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연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6월 3일 ‘오늘’은 <6월 3일의 대한민국과 학생운동>과 <죽음에 대하여>를 주제로 이야기한다. <6월 3일의 대한민국>에서는 ①1964년 6월 3일-한일회담 반대 6.3항쟁 ②1991년 6월 3일-‘정원식 밀가루 봉변 사건’를, <죽음에 대하여>에서는 ①‘잊혀진 독립운동가’ 석정 윤세주 ②‘존엄사’와 ‘닥터 데스’ 잭 케보키언를 다룬다. 맺음글에서는 한.일 양국의 두 정상이 ‘만주국의 후예’라는 오래된 인연으로 얽혀 있는 사이라는 것을 말하려 한다.
1. 6월 3일의 대한민국과 학생운동 : 1964년과 1991년
1) 1964년 6월 3일 - 한일회담 반대 6.3항쟁
1964년 6월 3일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6.3항쟁이 전개되었다. 한일회담은 1951년부터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이 타결되기까지 14년간 총 7차례에 걸쳐 있었던 대한민국과 일본 정부 사이의 일련의 협정을 말한다.
1961년 11월 박정희.이케다 회담에서 한일회담 촉진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어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일본 외상) 간에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를 작성하여, 청구권 문제의 해결원칙에 합의를 보았다. 일본이 한국에 무상으로 3억 달러를 10년간 지불하는 동시에 정부차관 2억 달러를 연리 3.5%, 7년 거치 20년 상환조건으로 제공하며 1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1963년 7월 김용식(외무장관)과 오히라 간의 회담에서는 어업문제의 조속 해결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한일회담의 추진은 순조롭지 않았다. 학생들의 반대 투쟁에 대한 탄압과 탄압에 맞선 저항은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격렬했다. 1964년 5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한일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개최했는데 이는 6.3항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학생회장이자 ‘대일굴욕외교반대 서울대투쟁위원장’인 김덕룡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식농성에 참여하는 학생들 수가 점점 늘어갔다. 농성 현장에는 교수들과 시민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격려하고 먹을 것을 놓고 갔다. 서울대 문리대에서의 단식농성은 다른 학생들을 자극하였다. 6월 2일 고려대, 서울대 법대, 서울대 상대생들이 가두로 진출하여 데모를 주도하자 서울의 각 대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곳곳에서 시위를 전개했다. 6월초 공화당 김종필 의장이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자 6월 3일 정오를 기해 학생들은 거리 시위를 벌였다.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온 서울 시내 1만 2000명의 학생들은 도처에서 경찰과 충돌, 유혈극을 벌이면서 도심으로 진출하였다. 몇몇 대학생들은 대학에서 박정희, 김종필, 일본 수상 이케다, 민생고(民生苦) 화형식과 오일육(吳一陸) 피고에 대한 모의재판을 열고 박정희 정권을 성토하였다.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이던 법대 학생회장 김재하를 위원장으로, 부위원장 이경우(법대), 박정훈(정경대), 이명박(상대) 등의 주도 아래, 연세대, 서울대생과 함께 서울 18개 대학 1만5천여 명 등 총 3만명 가량이 거리로 몰려나와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기까지 했다. 윤보선은 이를 “마치 4.19 학생의거 당시를 연상케 했다”고 묘사하였다. 대학생 7~8000명이 중앙청 앞으로 몰려들면서 세종로 일대는 시위대로 물결쳤다. 중앙청 앞의 바리케이드는 이미 무너졌고 경찰은 청와대로 올라가는 통의동 앞에 저지선을 만들어놓았다. 학생들의 데모가 격렬해지자 박정희는 6월 3일 밤 서울시 전역에 대해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 골자는 이렇다.
“지금 그들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에게는 헌법도 없고 국회도 없고 정부도 없습니다. 법 위에 있고 법 테두리 밖에 있는 방자한 그들의 난동으로 빚어지는 걷잡을 수 없는 혼탁 속에서 과연 무엇을 생산하고 무엇을 건설해 나가겠습니까, 실로 국가의 기본을 흔들고 망국의 씨를 뿌리는 철없고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그야말로 가난한 나라의 학생들이 타일의 웅비에 대비하기는커녕,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한다는 소위 현실참여가 바로 이것이라면 실로 가공할 모순이며 가증스러운 작폐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나는 결코 이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한국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민의에 의하여 수립된 정부가 그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입증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회에 일부 불순한 학생들의 오만과 불손의 파괴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한없이 조성될 만성적 정치불안을 우려하여 그 고질을 도려내어 차제에 데모 만능의 풍조를 발본색원할 방침인 것을 분명히 해두는 바입니다.”
박정희는 방송담화를 통해 6.3 시위를 “야당 정치인들의 선동이며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 공부에 매진해 달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윤보선은 “난국의 타개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치철학이 요구된다. 정국혼란이 일부의 정치인, 언론, 학생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할 정도로 박정희씨는 판단능력이 흐리고 정치철학이 없었던 것일까? 그의 발언은 대다수 식자층을 비롯한 애국 국민들에게 너무나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고 반박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인민혁명당’이 한일협정 반대 이슈를 선동하여 배후 조종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 전복을 기도한 반란 사건으로 규정하고, 시위 금지와 진압, 언론검열, 대학휴교, 주동자 검거에 돌입했다. 이 조치로 시위의 주동인물과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학생과 정치인, 언론인 등 1120명이 검거되고 이명박, 이재오, 손학규, 김덕룡, 현승일, 이경우 등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게 된다. 이른바 ‘남산(중정) 프레임’을 통해 ‘제1차 인혁당 사건’을 만들어내 레드콤플렉스를 자극한 뒤 학생들의 투쟁과 엮어버린 것이다. (고려대 상과대학 학생회장이던 이명박은 이명백으로 이름이 잘못 알려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까지 경찰이 찾아오고 수사망이 좁혀오자 스스로 자수하게 된다.)
계엄령이 선포한지 3일 뒤인 6월 6일 심야, 학생들에게 호의적이던 동아일보사에 무장한 군인들이 침입하여 위협 공갈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언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요, 탄압이며 나아가 언론 그 자체를 말살하려는 독재의 극치”라고 비난하였다. 서울 시내에 경찰과 계엄군이 투입되어 시위는 진압되었고 7월 29일 계엄령은 해제되었다.
(※ 지난 2015년 5월 31일 1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은 50년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공소사실에 관하여 범죄의 증명이 없다고 보아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법리를 오해하거나 채증법칙 위반, 판단 누락 등의 잘못이 없다”고 밝혔다.)
2) 1991년 6월 3일 - ‘정원식 봉변 사건’(‘6.3 외대 사건’)
“스승의 얼굴에 계란을 던지는, 아…위아래도 몰라보는 반동적인 패륜아들, 너희들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아느냐?” 1991년 6월 3일 정원식 국무총리서리가 취임을 앞두고 한국외국어대 교육대학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나오다가 학생들에게 밀가루·달걀 세례 등 봉변을 당한 뒤 한 말이다.
정원식 봉변 사건, 이른바 ‘6.3 외대 사건’은 정원식이 교육부 장관으로 있을 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불법화하고 1500여명의 전교조 교사들의 해직과 파면, 구속과 불이익 조치를 취한 데 대한 학생 운동권의 반발이었다. 그리고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과 이후의 연쇄 분신사건, 시위 도중 피신하다가 김귀정(성균관대 학생)이 사망하면서 노태우 정권과 교육부 장관 출신인 정원식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사건은 한 장의 사진과 마치 나라가 결딴난 것처럼 호들갑을 떤 언론의 왜곡보도로 인해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사회 분위기와 여론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당시 계란과 밀가루를 뒤집어 쓴 정원식의 사진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1991년 6월 4일자 기사 헤드라인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된 데 이어 일본, 미국, 프랑스, 캐나다 등 해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언론의 왜곡.과장 보도로 인해 외국어대 학생들과 학생운동권은 ‘스승도 몰라보는 반인륜적 패륜아’로 몰렸고,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져 나가면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이른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에 이어 이 사건을 계기로 ‘노태우정권 퇴진.민자당 해체’ 등을 주장한 ‘91년 5월투쟁’의 마지막 열기는 사그라졌다. 대학생들이 ‘스승의 얼굴’에 계란을 던진 이유 따위는 고려되지 못한 채 ‘패륜 논란’만 남았다.
노태우 정권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대적인 공세와 탄압을 펼쳤다. 6월 4일 보고를 접한 노태우는 “스승의 마지막 강의를 폭력으로 짓밟은 오늘의 학원폭력 상황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면서 “사회적 윤리와 도덕성, 인성을 회복하고 학원가에 만연한 그릇된 풍토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부총리 최각규는 “정원식 총리서리 폭행 사건은 단순한 학원폭력이 아니라 국가와 정부, 인륜에 대한 폭력”으로 규정, 관련 부처별로 장.단기 대책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검찰총장 정구영은 “검찰의 명예를 걸고 체제 수호 차원에서 강력하게 대처할 것”, “국가 공권력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며 폭행 주동자 및 가담자들을 가려내 엄단할 것을 서울지검에 긴급 지시했다.
‘스승의 마지막 강의를 폭력으로 짓밟은’, ‘국가와 정부, 인륜에 대한 폭력’, ‘체제 수호 차원’, ‘국가 공권력에 대한 중대한 도전’ 등의 표현은 왜곡과 과장의 극치를 잘 드러내준다고 할 것이다. 강단에 선 모든 사람이 스승이 될 수는 없다. 스승의 사전적 의미가 ‘가르쳐 올바르게 이끌어주는 사람’이라고 할 때, 정원식은 ‘스승’이 아니었다. 1991년 6월 8일자 한겨레신문은 <교권 꺾은 총리가 ‘스승 존경’ 바라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스승을 극도로 모독하고 스승의 모독에 눈물을 흘린 제자들마저 학교를 떠나게 했던 정원식 교수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이 나라의 재상이 되었다.…총리 스승에게 행한 달걀.밀가루 세례. 그것은 극도의 스승모독죄에 대한 업보가 아닐까? 언론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싶다. 2년전 극도의 스승모독에 대해서는 침묵했으면서 이 땅의 스승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고 스승과 제자에게 폭력을 서슴없이 자행한 장본인에 대한 달걀과 밀가루 세례에는 (왜) 그토록 예민한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언제나 강자의 편이 되어버리는 언론의 참모습을 다시 보게 된다.”
검찰과 경찰의 합동 수사본부가 조직되고 6월 5일 오전 외국어대학교 주변에서 검문검색을 시작, 교내 주변을 탐문수사하여 정원식 규탄시위에 참여한 학생 310명을 체포, 바로 연행하였다. 이 중 핵심 주동자 64명을 철야조사하였다. 학교 당국은 24시간도 안되어 수배된 5명의 학생을 제적처리했다. 순식간에 ‘대역죄인’이 돼버린 학생들에게는 어떠한 반론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계란과 밀가루 투척을 주도한 학생들은 학교당국으로부터 제적 등의 징계를, 공안당국으로부터는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쫓기는 신세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사건 직후 이어진 6월 20일 시·도 광역의회 선거에서 집권 민자당은 전라남도, 전라북도, 광주직할시 등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승리하면서 정국주도권을 굳건히 유지할 수 있었다.
정원식에게 밀가루와 계란을 투척했던 당시의 외대 학생들이 명예회복된 것은 15년여의 시간이 흐른 2006년 12월 14일이었다.
2. ‘죽음’에 대하여
1) ‘잊혀진 독립운동가’ 석정 윤세주의 사망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이름의 독립운동가인 석정 윤세주. 1919년 11월 9일 18세의 나이로 그는 중국 길림에서 죽마고우인 약산 김원봉 등과 조선의열단을 결성하고 무장항일투쟁에 나선다. 의열단은 암살대상으로 ‘7가살(七可殺)’, 즉 ①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군부수뇌 ③대만총독 ④매국적(賣國賊) ⑤친일파 거두 ⑥적의 밀정 ⑦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 등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①구축왜노(驅逐倭奴) ②광복조국(光復祖國) ③타파계급(打破階級) ④평균지권(平均地權) 등 4개 항목을 목표로 활동을 시작했다. 1932년 10월 의열단은 중국 국민당정부의 지원 아래 조선혁명간부학교를 개설한다. 이때 윤세주는 10여세 아래의 후배들과 더불어 이 학교에 1기생 26명중의 한 사람으로 입학했으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 이육사도 그의 권유로 함께 입학했다.
1938년 윤세주는 조선의용대(총대장은 김원봉, 후에 조선의용군)를 창설하고 정치위원을 맡았다. 중국 본토에서 처음으로 독립적인 한인무장부대가 건설된 것이다. 이 무렵 조선의용대에서 손꼽히는 이론가였던 윤세주는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겨냥해 “우리는 과거 2년 동안 실속이 없는 빈 껍질의 외교활동이나 이론에 그치는 입씨름을 원치 않고, 오직 실질적으로 남북의 각 전선에 참가하여 우리의 모든 역량을 다해서 공작활동에 힘썼을 뿐”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에게 구체적인 현장 실천은 활동가를 단련시켜 주는 용광로였던 것이다.
1940년 11월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는 종래의 선전임무에서 벗어나 직접 전투에 참가할 것과 활동지역을 조선인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화북과 화중지역으로 옮기고 적 후방에서의 공작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결정은 민족혁명당 시절부터 북상항일을 주장해 온 윤세주와 청년대원들이 중국 국민당 지구에서의 활동을 바라온 김원봉에게 정치적 승리를 거둔 것이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조선의용대가 장제스 국민당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헤어져 박효삼과 함께 화북 지방으로 북상하여 마오쩌뚱의 팔로군과 공동으로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1942년 5월 일본 화북침략군은 주력 3만여 명을 동원하여 이른바 ‘5월소탕작전' 아래 중국 공산당의 태행산 근거지를 공격하였다. 이때 팔로군과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의 ‘5월소탕’에 맞서 ‘반소탕전’을 전개하였다. 이 전투야말로 연안지대에 있는 모든 혁명세력의 운명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싸움이었다. 1942년 6월 3일 태행산 전투에서 윤세주는 일본군 20개 사단 40만 명과 격전 끝에 숨졌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3.1운동의 선두에 선 열혈청년에서 의열단의 행동대원으로, 지방청년운동과 신간회지회의 주요 간부에서 다시 중국으로 망명, 단체통일운동과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의 활동,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의 창건, 오랜 친구이자 동지인 김원봉과 헤어져 마침내 태항산에 묻힐 때까지 42년간의 삶은 그 자체가 민족해방운동사의 한 단면이었다. 그는 항상 청년들과 생활하면서 청년들을 가르쳤고 또 청년들로부터 배웠다.
김영범 교수는 <윤세주,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무장독립운동의 최선봉에 섰던 인물이자 빼어난 혁명이론가였다고 윤세주를 평하며 이렇게 적고 있다.
“1920년대 이래로 독립운동 진영의 숙원이던 유일당적 대동단결체로서 민족혁명당을 탄생시킨 산파였고, 그 연장선에서 탁월한 조직가에 능란한 조정자 역할까지 책임지고 수행하였다. 넓게 열린 시야와 치밀한 논리로 뒷받침된 글들을 명징한 필치로 당내 최고의 이론가이자 신뢰받는 선전책임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의열단 운동사 17년의 시작과 끝을 약산 김원봉과 함께 열고 닫은 역전의 용장으로서 그 감투정신의 화신이었다. 선후 연결된 운동행로 속에서 그는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가 각각 설립.운영했던 간부훈련기관에서 적어도 200명 이상의 한인청년들을 정예의 항일투사로 길러내고 민족간부로 성장시킨 일급 조련사요, 존경받는 스승이기도 했다.”
“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기 바란다.” 윤세주가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동지들에게 남긴 마지막 절규이자 유언이었다.
2) ‘존엄사’와 ‘닥터 데스’ 잭 케보키언
2011년 6월 3일 적극적 안락사를 주장해 생명윤리에 관한 논쟁을 일으킨 미국의 의사, ‘닥터 데스’(Dr. Death) 잭 케보키언(Jack Kevorkian)이 사망했다. 안락사나 존엄사(death with dignity)라는 말이 나오면 빠질 수 없는 대표적인 운동가인 그는 의료진이 존엄사를 도와줘야 한다는 주장뿐만 아니라, 타인의 자살 조력을 엄격히 금지하는 미국에서 이를 직접 실천해 징역까지 산 사람이었다. 존엄사란 조력자살(assisted suicide)이라고도 하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불치의 병으로 시한부 삶을 살면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환자가 스스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택하는 것을 말한다.
의료(Medical)와 자살(Suicide)의 합성어인 메디사이드(Medicide)란 말을 탄생시킨 인물이기도 한 케보키언은 적어도 130차례나 불치병 환자 등 타인의 자살을 도와줬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존엄사나 안락사를 반대하는 이들은 케보키언을 ‘닥터 데스’라고 부르며 그가 죽음을 선동하는 사악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안락사.존엄사 운동 진영에서는 용기있는 실천가로서 인정받고 있다. 그는 평소 “죽음은 죄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곤 했다. 케보키언은 치매나 암 등이 걸린 사람들이 자신이 육체적.정신적으로 망가지기 전에 삶을 마감하고 싶다고 도움을 청하면, 당사자에게 약물 주입 등을 통해서 편하게 삶을 마감하도록 도왔다.
그의 생애를 다룬 드라마 <잭을 모른단 말인가?(You don’t know Jack?)>를 보면, 존엄사를 결정한 사람들에게 케보키언이 약물 주입 등 모든 장치를 해준 뒤 스스로 그 스위치를 누르도록 하는 장면이 나온다. 케보키언 역을 맡은 알 파치노는 병원에서 보통 실시되는 소극적인 안락사, 즉 생명유지 장치를 뗀 뒤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의식을 잃은 불치병 환자에게 생명유지 장치를 분리한 상태는 환자에게 결코 평안하고 안락한 상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 상태는 보통 사람에게 먹을 것도 주지 않아 배고프고, 숨쉬기도 불편한 상황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케보키언은 왜 사람이 자신의 고통을 줄이고 존엄있게 죽을 권리를 가질 수 없느냐고 항변한다. 감동을 갖다 준 알 파치노는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시상식에서 알 파치노는 자기가 맡았던 역의 실제 인물을 소개했다. 병색이 완연한 케보키언 박사는 큰 박수를 받으며 좌석에서 일어났다. 알 파치노는 큰 소리로 말했다. “잭, 당신이 한 일이 전부 옳았어요!”
케보키언은 1999년 결국 자신의 존엄사 도움 역할과 관련해 기소되었고, 2급 살인죄 유죄 평결로 10~25년형을 선고받았다. 죄명은 계획적인 살인 및 자살방조와 통제 대상인 극약품을 사용했다는 혐의였다. 그는 살인이든 자살방조든 자신이 한 행위는 환자를 고통에서 구하기 위한 의사의 도리였으며 인간은 스스로 죽을 권리가 있다고 항변했다. 8년을 복역한 뒤인 2007년, 안락사와 관련한 어떠한 자살 행위에 대해 조언하거나 참여하지 않고, 또 조력 자살 절차를 부추기거나 토론하는 것도 금지한다는 조건으로 그는 가석방된다. 석방된 케보키언은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며 자신의 존엄사 신념을 계속 주장했다. 2011년 그는 간암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급속히 병세가 악화되어 8일 만에 숨졌다. 병원에 입원해 결코 생명유지 장치를 시도하지 않았고,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었다고 한다.
얼마 전 당대회를 통과한 정의당 신강령의 생애강령 말미에 존엄사 부분이 있다. 존엄사 합법화 관련 논쟁에는 개인의 자유와 생명의 존엄에 대한 가치판단이 충돌하고 있다.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속하는 것이며 죽음도 그 일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죽음은 삶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삶을 마감하는 한 일부이며, 치유 불가능한 병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가 삶보다 죽음이 낫다고 결정한다면 그의 선택을 존중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은 마지막 품위를 지키며 죽을 수 있고, 또 살아남은 가족들도 경제적 혹은 정신적,신체적 고통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생활패턴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든 인위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서는 안 되며, 삶이 자신의 결정과 의지로 주어지지 않은 것처럼 죽음 역시 본인의 선택이 아니라 자연과 하늘의 섭리라고 주장한다. 또 존엄사가 허용될 경우 낙태 허용과 마찬가지로 남용될 것이며 그 결과 사회적 빈곤층이나 노인들이 희생자가 될 위험을 지적하기도 한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삶의 주인공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것처럼, 죽음 역시 본인에게 선택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3. 맺음말
1) 멀고도 가까운 나라 일본과 ‘만주국의 후예들’
언젠가 누군가가 일본에 대해 멀고도 가까운 나라라고 한 적이 있었다. 두 나라를 지금 책임지고 있는 최고 권력자 두 사람의 ‘오래된 인연’을 들여다보면 실감이 나는 표현이다. 두 사람 모두 ‘만주국의 후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한겨레신문 김의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의 정치인 기시 노부스케를 아십니까? 1930년대 일본의 식민지 만주국을 실질적으로 건설한 사람입니다. 2차대전후 종전 뒤에는 A급 전범으로 체포 됐다가 극적으로 풀려났고 그 뒤로 일본 총리까지 역임한 사람입니다. 조선 반도의 청년 박정희는 만주국을 동경했습니다. 그리하여 혈서까지 써 가면서 만주 군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1961년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를 만나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는 유창한 일본어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떠올리며 구국의 일념에 불탔기 때문이다. 둘 다 만주국의 후예였기에 바로 통할 수 있었고 그 뒤 기시 노부스케는 박정희의 멘토가 됩니다. (2012년) 12월 16일은 일본이 총선을 치루는 날입니다. 승리가 거의 확실한 자민당은 아베 신조가 이끌고 있습니다. 그 아베 신조가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입니다. 그 3일 뒤 한국에서는 대선이 치러집니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한일 양국 모두에서 만주 인맥의 후손이 정권을 잡는 그런 결과를 낳게 될 겁니다.”
멸망한 청나라의 선통제였던 푸이(溥儀)를 피신시킨다는 미명 아래 빼내와 황제로 삼고, ‘왕도낙토(王道樂土) 5족협화(五族協和)’라는 기만적 구호 아래 일본이 괴뢰 만주국을 발족시킨 것은 1932년 3월 1일의 일이다. 박정희가 졸업한 만주(신경)군관학교는 일본이 중국의 동북3성을 장악한 다음 대륙경략의 차원에서 괴뢰국으로 세워놓은 만주국의 군관양성기관이었다.
“(20대의 한창 나이에) 박정희가 운명의 발을 내디딘 1939년의 만주는 가히 ‘동양의 서부’라고 할만한 상황이었다. 넓은 대지에서 갖가지 모습의 인간 군상들이 기회를 찾아 나름의 꿈을 펼치려 했던 당시 만주의 상황은 좋게 말하면 용광로요, 나쁘게 말하면 쓰레기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야만, 음모, 살인, 방화, 벼락출세, 떼돈벌기 등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이 연속되어 일어났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30년대 말의 만주는 공통된 분위기를 남겼다.…도덕적 원칙에 아랑곳없이 부패하기 쉬운 한국과 일본의 만주인맥의 공통점은 바로 1930년대 만주의 지울 수 없는 낙인이기도 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만주는 전쟁 확대에 열중한 일본에 의해 본격적으로 수탈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만주 경영을 지휘했던 일본 관료 중에는 만주국의 총무청 차장과 산업부 차장을 겸직하면서 괴뢰 내각의 실권을 쥐었던 기시 노부스케와 산업부 국장 시이나도 있었다. 이들은 후에 일본 안에서 막강한 만주인맥을 형성하였으며, 5?16 쿠데타 뒤에는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만주인맥과 손을 잡음으로써 한일국교 정상화의 성사에 큰 힘을 보태기도 한다.
1942년 3월 박정희는 중국인과 한국인 생도 240명 가운데 최우등생으로 졸업, 당시 만주 괴뢰국 황제였던 푸이로부터 금시계를 상으로 하사받았다. 그리고 ‘어전강연’이란 송사를 통해 천황과 푸이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는 선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박정희는 우등생에게 주는 특전으로 졸업과 동시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일본육사에서도 박정희의 성적은 뛰어나 졸업할 때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대신상을 받기도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본제국의 육군장교로 임관된 박정희 소위는 관동군에 배치되어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중국 북방전선에서 반일의 깃발을 격퇴하기 위한 싸움에 힘을 보태게 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첫째 박정희 대통령 못지않게 아베의 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는 ‘쇼와의 요괴’로 만주국 창설의 주역이고 A급 전범 출신으로서 정계에 복귀하여 전후 성장의 기틀을 다진 총리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부친은 외무대신을 지내고 총리 일보 직전에 건강문제로 좌절한 권세의 정치가이다. 이렇듯 화려한 혈통의 아베 총리는 지난 2013년 2월 미국을 방문하여 자신의 조부와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이 ‘절친’이었기 때문에 향후 한.일관계는 순항할 것이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둘째, 두 사람 모두 영국의 대처 총리를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으며, 보수주의에 기반을 둬 투철한 국가관, 안보, 애국심 등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아베 총리는 1980년대 대처가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영국령 포클랜드섬을 무력 방어했던 것과 자신이 중국을 상대로 동중국해에서 벌이고 있는 영토분쟁을 동일시했다. 아베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요즘 눈물이 많아졌다…대처 총리 영화(메릴 스트립 주연의 ‘철의 여인’)를 DVD로 봤는데 정말 감동적이었다”면서 그러나 ‘레미제라블’을 보고는 울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한편 가장 좋아하는 정치인으로 대처를 꼽는 박근혜 한국 대통령은 2012년 대선에서 아시아의 ‘철의 여인’으로 묘사됐다. 2007년에는 “한국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리더십은 바로 대처리즘”이라며 대처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처와 같은 ‘철의 여인’을 롤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많은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그런 이미지는 민주적 소통과 상충하기 때문이며 대처의 ‘두 국민 전략’은 사회적 긴장과 갈등을 높이면서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통합을 해치는 것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정치인과 교과서(Politicians and Textbooks)’라는 제목으로 박근혜와 아베가 고등학교 교과서를 자신들의 정책에 반영하여 재조명하고 있다는 사설을 실었다. 2014년 1월 14일자 경향신문이 게재한 관련 내용은 이렇다. 좀 길지만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그대로 인용해본다.
“아베는 문부과학성에 애국주의를 고취시키는 교과서들만 (검정) 승인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가 주로 우려하는 것은 2차 대전 시기에 대한 것으로, 그는 부끄러운 역사의 장(章)으로부터 초점을 이동시키고 싶어 한다. 일례로 그는 한국 ‘위안부’ 문제를 교과서에서 밀어내길 바라며, 또한 (중국) 난징에서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대학살을 축소하려 하고 있다.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가 일본의 전시 침공들을 지워버리고 위험한 애국주의를 부추기려 한다고 말한다.
박근혜는 일본 식민통치와 탈식민 이후 남한의 독재가 교과서에 반영되는 걸 우려하고 있다. 그는 일제 식민통치에 부역한 한국인들 문제를 축소하고 싶어 하며, 지난해 여름에는 한국 교육부에 새 역사교과서를 승인하게 밀어붙였다. 이 교과서는 일본에 협력했던 이들이 ‘강압에 의해 그랬을 뿐’이라고 쓰고 있다. (현재 한국의 전문가 집단과 엘리트 관료 중 다수는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가문 출신들이다.) 학자들, 노조들, 교사들은 박근혜가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비난해왔다.
아베와 박은 모두 전쟁이나 (친일) 부역에 민감한 가족적 배경을 갖고 있다. 일본의 패전 이후 연합국은 아베의 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를 A급 전범으로 체포했다. 박의 아버지 박정희는 식민통치 시기 일본군의 장교였으며 1962년부터 1979년까지 남한의 군사독재자였다. 두 나라에서 역사 교과서를 개정하려는 이런 위험한 시도들은 역사의 교훈을 위협하고 있다.”
2) 카프카와 “예술은 고통”
1924년 6월 3일 사르트르와 카뮈에 의해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는,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으로는 <변신>, <심판>, <성(城)>, <실종자>, <유형지에서> 등이 있다.
카프카는 평생 불행하게 지냈다. 프라하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던 독일인에게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같은 유대인들로부터는 시온주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배척당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친구에게 보낸 유서에서 자신의 모든 글을 불태워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인간의 불안한 내면과 세계의 불확실성을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그려낸 그의 작품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카프카 문학의 특징은 인간 운명의 부조리, 인간 존재의 불안을 통찰하여 현대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한다는 점이다. 카프카 전 작품의 중요한 테마는 인간의 죄, 그리고 법과 심판이었다. 카프카에게 글쓰기는 일상적 삶의 허위를 뚫고 진실을 찾으려는 투쟁이었다. 그런 연유로 그에게 “예술은 고통”이었던 것이다.
카프카가 스스로 ‘전설’로 부른 단편 <법 앞에서>는 ‘법’으로 들어가는 문을 지키는 문지기와 한 시골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시골사람은 항상 문이 열려 있는 법 안으로 들어가려고 평생 동안 온갖 노력을 쏟았음에도 죽는 순간까지 입장 허가를 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법은 언제나 열려 있음에도 시골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끝내 법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시골사람의 비극적 최후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던지는 걸까?
카프카에게 법정이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현세법의 법정이 아니라 양심의 법정이다. 그에게 인간은 현실세계에서 용감하게 진실에 직면하여 자신의 어리석음, 두려움, 나약함, 무력함을 직시하고 개선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망설임은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고통이기 때문에 망설이고 주저할 때 이는 죄악이며 고통이 된다. 스스로 가야 할 길은 나만이 갈 수 있으며, 아무도 대신 가줄 수 없다. 자신의 문학을 통해 카프카는 ‘빛의 세계’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 뱀발 : 1963년 6월 3일 오늘은 담배를 몹시도 사랑한 시인 ‘공초 오상순’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아침에 깨어나자마자 담배를 입에 물면 잠자기 전까지 손에서 담배가 떨어지는 날이 없을 정도로 애연가였다는 공초 오상순. 그는 세수할 때에도, 음식을 먹을 때에도, 주례를 설 때에도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담배꽁초를 연상시키는 공초(空超)로 호까지 바꾼 그는 하루에 9갑의 담배를 피우는 골초였다고 한다. 오상순이 <폐허> 동인이자 당대의 주당이었던 수주 변영로와 어느 날 밤 한강에 뱃놀이를 갔는데 손에 쥔 것은 단지 술 몇 병과 담배 두 보루였다는 것도 당시 널리 알려진 일화다. 이들은 그렇게 술에 취하고 담배에 전 채 휘영청 밝은 달을 벗 삼아 밤새워 문학을 논했다고 한다. “술이라 하면 수주를 뛰어넘을 자가 없고 담배라 하면 공초를 뛰어넘을 자가 없다”라는 유행어가 한때 1950년대 중반에 서울 항간에서 난무했다고 한다. 아무튼 오상순은 70세까지 살았다. 가히 ‘끽연계의 레전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지금 생존해 있다면 전자담배를 피는 기이한 장면을 보고 어떤 말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