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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작은 역사 이야기 '오늘'] 17-2. 6월 30일 ‘남과 북’, ‘남과 남’의 소통과 불통

 

 

조현연 (정의당 부설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6월 30일 ‘오늘’의 두 번째 글 주제는 <‘남과 북’, ‘남과 남’의 소통과 불통>이다. <‘남과 북’>은 ①총 453시간 45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1983년) ②‘통일의 꽃’ 임수경 평양 도착(1989년) ③개성공단 건설의 첫 삽(2003년) 등 세 가지를 소재로 해서 이야기한다. <‘남과 남’>의 소재는 이른바 ‘명박산성’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2011년)과 세월호 1주기 행사 때 등장한 ‘근혜산성’이다. 맺음글에서는 <볼테르와 ‘장 칼라스 사건’, ‘똘레랑스’>에 대해 알아본다.


1. ‘남과 북’의 소통과 불통

 

1) 총 453시간 45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KBS, 남북이산가족찾기 생방송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1983년 6월 30일 한국방송공사(KBS)에서 남북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 시작했다. 처음 1회 예정이던 이 프로는 몰려드는 이산가족의 요청으로 1983년 11월 14일 마지막 방송까지 138일 동안 연장 방송했다. 총 방송시간 4백53시간45분, 상봉가족 1만189명이라는 초유의 기록을 남겼다. 단일 생방송 프로그램으로는 세계 최장기간 연속 생방송 기록이라고 한다. KBS 방송 역사상 제대로 수신료 값을 한 사례를 꼽자면 반드시 들어가는 프로그램이다.

 

1980년대 초 당시 한국 인구가 약 4천만 명 가운데 경찰 당국이 추산한 ‘이산가족’의 수는 약 1050만 명에 달했다. 네 집 걸러 한 집 꼴로 이산가족이 있었던 셈이다. 이산가족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가장 많이 생겨났지만 사실은 한국 현대사 전체를 관통하는 흔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생활고로 인해 헤어졌다가 소식이 그대로 두절되는 경우도 많았다. 주로 식모살이를 하러 가거나 도회지 공장에 나간 사람들이었다. 심지어는 명절에 집을 찾아갔더니 이사를 가 버려 이산가족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온갖 사연으로 헤어진 이산가족들이 당시 한국에는 넘쳐나고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초의 한국은 지금과 같이 인터넷은커녕 전화보급망조차도 1권의 전화번호부로 1개 도를 아우를 정도로 정보가 원활하지 못하던 시대였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이 방영된 1983년 이전에도 이산가족들은 그나마 가장 널리 알릴 수 있는 미디어 수단인 신문을 활용하여 서로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휴전 30주년인 1983년 6.25 특집주간에 공영 미디어인 TV의 파급력을 이용하여 대한민국 안에서만이라도 흩어져 사는 이산가족을 찾아보자는 프로그램이 기획된다. 6월 30일 첫 생방송, 시청자 반응은 엄청나게 뜨거웠다. 생방송을 진행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스튜디오에 설치한 10대의 전화통에는 문자 그대로 불이 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방송에 고지된 10개의 회선 외에도 KBS 사무국, 나아가 781~784국으로 시작하는 KBS의 모든 전화회선이 온라인 상태가 되고 말았다. 서울과 지방 대도시 전화국에 전자교환기(DDD)가 설치된 이래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방송을 보던 이산가족들은 밤 11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까지 사전 출연약속 없이 무작정 여의도 KBS 스튜디오로 몰려왔다. 이산가족들은 그저 방송에 나올 수도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의지한 채 무작정 여의도로, 여의도로 찾아왔던 것이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와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사람들은 혹시나 자기 혈육이 나올까봐 TV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산가족이 아닌 사람들도 방송을 보고 있으면 예측하지 못하는 때에 갑자기 여기서 박수소리가 터지고 저기서 얼싸안고 우는 감동의 드라마가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33년이나 묵은 한맺힌 인간드라마는 최소한의 큐시트도 필요가 없었다.

 

2014년 3월 26일에 비밀해제된, 외교부가 1983년도에 작성한 문서에서도 보듯이 당시 전두환 정권은 이 호재를 당연히 활용하고자 했다. 이 프로그램을 대북 심리전과 안보 교육용으로 활용할 것을 각국 재외 공관에 지시한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7일차 이후부터 대한적십자사 총재라든가 국토통일원 장관이라든가 하는 높으신 분들이 출연했고, 체제 선전 내용이 대폭 강화되기 시작했다. 체제 선전에 도움이 되는, 6.25 때 헤어져서 갖은 고생 끝에 혈육의 정을 나누는 상봉 화면 위에 전쟁 기록영화 장면을 씌우고 슬픈 BGM을 깔아주는 등 적극적으로 띄우려고 노력했다. (반면에 같은 이산가족이라도 전쟁 후의 생활고로 헤어졌다든가 단순 가출 사례 등은 상봉 장면이라도 냉정하게 잘랐다고 한다.)

 

한편 이산가족찾기를 대한적십자사 주관의 국민운동(새마을운동과 같은)으로 추진하기로 하는 결의안이 정식으로 국무회의를 통과되었다. KBS는 상시편성으로 프로그램을 전환했다. 이 릴레이 방송은 그해 11월 14일까지 총 453시간 45분 동안 단일주제 연속 생방송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기네스북에 등재된 이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방송기간 동안 5만여 명의 이산가족이 여의도를 찾았다. 방송에서는 100,952건이 접수, 그 중 53,536건이 방송되고 결과적으로는 10,187명의 사람들이 상봉했다. 생방송은 11월 14일까지 편성되었지만 그 이후로도 헤어진 가족을 찾으려는 사람이 몰려들어, 여의도광장에 설치되었던 ‘만남의 광장’은 이듬해인 1984년 여름까지 유지될 정도였다.

 

2014년에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흥남 철수 때 헤어진 아버지와 여동생을 찾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생방송을 주제로 하고 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길소뜸>은 ‘이산가족이 만난 뒤의 후유증’을 냉정하게 그려서 화제가 되었다. 의외로 상봉 후에 오히려 갈라지는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한다. 예컨대 생활수준이나 사는 환경이 비슷한 이산가족끼리 만나는 경우는 그런대로 관계가 유지되지만, 가족 중 한 쪽이 재혼을 했거나 극빈층으로 떨어진 경우는 오히려 집안 문제가 커져서 외려 연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전쟁의 비극’이었던 것이다.


2) ‘통일의 꽃’ 임수경 방북

 

1989년 6월 30일 정부의 허가 없이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자격으로 임수경(외대 불문과 4년)이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를 위해 평양에 도착했다. 1989년 7월 1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된 이 축전에는 177개국 22,000여 명의 대표가 참석했다고 한다. (1989년의 평양축전은 가장 많은 나라가 참가하여 성대하게 치러졌으나, 그 이후로 냉전 구도의 해체와 ‘공산권’의 몰락으로 대회 참가 인원과 참가국은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임수경의 방북은 같은 해 3월 25일의 문익환 목사와 1988년 서경원 의원의 방북에 뒤이어 행해진 것으로, 이들의 계속되는 방북은 이른바 ‘공안정국’이 조성되는 빌미가 되었으며,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가 불구속 기소 단계에 이르기도 하였다.

 

‘통일의 꽃’으로 불린 임수경은 7월 27일 1차 판문점 귀환에 실패한 뒤, 8월 15일 오후 2시 22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파견한 문규현 신부와 함께 분단 이래 민간인으로는 최초로 판문점을 걸어서 귀환한다. 임수경은 국가안전기획부(지금의 국가정보원)의 조사를 받은 뒤, 1심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구형받았다. 이어 계속된 재판 끝에 같은 해 12월 18일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92년 특별 가석방된 뒤, 1999년 복권되었다. (임수경은 2015년 현재 새정치연합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 개성공단 건설, 첫 삽을 뜨다


2003년 6월 30일 개성 현지 1단계지구에서 남북의 정계, 경제계 인사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성공단 건설이라는 역사적 작업의 착공식이 열렸다. 흔히 개성공단이라고 불리는 개성공업지구(Kaesong Industrial Region, KIR) 조성사업은 2000년 8월 9일 고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건설에 합의한 사업으로, 개성직할시 일대에 800만 평 규모의 공단과 1200만 평 규모의 배후단지를 조성해 국내기업을 유치한다는 취지로 이뤄졌다.

 

황해북도 개성시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는 개성공단은 군사분계선에서 서쪽으로 2.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판문점에서 서쪽으로 4km, 대한민국의 도라산역에서 서북쪽으로 7km 떨어져 있어서 서울 서부의 마포구나 은평구에서 자동차로 1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개성공단 사업은 2000년 8월 22일 현대아산(주)와 북한과의 합의로 시작되었다. 2003년 6월 30일부터 1단계 330만 제곱미터가 개발이 착수되었으며, 2007년에는 1단계 분양 및 1단계 1차 기반시설이 준공되어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사건 이후 남한 정부의 5ㆍ24 대북제재 조치를 통해 개성공단에 대한 신규 투자를 금지하자 북한은 개성공단 등 육로통행의 전면 차단을 경고하며 남북교류협력 관련 군하적 보장 조치를 전면 철회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어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사건과 잇따른 미사일 발사 실험 등으로 인해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13년 4월 3일, 한국은 2010년에 이어 개성공단으로의 출경을 금지하고 대한민국으로의 귀환만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한 뒤, 개성공단 내 국민보호를 위해 2013년 4월 26일 개성공단 내 잔류근로자 전원철수 조치를 단행하기도 했다.

 

개성공단의 조업 중단으로 인해 입주 기업들은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다. 다행히도 재가동 이후에는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정상적인 운영이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세금, 임금 문제 등 여전히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만약 또다시 개성공단에 위기 상황이 발생한다면 공단 재개에 치명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일련의 위기를 겪은 기업들은 중국 등으로 생산지를 일부 이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개성공단의 불안정으로 인한 생산물량 감소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현재 개성공단은 남북 간의 유일한 경협 현장이며 당국 간 대화 채널로, 개성공단이 중단되는 경우 마지막 남은 남북경협의 현장이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마지막 남은 남북경협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개성공단의 현안에 대한 합리적 해법의 모색이 필요하다. 개성공단은 단순한 산업공단으로의 역할을 뛰어넘어 남북 경제공동체 실현을 위한 롤모델로서 그 중요성이 크다. 박지원(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은 “남북관계 개선은 대한민국의 성공과 세계 평화로 가는 지름길”이라며 “6.15 선언과 9.19 합의는 남북관계 개선의 해법이자 통일로 가는 나침반”이라고 역설하면서, “개성공단은 돈도 벌고 평화도 얻는 진정한 창조경제”라면서 박근혜 정부와 북한 당국이 이를 해주, 남포, 원산, 신의주, 나진-선봉, 함흥, 청진 등 북한 전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2. ‘남과 남’의 소통과 불통 - ‘명박산성’과 ‘근혜산성’

 

“경찰이 차벽(명박산성)으로 서울광장을 봉쇄해 헌법에 보장되는 행동자유권을 침해당했다.” 2011년 6월 30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덕수궁 대한문 앞 분향소를 찾은 시민 9명이 경찰청장을 상대로 낸 위헌확인 헌법소원 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7대2 의견으로 위헌 결정했다. 경찰은 경찰관직무집행법을 근거로 “위험 발생을 방지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정당한 공무집행”이라고 주장했지만, 헌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재는 한 발 더 나아가 공공질서를 위협하는 명백한 불법집회라 하더라도 경찰의 원천봉쇄 행위는 부당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즉, 전면적 통행제지 행위는 경찰의 편의주의적 발상으로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명박산성’이라는 차벽은 대통령 이명박과 산성(山城)의 합성어로 차벽은 소통의 거부, 시민과의 불통을 상징한다. 그것은 2008년 6월 10일 6.10 민주항쟁 21주년을 맞아 촛불 시위의 일환으로 서울 도심에서 ‘100만 촛불 대행진’이 계획되자 경찰이 시위대의 청와대 행진과 전경과의 충돌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도심 곳곳에 설치한 컨테이너 박스 바리케이드를 지칭한다. 컨테이너 박스를 2단으로 쌓고, 바닥에 철심으로 고정시킨 뒤 용접한 것이다. 컨테이너 장벽이 설치되자 누리꾼들은 이것이 이명박식의 소통이라며 조롱하였다. 이 바리케이드는 2005년 11월 부산 APEC 정상회의 당시 반세계화 시위대의 회의장 진출을 막기 위해 당시 어청수 부산지방경찰청장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명박산성이란 말은 원래 대한민국의 누리꾼들과 시위대가 풍자의 뜻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나 신문 기사 등에서 인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명박산성은 전 세계 유력지 인터넷판에 잇달아 등장해 세계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유력 경제지인 파이낸셜타임즈 첫 화면에 컨테이너 사진과 기사가 뜬 데 이어 CNN, 뉴욕타임스 등에도 잇달아 소개됐다. 로이터, AP, 블룸버그 등의 통신사들도 모래주머니와 콘테이너를 이용한 장애물들에 대한 내용이 담긴 소식을 전하였다.

 

2015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1주기. 광화문 분향소 헌화를 금지시키기 위해 이른바 ‘근혜산성’이라는 차단벽이 다시금 세워졌다. 외유를 이유로 도망간 주인, 주인도 없는 빈집인 청와대를 에워싼 거대한 차단벽, 대통령은 무엇을 두려워하며 또 무엇을 지키려 하는가?


3. 맺음글: 볼테르와 ‘장 칼라스 사건’, ‘똘레랑스’에 대하여

 

1778년 6월 30일은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본명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François Marie Arouet. Voltaire라는 이름은 1718년에 비극 <오이디푸스>를 발표하며 사용하기 시작한 필명)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1) 볼테르는 종교의 보편적 가치와 윤리가 붕괴되어 가는 시대에 다시금 인간성의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다. 그는 종교와 국가, 자유와 맹신, 편협한 독단과 관용의 대립 지점 한가운데서 진실을 파헤침으로써, 왜 관용의 미덕이 필요한가를 역사적 방법에 따라 설득해 낸다. 18세기 ‘관용’의 전도사로 알려진 그는 강연과 저술활동, 즉 지식만으로 부를 쌓았던 최초의 지식인으로 손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최근 프랑스에서 볼테르의 <관용론>(Traité Sur La Tolérance)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관용론>은 1763년 종교적 맹신과 편견으로 법의 이름 아래 한 죄 없는 노인이 자신의 아들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처참하게 죽어가는 현실을 목도한 직후에 출간된 책이다. 이른바 ‘장 칼라스 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의 권위를 정점으로 한 앙시앙레즘(구체제)이 지배하던 사회였는데, 칼라스는 신교도였다. 변호사가 꿈이었던 칼라스의 아들 마르크 앙뚜안은 신교도라는 이유로 꿈이 좌절된 후 괴로워하다가 자살을 했다. 그러자 변호사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아들을 가족들이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고, 칼라스 가족들이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에도 살해 증거가 나오지 않았지만 칼라스는 수레바퀴에 사지를 매달아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했고 가족들에게는 추방령이 내려졌다.

 

거열형을 선고한 배경도 재판의 다른 모든 부분과 마찬가지로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장 칼라스의 처형에 찬성한 판사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나머지 판사들을 설득했다. 이 허약한 노인은 처형의 고통을 이길 수 없을 것이고, 그래서 형틀에 묶이면 자신의 죄와 공모자들의 죄를 자백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판사들은 칼라스의 형을 집행하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노인은 바퀴에 묶여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을 불러 자신의 결백함의 증인으로 삼았으며 또한 잘못을 저지른 판사들을 용서해달라고 기원했던 것이다.

 

볼테르는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이 사건을 알게 된 후 전단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재판의 부당성을 알렸는데, 결국 칼라스는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거열형을 당한 지 3년 후였다. 볼테르는 이 투쟁을 통하여 그 유명한 <관용론>을 쓰게 된 것이다. 볼테르는 책을 통해 종교적 광신과 불관용이 평범한 한 시민과 가정을 얼마나 무참히 파괴하였는지, 당시 프랑스 사회의 현실을 고발했다. 또한 인간의 자유와 이성이 종교적 불관용에 앞서야 하며, 이것이 억압당하는 순간 종교는 광신이 되어 인간을 짓밟는 도구로 전락한다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리고는 “신은 우리에게 미워하라고 마음을 준 것이 아니며, 서로를 죽이라고 손을 준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책이 252년 만에 빛을 본 이유는 간단하다. 18세기의 볼테르가 분노했던 불관용에 대해 21세기 오늘을 살아가는 프랑스인들 역시 분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15년 대한민국 사회 현실은 어떠하며, 지금/여기 다수의 보통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관용론>은 피로 점철된 종교분쟁에 종지부를 찍고 대혁명을 앞당기는 데 한몫하는 등 프랑스 역사에 커다란 흔적을 새겼다.


2)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권리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겠다.” 국가보안법 반대나 사상의 자유를 옹호할 때 자주 등장하는 꽤나 유명한 문구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볼테르의 명언으로 올라 널리 유포되었지만 진짜로 볼테르에게서 나온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오히려 사실이 아닐 개연성이 크다. 이 문구는 영국 출신의 작가 에벌린 홀이 탈렌타이어라는 필명으로 1906년에 출간한 <볼테르의 친구들>이라는 책에 등장한다.

 

홀은 이 책에서 엘베시우스의 <지성론>에 관한 볼테르의 평가를 전하면서 볼테르가 한 말을 인용하는 중간에 자기가 쓴 문구를 삽입했는데, 그 때문에 볼테르의 말로 여겨지는 착오가 생겼다는 것이다. 후일 홀이 이에 대해 해명하고 자신의 부주의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볼테르에 대해 한 가지 유념할 것은, 그가 18세기의 상황에서 편견을 공격하고 지적 도덕적 개방성을 강조한 계몽주의자인 것은 맞지만, 표현의 자유를 무제한적이고 절대적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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