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연 (정의당 부설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6월 21일(일) ‘오늘’의 주제는 <‘현실의 법정’과 ‘역사의 법정’>이다. <법정>에서는 ①지난 2012년 18대 대선 당시 있었던 국가정보원의 조직적인 선거 개입의 유무죄를 따져본 뒤 그것이 국기문란 사건이었음을 밝힌다. 이어서 ②‘세종대왕 (문해)상 제정’과 ‘언어의 달인 vs. 변절의 아이콘’ 신숙주의 삶의 대해 알아본다. <오늘의 죽음과 삶>에서는 ‘정의’(Justice)를 주제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저자인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와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맺음글에서는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최초의 공중변소 설치와 노상방뇨 금지>에 대해 살펴본다.
1. ‘현실의 법정’과 ‘역사의 법정’
1) “국정원의 18대 대선 개입=국기문란 사건”
“대통령 대국민 사과와 즉각적 국정조사를 촉구하며, 국정원 전면 개혁을 위한 대국민 행동에 돌입합니다.” 2년 전 오늘인 2013년 6월 21일, 진보정의당의 노회찬 공동대표와 심상정 원내대표는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정보원의 조직적인 18대 대선 개입을 국기문란 사건으로 규정하면서 여의도역 사거리에서 국정원 국기문란사태 국민행동 정당연설회에 돌입한다. 진보정의당의 긴급기자회견문은 이 사건의 성격과 전모를 명쾌하게 밝히면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①국가정보원이 대선에 개입하기 위해 인터넷을 이용해 여론을 조작하는 유례없는 일을 벌임으로써 온 나라가 큰 충격에 빠져있다. 경찰 또한 선거 개입을 위해 사건 수사 결과를 고의로 은폐하고 왜곡했다. 이 사건은 헌정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국기문란행위, 민주주의 파괴행위다.
②우리 민주주의의 역사는 권력기관의 반민주 행위를 국민의 힘으로 근절시켜 온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생들이 시국선언에 나서고 온 국민이 들끓고 있는 것은, 정보기관의 정치개입을 막고 민주주의 기본질서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항의다.
③국정원의 대선 개입이 어느 규모이건, 여당 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이 문제의 당사자다. 박근혜 대통령은 즉각 국민 앞에 국정원의 대선 개입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 한다.
④ 집권여당인 새누리당 또한 느닷없는 NLL 발언록 물타기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정치공세를 중단하고 즉각 국정조사에 응해야 한다.
⑤정의당은 국정원 전면개혁 논의에 착수하겠다. 그것은 과도한 국내 정치개입으로 자기 역할을 상실한 국정원을 폐지하고 해외 정보활동을 기본으로 하는 기관으로 재정립되도록 하는 것이다.
‘국정원의 18대 대선 개입=국기문란 사건’은 진보정의당의 긴급기자회견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2012년 대통령 선거기간 중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소속 심리정보국 소속 요원들(‘십알단=십자군 알바단’)이 국가정보원장의 지시에 따라 인터넷에 지속적으로 대량의 게시글을 올리는 등 선거 개입을 통해 국기를 문란케 한 사건을 말한다. 이후 국군사이버사령부 직원들이 대선에 개입하는 글을 올린 것과 국가정보원 심리전단에서 트위터에 수십만건 이상의 정치개입·대선개입 활동을 한 사실이 확인되어 그 파장이 더욱 확산되었다. 일각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퇴진 요구까지 제기되기도 했다.
2013년 6월 서울지방검찰청 특별수사팀은 원세훈(국가정보원장)과 김용판(서울지방경찰청장)을 공무원으로서 부당한 직무를 행사한 죄와 불법 선거운동을 한 공직선거법을 위반한 공무원의 선거운동행위로 기소했다. 원세훈의 경우는 정치적 여론조작 활동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야권 후보를 비방한 사실, 김용판의 경우는 대통령 선거 직전 수사에 외압을 넣고 허위의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한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이 사건은 2013년 6월부터 8월까지 여야 간의 극한 대립을 불러왔다. 국정원 국기문란 사건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6월 20일 갑자기 새누리당 소속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들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발췌본을 열람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는 우스꽝스런 일이 터졌다. YTN에서 국정원에서 운영하던 SNS 계정에 대해 단독보도를 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방송이 중단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정부여당의 전형적인 물타기와 의도적인 논점 일탈을 통한 쟁점 흐리기가 시작된 것이다. 진보정의당의 긴급 기자회견과 국정원 국기문란사태 국민행동 정당연설회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진행된 것이다.
1년 뒤인 2014년 9월 11일 서울지방법원(재판장 이범균)은 원세훈에 대하여 정치관여 위반 혐의는 유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로 판단하여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무죄 선고의 논리는 “정치개입이지만 선거개입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김용판 전 청장이 수사 축소를 지시했다고 주장한 권은희 전 경정(현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 김용판에게도 무죄를 선고했다. (2015년 1월 대법원은 김용판의 무죄를 확정하였다.)
“원심 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 원세훈,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2015년 2월 9일 서울고등법원(재판장 김상환 부장판사)은 1심 판결과는 달리 원세훈의 국정원법 위반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김 부장판사는 “정보기관의 선거개입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되거나 합리화될 수 없는 문제”라며 “국정원이 솔직한 반성과 깊은 성찰의 결과로 만든 거울 앞에서 이 사건 사이버활동의 적법성을, 그리고 그것이 합리적인 국민에게 어떻게 이해될 것인지 진지하게 따져봤는지 극히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정보기관 관련법 어디에도 (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할 명분을 주고 있지 않으며, 어떤 측면에서도 용인될 수 없고, 선거 과정과 무관하면 무관할수록 정보기관에 대한 신뢰가 생길 것”이라며, “어떠한 국가기관도 법치 영역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안보환경이 급변해 이에 대응할 절박한 필요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법의 체계에서 그 활동이 허용될 수 없다면 국회의 동의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재판 과정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사실상 국가와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선고를 받은 후 법정 구속되기 전, 할 말이 있느냐는 재판장의 물음에 원세훈이 한 말이다. 누군가가 묻는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과 ‘민주적 헌정질서 파괴 및 국기 문란’ 사이의 갈림길에서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이 물음은 잘못된 것이다. ‘민주적 헌정질서 파괴 및 국기 문란’까지 감수하면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해야 할 일이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양자 사이에 선택의 갈림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갈림길이 있다고 항변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의 결과이거나 아니면 악의적인 사실 왜곡일 뿐이다.
2) 유네스코의 세종대왕 (문해)상 제정과 언어의 달인 신숙주
(1) 유네스코, 문맹퇴치 공로상 ‘세종대왕 (문해)상’ 제정
1989년 6월 21일 유네스코가 문맹퇴치 공로상인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UNESCO 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제정하였다. 이 상은 대한민국 정부 지원으로 제정된 후 이듬해부터 매년 9월 8일(문맹 퇴치의 날) 문맹 퇴치에 뛰어난 공적을 쌓은, 특히 개발도상국 모어(母語) 발전·보급에 크게 기여한 2명(또는 2곳)의 개인 또는 단체에 대해 시상한다.
수상 대상은 문맹퇴치사업에 직접 종사한 경우, 국가 또는 지역 단위의 문맹퇴치사업 종사, 문맹퇴치를 위한 언론캠페인 종사, 문맹퇴치를 위한 교육자재 개발 생산, 문맹퇴치 관련 학술연구, 문맹퇴치사업계획 수립 및 이를 위한 조사업무, 청소년의 문맹퇴치사업 참여 유도, 문맹퇴치에 공이 있는 언론 등이다. 후보는 유네스코 회원국 정부, 또는 유네스코와 공식 관계를 맺고 있는 국제 비정부기구들이 각 2명까지 추천할 수 있다. 수상자는 국제심사위원단의 추천으로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선정한다. 국제심사위원단은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세계 각 지역별로 안배해 임명한 문해 분야의 남·녀 저명인사 최소 5명으로 구성되며, 국제독서협회 문해상, 공자 문해상 국제심사위원단을 겸한다. 각 수상자에게 상금 미화 2만불과 상장, 세종대왕 은메달을 수여한다.
‘한글은 위대한 문자’라는 말이 들리곤 한다. 문자에 담긴 과학적 원리에 세계의 언어석학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로버트 램지 교수(미국 메릴랜드대, 언어학)는 한글날 기념 강연에서 한글을 ‘세계의 알파벳’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1999년 세상을 떠난 저명한 언어학자 제임스 매콜리 교수(미국 시카고대)는 매년 10월 9일이면 강의를 휴강하고,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세계의 위대한 유산이 탄생한 날을 찬양하고 휴일로 기념하는 것은 언어학자로서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세계의 위대한 유산’ 한글이 만들어지는 데에 ‘언어의 달인’인 신숙주라는 인물이 기여한 공로를 빼놓을 수는 없다.
(2) 신숙주, ‘언어의 달인’ 대 ‘변절의 아이콘’
1475년 6월 21일(조선 성종 6년)은 ‘언어의 달인’이자 ‘변절의 아이콘’인 신숙주가 세상 떠난 날이다. 세간에 나온 책 중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책 읽기를 좋아했던 신숙주는 풍부한 독서량 덕분인지 언어 감각이 대단히 탁월했다. 외국어와 언어학에 능통한 신숙주를 일찍이 알아본 세종은 그를 훈민정음 연구에 참여시킨다. ‘백락일고’(伯樂一顧, 재능 있는 사람도 그 재주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야 빛을 발한다)는 말처럼, 신숙주는 ‘세종’이라는 날개를 달고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후세에 남긴다.
1443년(세종 25) 12월 한글을 완성한 세종대왕은 신숙주와 성삼문 등을 불러 중국 요동 땅을 다녀오라고 명한다. 그곳에 명나라의 유명한 음운학자인 황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신숙주 일행은 13차례나 요동을 드나들면서, 3년간의 검토작업을 거쳐 1446년 9월 마침내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해설서를 완성한다. 성삼문, 정인지, 최항, 박팽년, 이개, 강희안, 이선로 등과 함께 신숙주는 해설서 편찬의 당당한 주역 중 한 명인 것이다. 1448년 세종의 명에 따라 신숙주는 우리말 실정에 맞게 한자음을 새롭게 정리한 발음 책 <동국정운>을 편찬한다.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의 <동국정운>은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으며, 국어 연구 자료로서의 중요성도 훈민정음 못지않게 높이 평가되고 있다.
신숙주는 세종부터 성종 때까지 승승장구하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 자리에까지 올랐고, 정치적으로 추락하는 일 한 번 없이 살다 갔다. 생전에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 등 4번 공신에 책록되기도 했다. 사육신과 함께 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그걸 저버리고 결국 수양대군의 편에 가담하였다. 물론 세조 즉위를 모의하는 일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세조의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잘 변하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부르며 신숙주의 변절 사실을 희화화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는 신숙주가 절개를 저버리고 출세를 선택한 변절자의 전형으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적어도 세종을 만난 뒤 그의 맹활약은 지운다고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1910년(융희 4) 이후 그의 한글 창제에 대한 재조명 여론이 나타났으며, 1980년대 이후부터 그에 대한 재평가 노력이 진행되었다.
(※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민요 <파랑새>에는 신숙주의 ‘숙주’와는 다른 뜻을 지닌, ‘녹두’가 등장한다. 이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그 가운데 일반적인 것은 동학농민전쟁과 관계가 깊은 내용으로 녹두꽃은 전쟁을 이끈 녹두장군 전봉준을, 청포장수는 민중을 의미한다고 보는 설이다. 전봉준은 유달리 키가 작아 5척 단구였기 때문에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2. 오늘의 죽음과 삶 : ‘정의’란?
1) “정의에 대한 인간능력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부정의에 대한 경향이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 1892년 6월 21일은 미국의 신학자이자 ‘정의를 추구한 현실주의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 태어난 날이다.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이 유럽에 끼친 영향에 필적하는 영향을 미국에 끼친 역작으로 평가되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1932)에서 니버는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개인의 도덕에는 사랑의 규범이 적용되지만 집단의 또는 집단 간의 도덕에는 정의의 규범, 곧 힘의 균형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니버에게, 제국주의적 야심과 인종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혀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가고 유대인을 전멸시키려 드는 히틀러를 보면서도 미국의 참전을 사랑의 규범을 범하는 행동으로 비판하는 완전주의적 평화주의는 ‘잔인한 평화주의’일 뿐이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집단 간의 관계는 윤리적이기보다 힘의 역학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정치적 관계이며, 사회는 윤리가 아닌 정치에 의해 움직인다”고 말한다. 개인과 집단의 차이를 무시하게 될 경우 “인간의 집단적 행동 중에서 자연의 질서에 속하면서도 이성이나 양심의 지배하에 완전히 들어오게 할 수 없는 요소들을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정의를 획득하기 위한 싸움에는 정치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완전히 간과”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특권계급의 집단적 이기심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부정의는 조정이나 타협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고 본다. 산업사회의 노동자를 비롯한 피억압 집단은 반드시 정치권력을 소유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들을 억압하려는 집단에 힘으로 맞서야 한다는 것이 니버의 해법이다. “윤리적인 사회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전망을 주는 정치적 방법들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저자가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를 통해 제시하는 궁극적인 목표인 셈이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서로 다른 개인의 도덕과 사회의 정의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가 도덕적 사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유효한 방식으로 주목하는 것은 간디 식의 비폭력적 강제력(non-violent coercion)이며, 특히 지도자의 도덕을 강조한다. 집단의 지도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사심을 억제하는 것이 집단의 사기를 크게 고양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비폭력적 강제력을 이끄는 피억압 계층의 지도자는 자신들이 가진 능력을 이용해 특권계급으로 탈바꿈했을 때 집단의 진보를 방해할 수 있기에 대단히 높은 도덕적 이상에 따라 행동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역사가 말해주듯이 적지 않은 지도자들이 개인적인 욕심에 굴복해 도덕적 이상을 저버리곤 했다.
삶의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에 뿌리내려 가지를 뻗어간 니버의 사상은, 민주주의 정치이론을 설파한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 1944>로 열매를 맺는다. 인간은 정의를 실현해도 그것은 부분적이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러한 본성은 늘 제도적으로 조절되고 견제될 수밖에 없으며, 그나마 이 일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정치제도는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니버의 사상과 윤리학은 자동차 공업도시 디트로이트의 목회현장과 구체적인 삶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산업사회로 치닫는 미국에서도 자동차 공업으로 더 한층 인구증가와 도시팽창의 속도가 급속했던 디트로이트는 실업자와 일용직 노동자와 정규 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들과 중간 간부들과 기업가들이 촘촘한 그물망을 엮어가던 도시였다. 그곳은 빛과 어둠의 세계가 공존하는 속에서 인간의 희로애락이 끝없이 반복되는 도시였다.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기업가 헨리 포드가 고안한, 포디즘(Fordism)으로 대표되는 대량생산방식은 부의 사회적 총량은 급증시켰지만, 그 어둠의 그늘에는 대량해고와 공장폐쇄와 노동조합 탄압이 있었다. 니버는 디트로이트의 현실에서 산업화의 비인간화를 목격했고, 이를 교정하기 위해 실천했다. 실업자들에게 직업을 알선해 주고, 기업가들의 편을 들었던 디트로이트 시당국에 맞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했고, 파업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비상위원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디트로이트의 목사 ‘라인홀드 니버’의 얼굴에, 그와 동시대를 살며 포디즘의 노예요 부품으로 전락한 노동자의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했던 ‘찰리 채플린’의 얼굴과, 포디즘의 원조이자 자동차 왕인 ‘헨리 포드’의 얼굴이 겹쳐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1922년, 여전히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를 거느리고 있던 포드는 이제 창당한 지 얼마 안 되는 독일의 볼품없는 한 조그마한 정당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기부한다. 그 정당이 그의 평생 신념과 일치하는 노선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반(反)노동조합, 반사회주의, 반유대주의’. 정당의 이름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 바로 히틀러의 나치당이었다. 16년 뒤 포드는 이제는 집권당이 된 나치당에게서 대십자훈장을 받는다.
헨리 포드에 대해 미국의 유머작가이며 영화배우였던 윌 로저스는 1920년대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는지, 괴로움을 주었는지 알려면 백 년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그가 말한 100년의 시간이 점점 더 다가오고 있다. 도움일까 괴로움일까, 아니면 둘 모두일까?
2) 1527년 6월 21일은 이탈리아의 위대한 정치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살인적인 마키아벨리’(셰익스피어), ‘악의 교사’(리오 스트라우스)라는 저주에서부터 ‘공화주의의 대변자’(스피노자·루소)라는 찬양까지, 그와 그의 <군주론>에 대한 양극단의 평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5월 3일 아홉 번째 글에서 말한 것처럼, “이 세상 모든 약자들을 품에 안은, 약자들의 진정한 수호성자”인 마키아벨리에게 정의란 강자와 약자의 ‘콘비비오’(convivio, 상생)를 기본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최장집 선생의 지적처럼 마키아벨리는 “실제로 귀족보다 민중을 중시한 민주주의자”였다.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독자라면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이 좋은 길잡이가 될 법하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서문을 쓰고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가 탄탄한 번역에서 친절한 해설까지 꼼꼼하게 책임진 책이다. “제대로 된 신생 군주란, 국가를 장악하고 개혁하며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불가피성(네체시타)이 요구하는 과업을 실천적 이성(프루덴차)을 통해 이해하고, 운명의 힘(포르투나)에 수동적으로 굴복하는 대신 비르투를 가지고 그 과업을 완수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박상훈 박사의 해설의 한 예다.
그렇다면 그 모든 비난과 오해와 논쟁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 또다시 마키아벨리인가. 최장집 선생은 마키아벨리가 “한국 정치를 바꾸는 해독제 같은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서문에서 그는 “정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상주의.도덕주의의 전통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법과 그 실천의 내용 속으로 깊숙이 침윤되면서 정서적 급진주의를 창출하고, 쉽게 교조주의를 만들어 민주주의를 급진화하는 원천으로 작용해 왔다”고 진단한다. (존재하는) 갈등을 부인하고 (존재하지 않는) 통합을 강조하면서 결과적으로 갈등 조절에 실패하고만 한국의 기성 정치와는 달리, 마키아벨리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 갈등을 조절하는 현실적 수단으로 정치를 바라본다. 즉 마키아벨리는 정치가 ‘있어야 할 것으로서의 당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바로 이런 현실주의적 접근이야말로 정서적 급진주의와 폐쇄회로 속의 교조주의에 빠진 한국의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다는 게 최장집 선생의 주장이다.
3. 맺음글 :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최초의 공중변소 설치(1904년)와 노상방뇨 금지
1) 이 세상에 도시가 출현한 이래 분뇨 처리 문제는 도시 생활의 대표적인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일찍부터 동아시아에서는 도시와 농촌이 생태적인 보완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 문제를 조금은 경감시킬 수 있었다. 바쿠후 시대 일본 에도(江戶)에서는 분뇨 장사꾼들이 돈을 내고 분뇨를 쳐갔는데 귀족의 것이 평민의 것보다, 남자의 것이 여자의 것보다 비쌌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이 <예덕선생전>을 보면, 조선시대 한양에도 분뇨 수거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 덕분에 분뇨 문제가 심각하게 부각된 적은 없었다. 길 위에 쇠똥.말똥.개똥 등 똥 천지이던 환경도 도시 거주민들의 분뇨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했다.
1880, 90년대만 해도 서울 거리는 오물투성이였다. 여기저기 몰래 실례를 해 놓은 이들 때문에 늘 악취가 진동했다. 길거리에 공중변소가 없어 급하면 아무데서나 볼일을 보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요강에 오물을 담아 놓은 뒤 청계천에 몰래 흘려보내기도 했고 아예 청계천에서 직접 볼일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순사가 청계천 근처에서 단속에 나섰을 정도였다고 한다.
1897년 독립신문은 길거리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나라에서 ‘공립 뒷간(공중화장실)’을 설치해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경무청에서는 어른 아이를 막론하고 일절 길가에서 변을 못 누게 하는 칙령을 내렸을 뿐 공중변소가 설치되진 않았다. 공중변소가 처음 생긴 것은 1904년(광무 8년) 6월 21일이다. 서울 거리에 공중변소가 설치되고 노상방뇨가 금지되었다. 대대적인 거리 정비를 위해 ‘위생청결법’이 제정되었다. 위생청결법에 따라 서울 남문 밖과 동문 밖의 한 모퉁이가 오물기지로 선택됐다. 또 인분 회사인 ‘한성위생사’를 설립해 거리 곳곳에 설치된 공중변소에서 나오는 오물을 차로 운반하게 했다. 위생청결법의 주요 내용은 이렇다.
① 각 호주에게 매일 쓰레기를 소제(청소)케 하되 준수치 않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
② 분뇨통을 분급(나눠 줌)할 것이니 법에 의하여 시행케 하도록 한다.
③ 우물의 불결로 질병이 발생하니 금후로는 우물을 청결케 한다.
④ 공중변소를 만들 것이니 모두 그 변소를 이용하고 가로변의 방뇨는 엄금한다.
똥과 오줌이 더욱 강력하게 국가의 관리대상이 된 것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령으로 위생정책이 시작되면서부터이다. 통감부는 집집마다 화장실 설치를 강제하고 통이 차면 돈을 받고 수거해갔다. 문제는 ‘똥통을 집에 만들게는 했으되 수거 등 행정 실무체계는 준비되지 않았다’는 데서 발생했다. 집집마다 쳐내야 할 똥이 가득하니 제 돈 내고 제 똥 먼저 치워 달라고 사정해야 할 판이었다. 혹시라도 오물이 집 밖에 새면 경찰들 등쌀에 살 수 없었다고 한다. 근대적 위생의 이름으로 강요된 똥의 관리는 조선인들에게 똥을 먹거리를 가져다주는 거름이 아니라 불결하고 불편하며 경찰의 처벌을 부르는 무서운 존재로 각인시켰던 것이다.
1932년 7월 종로경찰서는 종로 대로변의 상점에 대한 전수 조사에 나섰다. 1535호에 달하는 상점에 변소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고, 경찰은 한 달 내에 변소를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한 달쯤 뒤 경찰은 그때까지 변소를 설치하지 않은 735호의 상점을 적발해 2~3일 내에 지시를 이행하지 않으면 엄벌에 처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발했다. 상점 주인들은 부랴부랴 비좁은 가게 한 구석을 잘라내어 옹색한 변소를 만들었다. 경찰은 한 달 사이에 1535개의 변소를 만드는 실적을 올렸다고 한다.
2-1) 노상방뇨는 ‘경범죄처벌법’에 따라 처벌대상에 속한다. 1963년 12월 17일부터 시행된 경범죄처벌법 제3조(경범죄의 종류) 12(노상방뇨 등)를 보면, “길, 공원, 그 밖에 여러 사람이 모이거나 다니는 곳에서 함부로 침을 뱉거나 대소변을 보거나 또는 그렇게 하도록 시키거나 개 등 짐승을 끌고 와서 대변을 보게 하고 이를 치우지 아니한 사람”은 1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의 형으로 처벌한다고 되어 있다. 노상방뇨와 관련한 일화를 소개한다.
2010년 11월 서울 도봉경찰서는 골목길에서 노상방뇨를 하던 중 상대방 소변이 자신의 손에 묻었다며 시비를 벌이다 상호 폭력을 행사한 40대와 50대 두 사람을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두 사람은 같은 일행으로 술을 마시고 좁은 골목길에서 함께 노상방뇨를 하다 실수로 오줌을 튀게 해 손등과 바지에 묻힌 것이 시비가 돼 서로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고 한다. 한편 2015년 6월 축구 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길에서 경찰을 만나 깜짝 놀랐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지인들과 나이트클럽에서 놀다 숙소로 돌아가던 호날두, 자동차 옆에서 노상방뇨를 하다 순찰 중이던 경찰에게 딱 걸린 것이다. 하지만 초범인 호날두는 무사히 풀려났다고 한다.
아무튼 노상방뇨는 이를 막는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곳곳에서 속출하는 걸 보면 세계적인 문제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있다. 한 예로 나이트클럽 밀집지역인 상파울리 거리에서 자주 발생하는 취객들의 노상방뇨를 줄이기 위해 독일 함부르크시가 고안한 아이디어는, 특수 코팅용액을 벽에 칠해 취객이 노상방뇨를 할 경우 자신에게 되돌아가도록 한 것이다. 부정적인 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조하지 말고 “아예 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취지라고 한다. 암스테르담의 스히폴 국제공항 남성용 소변기에 사용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파리 스티커’도 인상 깊은 아이디어다.
2-2)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 문구는 누가 만든 걸까? 바로 ‘화장실문화시민연대’(약칭 화문연, 상임대표는 표혜령)의 작품이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화장실 실태조사를 한 결과, 10개 중 7개의 화장실이 ‘불결/불편/불쾌/불량/불안’이라는 이른바 ‘5불’ 화장실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깨끗한 화장실을 위한 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표혜령은 1999년 12월 13일 ‘화장실문화시민연대’를 만든다. 1904년 한성에서 ‘위생청결법’이 시행되어 공중변소가 생긴 이래 95년만의 일이었다.
화문연의 초기 활동은 그림/명시를 통한 캠페인에 초점을 두었다. 그때만 해도 화장실은 원래 더럽고 지저분한 곳이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깔려있었기 때문에 활동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 번은 “여러분의 세금으로 지어진 공간입니다. 내 집처럼 소중하게 사용하세요”라 적힌 스티커를 몇 개 제작해 가까운 지하철역 화장실에 붙이고 있으니 청소 아줌마가 말렸다고 한다. “여기에는 개돼지만도 못한 인물들이 오기 때문에 이런 걸 붙여도 소용없다”고. 일주일 쯤 지나서 가보니 스티커엔 낙서들이 가득했다.
두 번째로 생각한 표어는 “청소하는 분들을 울리지 마세요. 우리가 뱉은 침, 담배로 청소하시는 분들이 우신답니다”였다. 관리인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였다. 실제로 화장실이 너무 더러워 청소하다가 토하고 우신다는 휴게소 청소원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만든 표어였지만, 역시 효과는 없었다. 그러다가 세 번째로 떠오른 문구가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였다. “홀로 있을 때의 아름다움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다”라는 공자의 말에서 착안한 이 표어는 예상 밖의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고리타분함을 뜻하는 ‘공자님 말씀’과는 달리, 당시 변화는 가히 혁명에 가까웠다. (※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는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별 힘을 못 쓴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네 머리 위에 CCTV 있다”까지 등장했을까.)
상파울리 거리, 스히폴 국제공항, 화문연의 표어 등 이런 생활 속 사례들을 통해서 작은 디자인 아이디어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수용자의 행동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변화시키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며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