘철혈 재상’이라는 인상이 일방적으로, 그리고 지나치리만큼 강조돼 왔다. 그러나 이는 비스마르크의 반대파가 그를 깎아내리기 위해 사실을 대폭 과장한 측면도 있다.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철혈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나, 막상 통일이 된 뒤에는 그는 평화주의적 정책으로 전환해 평화유지에 힘썼다. 또한, 철혈재상 등과 같은 전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비스마르크는 매우 유머감각이 뛰어났고 상당히 감수성이 풍부한 감상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철혈 재상’이라는 말 자체가 비스마르크를 왜곡하고 모함하는 말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2) 메이지 천황 사망 (1912년)

1912년 7월 30일 일본의 122대 천황인 메이지가 세상을 떠났다. 1867년 16살 때 즉위하여 왕정복고를 이룩한 그는 메이지 신정부를 수립하는 이른바 메이지 유신에 성공했다. 메이지 유신이란 메이지 천황 때 막부(바쿠후)체제를 무너뜨리고 대정봉환?왕정복고를 이룩한 정치 변혁의 과정을 일컫는다. 구미의 근대 국가를 모델로 하여 부국강병의 기치를 내걸고 관주도의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력 강화에 노력, 새 시대를 열었다.

 

메이지 유신 하면 떠오르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카모토 료마(1836~1867)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봉건체제의 뿌리 깊은 계급의식과 신분의 벽을 깨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힌 공로로 수많은 일본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지방의 하급 무사 출신인 료마는 유연한 사고와 뛰어난 협상력, 그리고 강력한 돌파력으로 막부의 통치권을 천황에게 돌려주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이뤄낸 풍운아였다. 또한 료마는 메이지 신정부 강령의 모태가 되는 ‘선중팔책’(신정부 강령팔책)을 작성해 메이지 유신의 실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료마는 막부의 마지막 쇼군 하야 직후 암살당하며 불꽃같은 삶을 마친다.

 

메이지 정부는 서구식 학제 개혁을 비롯, 징병제 실시, 지조개정(地租改正), 국회의 개설, 헌법의 반포 등 일련의 개혁을 통해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절대주의적 천황제 국가의 기틀을 닦았다. 그리고 폐번치현(廢藩置縣)을 실시하여 각 번주가 다스리던 지역을 천황이 직할하도록 바꾸었다. 특히 제국헌법에서도 천황의 국가통치 대권.육해군 통수권을 명기했고, 교육칙어에서는 천황이 국민도덕의 중심임을 밝힘으로써 천황제 국가를 유지하는 2대 이념으로 삼았다. 45년간의 재위기간 동안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대한제국을 합병하여 일본 국민의 절대적인 숭앙을 받았다. ‘신격화’된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군국주의로 나아간 것이다.

 

한국인의 눈에 비춰진 ‘군국주의의 화신’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미국의 저명한 일본문학 전공자 도널드 킨(Donald Keen)에게 메이지 천황은 인자한 통솔자였다. 그가 저술한 <메이지 천황(상, 하)>를 보면, 메이지 천황은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그의 치세와 그 후세 사람들을 비범하고 용기 있게 만든 영웅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 수많은 변혁을 이끈 공신들에게 항상 마음의 의지처가 되었던 ‘더 그레이트(The Great)’ 즉 ‘대제(大帝)’였다.


※ 미션 임파서블 다섯 번째 시리즈인 <미션 임파서블: 로그 네이션>이 2015년 7월 30일 오늘 국내에서 개봉되었다. 이 시리즈는 1996년 첫 작품이 공개된 이후 ‘007’, ‘본’ 시리즈와 더불어 대표적인 스파이 프랜차이즈물 영화 팬들로부터 사랑받았다. 미션 임파서블이란 말 그대로 ‘불가능한 임무’를 뜻한다. 현재진행형인 ‘4자연대’에 기초한 진보의 총결집과 재구성,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진보정치의 대중적 확산이 미션 임파서블이 아니라 ‘미션 파서블’로 일단락짓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참여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