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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작은 역사 이야기 '오늘'] 15. 6월 16일 ‘모두를 위한 약속’과 ‘독재를 싫어한 비운의 두 천재’

 

조현연 (정의당 부설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6월 16일 ‘오늘’의 주제는 (1) “‘모두를 위한’ 약속, 신뢰의 물꼬를 트다”와, (2) “독재를 싫어한 비운의 두 천재”이다. <‘모두를 위한’ 약속, 신뢰의 물꼬를 트다>에서는 ①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1998년)과 ②진보정치 혁신을 위한 진보정의당의 ‘7가지 대국민 약속’(2013년)과 ‘정의당 스토리’를 다룬다. <독재를 싫어한 비운의 두 천재>에서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①시인 김수영(1968년)과 ②물리학자 이휘소(1977년)의 죽음과 삶에 대해 살펴본다.

 

1. ‘모두를 위한’ 약속, 신뢰의 물꼬를 트다

 

1)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

 

1998년 6월 16일 83세의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트럭 50대에 소 500마리를 싣고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17세 때 현재 북한지역인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의 고향집에서 누이를 시집보내려고 소를 판 부친의 돈 70원을 몰래 들고 가출한 실향민으로, 현대라는 세계적인 기업을 이룬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날 오전 임진각에서 정주영 회장은 “1마리의 소가 1,000마리의 소가 돼 지난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갑니다”, “이번 방북이 단지 한 개인의 고향 방문을 넘어 남북 이 같이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라고 그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적십자사 마크를 단 흰색 트럭들에 실린 소들이 판문점 북측지역을 먼저 넘었고, 민간인으로서 처음으로 출입증을 발급받은 정 회장은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을 지나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4개월 뒤인 10월에는 2차로 501마리의 소떼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었다. 현대그룹은 소떼 방북을 위해 트럭과 사료를 포함하여 41억 7,700만원의 비용을 부담했다. 2차 방북 때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0월 30일 밤 정 회장 숙소인 백화원초대소를 찾아 ‘깜짝 면담’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금강산관광 외에도 북한 연안에 대한 남북 공동석유 시추작업 등 경협사업이 논의되었고, 면담은 45분간 진행되었다.

 

소떼 방북의 역사적 장면은 미국의 뉴스 전문 채널인 CNN에 생중계되었으며, 외신들도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남북한의 휴전선이 개방되었다고 보도하였다.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핑퐁외교가 있었다면, 남한과 북한 사이에는 ‘황소 외교’기 있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정주영의 소떼 방북은 당시 외환위기 직후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 남북관계가 풀리고 민간차원의 경제협력과 교류가 증가할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1차 방북에서 정 회장은 6월 23일까지 8일간 북한에 머물면서 북측과 금강산 관광개발사업 추진, 서해안 공단 사업 및 전자 관련 사업 등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2차 방북 직후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어 1998년 11월 18일 ‘금강호’가 첫 출항을 했다.

 

이처럼 1,001마리 ‘소떼 방북’은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는 기념비적 사건으로서 의미를 갖고 있으며, 또 세계적인 미래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기 소르망은 냉전 해체로 상징되는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1000+1’, 애초 계획에서 추가된 1마리의 황소는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정주영의 의지였다. 더구나 정주영이 몰고 간 소떼 1001마리에는 작은 비밀이 숨어 있었다고 한다. 북한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주고 싶어서 1차로 보낸 500마리 중에 임신한 암소를 상당수 섞어서 보낸 것이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모두를 위한 꿈을 꾸었던 거인이 남긴 유품은 낡은 텔레비전, 면장갑 그리고 생전에 신던 구두 한 켤레였다.” 2013년 6월 어느날 중앙일보가 쓴 기사의 한 자락이다.

 

(※ 2007년 6월 16일, 종군기자 출신으로 34년간 감옥생활, 40년 넘게 비전향 장기수로 있다가 1993년 3월 19일 최초로 북으로 송환된 리인모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

 

2) 진보정치 혁신을 위한 진보정의당의 ‘7가지 대국민 약속’과 ‘정의당 스토리’

 

2013년 6월 16일 서울 구로구민회관에서 진보정의당(공동대표 노회찬.조준호) 제2차 당대회가 개최, “오늘 위기는 진보정치가 자초했다. 국민과 담을 쌓고 아집에 사로잡혔고, 민생에 힘쓰라고 준 작지만 소중한 권력을 정파와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느라 내동댕이쳤다”고 자성하면서, <“더 가까이, 더 아래로” ‘모두를 위한 복지국가, 평화로운 한반도’를 위한 7가지 약속> 채택에 관한 건, 지도집행체계 개편 당헌개정안 등을 통과시켰다.

 

진보정의당의 7가지 대국민 약속의 내용은 이렇다. : ①오만과 독선을 버리고 뼈를 깎는 혁신의 길을 가겠습니다 ②협소함을 벗고, 모든 일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더 넓게 대변하겠습니다 ③한반도의 위기를 타개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④대한민국 대전환을 위한 새로운 국가비전 ‘모두를 위한 복지국가’를 제안합니다 ⑤‘정치인들만을 위한 정치’를 ‘국민을 위한 정치’로 바꾸기 위해 정치대개혁에 착수할 것입니다 ⑥패권주의를 일소하고 문턱 없는 정당, 미래세대를 길러내는 정당으로 거듭나겠습니다 ⑦연대의 새 정치로 진보의 재도약을 이뤄내겠습니다.

 

진보(정치)의 미래를 새롭게 다시 열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게 급선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진보정의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전략구상팀 세미나에 초청된 정치심리학자 이상신 박사의 발표와 토론 내용(<전략구상 1차 보고서>에 수록)은 이와 관련해 많은 시사점을 준다. 요약하면 이렇다.

 

(1-1) 국민의 신뢰는 일회적인 정치적 이벤트나 수사로는 얻을 수 없다. 유권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정책을 개발하는 것, 공감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며 정당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또 선거에서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유권자는 좋은 정책을 내세운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지하는 정당의 정책을 좋다고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2) 즉 아무리 훌륭한 컨텐츠를 제시해도, 사람들이 그 컨텐츠의 내용을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가면서 정당과 정치인을 판단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대신에, 사람들은 미리 내려놓은 평가에 맞춰 개별적 사안을 인식한다. 말하자면 정의당의 정책이나 제시하는 비전이 나빠서 정의당에 대한 평가가 낮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의당에 대한 평가가 이미 낮기 때문에, 그 어떤 정책과 정강을 내놓아도 부정적인 평가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2-1) 따라서 대중적 신뢰 회복을 위한 작업의 첫 번째 목표는 정서와 고정 관념을 바꾸는 것, 다시 말해 정의당을 ‘좋은 정당’ 또는 ‘우리 정당’이라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즉 정의당의 스키마(schema)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 첫 단추는 7가지 대국민 약속에서 밝힌 대로 “한 치의 성역도 남기지 않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듭나는” 전면적인 혁신의 길을 걷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2-2) 한편 정의당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인식의 틀을 변화시키는 것, 즉 스키마의 변화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정의당이 좋은 정당이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을 넘어, 정의당과 유권자들이 하나의 스토리(story)를 공유하고 그 안에서 서로의 역할을 나누어 맞는 롤플레잉(role-playing)의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즉 당의 정책들과 이미지, 그리고 당의 간판 정치인들을 하나로 묶는 ‘스토리’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치인, 혹은 정당이 가지고 있는 흥미진진한 스토리는 단순히 이야기의 재미가 아니라 국민들이 정치를 인식하고 참여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끼친다. 사람들은 통계 수치보다는 스토리를 더 잘 기억하고 관심을 갖는다. 정당과 정당, 그리고 정치인과 정치인 사이의 경쟁은 이 스토리들 사이의 경쟁이기도 하다. 훌륭한 스토리, 그리고 공유할 수 있는 스토리를 가진 쪽이 이 경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3-1) 우리가 익숙하게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프레임(frame)이라는 게 있다. 그런데 이 개념은 메시지의 전송자, 미디어, 수신자가 서로 분리된 주체로 존재하는 것을 상정한다. 이 프레임 이론에서 수신자는 어디까지나 수동적인 존재일 뿐이며, 자신에게 제시되는 프레임 자체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현실의 수신자들, 특히 인터넷과 SNS가 본격적으로 정치적 소통의 중심에 놓이게 된 후의 수신자들은 그렇게 수동적인 존재들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스키마에 따라 정보를 받아들이면서, 같은 네트워크에 소속된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정보를 교환하는 과정을 거쳐 그 정보를 평가하고 새로운 해석을 생산한다.

 

(3-2) 이런 이유 때문에 프레임보다는 롤플레잉이라는 개념으로 정치와 유권자가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한다면, 롤플레잉은 하나의 스토리를 정치 리더와 팔로워가 공유하면서, 그 스토리 안에서 서로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분담하고,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스토리를 재생산해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즉, 롤플레잉은 스토리의 적극적인 공유와 재생산의 과정이다. (효과의 긍정성 여부를 떠나서, 과거의 ‘노사모’나 현재의 ‘일베’가 롤플레잉의 나름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4-1) 진보정당의 위기는 바로 이 롤플레잉 관계를 수립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진보정당은 국민과 어떠한 스토리도 공유하지 못한다. 한국의 정치과정 속에서 진보정당은 스스로가 맡아야 할 역할도 찾지 못했으며, 소수나마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에게도 그 지지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근거로 삼을 스토리와 역할을 제공하는 데 실패했다.

 

(4-2) 이 대목에서 정의당의 과제는 명확해진다. 유권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스토리를 개발하고, 그 안에서 유권자와 역할을 같이 해야 한다. 정의당은 주인공과 악당과 플롯과 기승전결이 있는 스토리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 이야기는 유치할 정도로 단순하면서도 재미있고, 피아가 선명하며, 미래 전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 이야기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밖으로 열린 것이어야 한다. 정의당의 이야기를 공유하게 된 유권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결말을 향해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스토리 개발이 필요하다.

 

(5) 정의당은 조직을 강화하고, 그 조직을 통해 진보의 스토리, 진보정치 혁신의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또 설득시키고 롤플레잉을 통해 확산시켜야 한다. 잘 기획된 정의당의 스토리, 그리고 그 스토리를 공유할 ‘조직’과 ‘네트워크’, 이 두 가지가 갖추어진다면 사람들의 생각을 과연 바꿀 수 있을까?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한다.

 

2. 독재를 싫어한 비운의 두 천재,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다

 

1)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 시인 김수영의 죽음과 삶

 

1968년 6월 16일 한국의 대표적인 참여 시인 김수영이 술에 취해 귀가하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48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다.” 김수영을 그리며 신동엽이 조사(弔辭)에 적은 글귀이다.

 

“검열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이미 존재하며, 자기 검열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검열이다.…가령 불평은 있지만 검열 때문에 불평을 말할 수 없는 오웰의 <1984>보다 불평 자체를 느끼지도 못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더 끔찍한 세계다.” (1960년 9월 20일 김수영의 일기)

 

시인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꿈을 추구하지만 시가 되는 순간 그것은 가능한 현실로 바뀐다. 독자는 그 시로부터 새로운 현실을 보고, 느끼게 된다. 이러한 새로움을 보여주는 시의 언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운 우리말이며 이러한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 시인의 임무라고 김수영은 말한다.

 

김수영은 자신의 시세계를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극복한 곳에 자리하고 싶었던 시인이다. 현대 문명과 현실을 비판하던 서정적 모더니스트에서 자유와 저항을 부르짖던 참여시 작가로, 모질고 격한 비바람 같았던 우리 역사와 함께 서서 시대와 함께 변모하고 고뇌했다. 1950년대의 지적 번민 속에서 성숙해온 그가 본격적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은 1960년의 4월혁명이다. 여기서 그는 ‘평등한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유를 위한 혁명’에서 시적 열정을 얻는다. 강렬한 현실비판과 불의에 맞선 저항의 정신에 뿌리박은 시적 탐구는 그로 하여금 1960년대 참여파 시인들의 전위적 역할을 담당하게 한다.

 

김수영 사망 1주기를 맞아, 김동리와 박목월 등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그를 추모하고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 도봉산 기슭에 시비를 세운다. 문인들과 독자들로 구성된 290여명의 사람들이 십시일반 모아 만든 성금을 바탕으로 건립된 김수영의 시비에는 1970년대 이후, 우리 시의 새로운 길을 열게 한 김수영의 대표작이자 그의 마지막 작품 시 <풀>이 새겨져 있다. 나약하고 수동적 상태의 민중들의 삶이, 불의와 독재에 맞서 싸우는 강인한 모습으로 전환되는 것을 ‘풀’을 통해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풀이 눕는다 /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은 눕고 / 드디어 울었다 /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 다시 누웠다 /…/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2)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의 죽음과 삶

 

“내 밑에 아인슈타인도 있었고 이휘소도 있었지만 아인쉬타인보다 이휘소가 더 뛰어났다.” 오펜하이머 전 미국 프린스턴연구소장이 한 말이다. 1977년 6월 16일 한국이 낳은 천재과학자이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이휘소가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학회 참석을 위해 길을 나섰다가 안타깝게도 마주 오는 트럭과 정면충돌해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지고 만 것이다. 이휘소는 1972년부터 페르미가속기 연구소 이론물리학 부장으로 있으면서? 당대의 입자물리학계를 이끈 최고의 물리학자였다.?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핵개발을 돕다 한국에서 죽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픽션은 픽션일 뿐 많은 부분 사실과 다르다.

 

1971년 여름 이휘소는 한국과학원 정근모 부원장과 함께 한국에서 물리학 여름학교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그의 구상은 상당히 구체적이었지만, 한국에서 독재체제가 강화되는 것에 큰 우려를 표하면서 모두 없었던 일로 하자면서 이런 편지를 보낸다.

 

“위수령 발동, 학생운동 탄압 등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로 우리가 추진중인 여름학교 사업을 재고하게 됩니다.…여름학교의 책임을 맡게 된다면 내가 한국의 현 정권과 그 억압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까 걱정이 됩니다. 참으로 난처한 입장입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과학 발전을 위하여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이러한 처사들에 실망되어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에서 이에 관한 초청이 오더라도 수락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엉뚱한 짓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한국 국민의 장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1972년 10월 박정희가 10월유신을 선포하자 이휘소는 외국인 동료를 대하기가 부끄럽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그리고 가끔 모국 방문 학술회의나 하계 심포지엄의 연사 초청 권유에 대해서는, 그때마다 박정희가 독재를 계속하고 있는 한 말도 꺼내지 말라고 단호히 거절하곤 했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인 강주상(고려대 물리학과 명예교수)은 핵무기에 대해 이휘소가 “핵무기는 언젠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특히 독재가 행해지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면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피력했다고 회상한다.

 

이휘소가 사망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를 아는 사람들은 1~2년 안에 아마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1979년의 노벨물리학상은 표준모형을 구축한 공로로 스티븐 와인버그, 글래쇼, 살람이 받았다. 이들의 이론을 증명한 벨트만과 토프트는 199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이휘소는 이들의 연구에 영감을 주거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주고, 수학적으로 증명해줌으로써 노벨상을 받는 데 크게 기여했다. 와인버그는 “내가 노벨상을 받은 것은 이휘소의 공이었다”고 영광을 돌렸고, 살람은 “이휘소는 현대물리학을 10여년 앞당긴 천재이다. 이휘소가 있어야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2006년 1월 20일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2005년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이학 분야 헌정 대상자로 이학 분야에 이휘소(1935∼1977) 박사를 선정했다. 이휘소와 함께 선정된 사람은 의·약학 분야에 장기려(1911∼1995) 박사, 선현(先賢) 분야에 조선 후기 천문학 발전에 기여한 서호수(1736∼1799) 등 2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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