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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작은 역사 이야기 '오늘'] 8. 4월 27일 ‘극과 극’

 

 

조현연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4월 27일 오늘은 <극과 극>이라는 제목으로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1994년 4월 27일 같은 날 이뤄진 만델라의 남아공 대통령 취임과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 총리 당선이다. 다른 하나는 부정선거 ‘때문에’ 하야한 3선 대통령 이승만과, 부정선거임에도 ‘불구하고’ 3선 대통령이 된 박정희다. ‘박근혜 불법대선자금 의혹’ 및 ‘박근혜 부정선거 시비’ 등을 염두에 두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맺음글에서는 베를루스코니와는 다른 삶을 살다 간, ‘경영의 신’ 마쓰시다 고노스케와 ‘마쓰시다 정경숙’에 대해 알아본다.


1. 첫 번째 ‘극과 극’ : 1994년 4월 27일 남아공의 만델라와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1) 남아공의 정신적 지주이자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

1994년 4월 27일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가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만델라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지도자로서 반(反)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운동, 남아공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을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반역죄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기도 했지만 26년만인 1990년 출소했다. 1994년 4월 27일 실시된 선거에서 ANC는 62%를 득표해 다수당이 되었고, 간선제 헌법 규정에 따라 국회는 만델라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였으며,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취임 연설에서 만델라는 이렇게 말한다. : “자유를 향한 여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따로 떨어져 행동할 경우 성공할 수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단합된 국민으로서 함께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화해와 국가 건설을 위해 함께 행동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평화를 누리도록 하자. 모든 사람이 일자리와 빵, 물 그리고 소금을 갖도록 하자. 다시는 이 아름다운 나라에 압제와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취임 후 만델라는 노벨평화상 수상자(1984년)인 데스몬드 투투 성공회 주교를 위원장으로 하는 ‘진실과 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RC)를 출범시킨 뒤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면서 피를 흘리지 않고 과거사 청산을 추진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흑인들의 인종차별 반대투쟁을 화형, 총살 등의 잔혹한 방법으로 탄압한 국가폭력 가해자가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친다면 사면하였다. 또 피해자 무덤에 비석을 세우는 등,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잊혀지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남아공은 극심한 흑백간 갈등을 겪지 않고 안정과 평화공존의 걸을 수 있었다.

 

1998년 10월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만델라 대통령에게 5권의 보고서를 헌정한다(2003년 6권과 7권 추가 발간). 활동 기간 중 21,290건에 달하는 피해자 진술서를 받았고, 그중 19,060건 정도가 인정됐으며 사면신청 과정에서 2,950명의 피해자가 추가됐다. 사면위에는 7,112명이 사면을 신청했고 2003년 3월 최종 보고서 6,7권이 완간될 당시 총 1200명이 사면을 받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조사대상은 ‘중대 인권침해’로 제한했는데, 그 내용은 ‘사람에 대한 살인, 유괴, 고문, 가혹행위를 하거나 그 행위를 하는데 가담, 모의, 선동, 명령, 주선하는 것’을 의미했다.

 

1999년 만델라는 5년 임기를 마치고 대통령직에서 퇴임한다. 퇴임 이후 그는 어린이재단, 만델라재단 등을 통해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및 에이즈 퇴치 활동과 어린이 교육을 위해 기금 마련과 자선 활동을 추진하는 등 사회공헌 활동을 지속했다. 2004년 모든 공식 활동을 중단한다고 선언한 이후에도 그는 남아공의 정신적 대통령이자 ‘살아있는 성인’으로 존경받았으며 2013년 95세를 일기로 생을 평온하게 마감했다. 그의 저서 <자유를 향한 긴 여정>은 뉴욕 타임스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책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6년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는 만델라에 대해 “(우리 시대) 생존 인물 중 최고 위인”이라고 말한 뒤 “만델라의 위대함은 증오하기를 거부하고 다인종 국가인 남아공을 탄생시킨 것”이라며 남아공이 유혈사태 없이 평화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점을 극찬했다. 2009년 유엔은 만델라가 태어난 7월 18일을 ‘만델라의 날’로 지정했다. 67년 동안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만델라의 정신을 기려 이날만큼은 하루 중 67분을 할애해 이웃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자는 취지다.


2) ‘비디오크라시의 창시자’ 베를루스코니의 총리 취임

1994년 4월 27일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우파 정치인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가 총리로 취임한 날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최대 재벌총수로 최대의 미디어그룹 미디어셋, 프로축구 구단 AC밀란 등을 소유한 그는 2000년 <포브스> 지가 집계한 개인 자산 순위에서 120억 달러의 재산을 보유, 이탈리아 1위, 세계 14위의 부자로 기록된 인물이다.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역사상 처음으로 총리 3선(1994년~1995년, 2001년~2006년, 2008년~ 2011년)에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상상 초월의 재력을 바탕으로 1994년에 ‘포르차 이탈리아’(Forza Italia, ‘전진 이탈리아’)당을 창당한 그는 국민연합과 북부연맹 등 타 정당과 연정을 구축하여 총리로 취임하였다. 기성 정치에 식상한 유권자들에 대한 정확한 대중심리 분석을 토대로 탁월한 메시지 작성과 전달 방식, 세련되게 연출된 이미지와 매너, 참여를 통한 능동적 조직 운영 등이 그의 정치적 성공 비결로 꼽히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이탈리아의 꿈’으로 포장하는 데 성공하여 ‘위대한 유혹자’라는 별명까지도 얻었다.

 

그러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그였지만 뇌물 스캔들과 연정의 붕괴로 인해 7개월 만에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1998년에는 전직 총리 신분으로는 최초로 ‘마피아 지원 의혹’으로 불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2011년 유로존 부채위기에 대한 책임으로 총리직에서 세 번째로 사임하면서 정계은퇴를 했지만 2013년 하원의원 선거를 통해 또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남는 시간에 취미로 총리직을 한다는 베를루스코니. 1994년 그가 총리가 되었을 때 유럽의 일부 신문들은 그에게 ‘프라임타임 총리’, ‘비디오 민주주의의 창시자’라는 닉네임을 붙였다. 또 일부 사람들은 정치 시스템이 미디어 시스템에 의해 자리를 빼앗긴 가운데 베를루스코니가 ‘빅 브라더’가 된 비디오크라시(videocracy)가 도래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의 활동에 빗대어 탄생한 ‘베를루스코니 현상’이라는 말은 미디어 재벌에 의한 정치 지배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흔히들 베를루스코니가 TV 등 대중매체를 통해 여론을 조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일부 지식인들은 국민 스스로 TV 방송이 만들어낸 ‘성공 신화’에 열광하는 현실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젊은 국민작가 로베르토 사비아노는 “개인의 정직과 진실성, 사회 정의 등과 무관한 비디오크라시가 국민 의식과 사회와 정치를 타락시켰다”고 말한다.

 

2004년 봄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위원장 신학림은 조선.중앙.동아의 덤핑 경쟁을 비판하면서 베를루스코니를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신문 시장이 이대로 가면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신문들이 고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것은 곧 여론의 독점을 의미하고 여론을 독점한 신문사와 사주는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같이 어떤 정치권력도 넘볼 수 없는 복합미디어 왕국을 건설하여 직접 권력을 잡거나 아니면 수구반동세력과의 결탁을 통해 권력을 분점하려 들 것이다.”

 

한편 화려한 정치경력 못지않게 베를루스코니는 ‘전과 14범’ 논란의 당사자인 이명박 전 대통령과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는 놀라운 기록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마피아 공모, 위증, 세금 포탈과 돈 세탁, 경찰과 법관에 대한 뇌물 및 부패 등의 혐의로 재판정에 12번이나 선 것이다. 이 가운데 1998년 2년 9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은 것을 제외한 모든 재판에서 그는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재판 절차가 중지되거나, 베를루스코니 정부가 제안한 개정안에 의해 법이 바뀌어 1심 또는 항소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베를루스코니는 “이것은 명백한 법적 학살이지만, 나는 여기에 저항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나의 저항과 희생이 이탈리아인들에게 더 공정하고 효율적인 사법 시스템을 만들어줄 것이기에 더욱 자랑스럽다.”라고 맞선다. 공정한 사법시스템을 강조한 그가 2008년에 통과시킨 것은 대통령, 총리, 하원 및 상원 의장 등 4명의 최고위급 공무원이 직위에 있는 동안 소추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었다.

 

2. 두 번째 ‘극과 극’ : 선거 부정, 이승만의 ‘하야’와 박정희의 ‘당선’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유혈의 4.19혁명을 불러오고 급기야 대통령 권좌에서 하야한 이승만과, 1971년 부정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어 유신독재의 길로 치달은 박정희가 두 번째 ‘극과 극’의 이야기 소재다. 


1) 1960년 4.19혁명과 이승만의 대통령 하야

나 리승만은 국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의 직을 사임하고 물러앉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여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바치고저 하는 바이다. 단기 4293년 4월 27일 리승만.”

1960년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에 제출한 사직서의 내용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문제는 5월 3일 제35회 임시국회에서 곽상훈 국회의장의 사회로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긴박하게 처리됐다.

 

3.15 부정선거에서부터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을 거쳐 이승만의 대통령 하야에 이르기까지 40여 일간의 긴박한 과정을 함께 추적해보자.

 

정.부통령 선거일인 1960년 3월 15일 이승만/자유당 정권은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정.부통령 후보로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 민주당은 조병옥과 장면이 출마했지만 선거 직전 조병옥의 갑작스런 병사로 이승만의 당선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부통령의 경우 조병옥 추모 열기까지 더해지면서 이기기가 어렵게 되자, 4할 사전 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 투표, 유권자 매수와 협박, 야당참관인 축출, 부정개표 등 자유당의 관권 선거는 더욱 노골화됐다. 민주당 운동원에게 가해진 테러를 두고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 그 결과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95~99%에 이르렀으나 하향조정하여 이승만 963만 표(85%), 이기붕 833만 표(73%)로 발표하였다.

 

부정선거에 대한 항거는 경남 마산에서 시작됐다. 3월 15일 1차 유혈 시위에 이어 김주열 시신 발견에 따른 4월 11일 총궐기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난동자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며 시위대를 공산주의자, 북한의 간첩으로 몰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정 선거 규탄 투쟁은 점차 거세어졌다. 마침내 ‘피의 화요일’로 불리는 4월 19일, 4·19 민주혁명의 불꽃이 타올랐다. 이날 시위에서는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115명이 죽고 727명이 부상당하는 비극이 빚어졌다.

 

학생과 시민의 계속되는 저항에 이승만은 계엄령까지 선포하고 군대를 앞세워 유혈 진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군대가 진압을 거부한 데다, 성난 민심을 확인한 미국조차 이승만을 지지할 수 없다고 밝혔다. ‘4.19에 쓰러져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며 전국의 교수들도 거리로 나섰다. 이에 버티고 버티던 이승만은 4월 26일 마침내 대통령 하야 성명을 마지못해 발표하게 된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라는 말에 시민들은 일제히 환호로 답했다.

 

해마다 4월 19일이면 대통령과 여야 정치지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를 방문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린다. 건립 당시 186기였던 묘는 2012년 4월 현재 321기에 달한다. 부정선거를 자행한 이승만과 자유당을 규탄하고, 민주주의와 자유 수호를 위해 부정의한 독재권력에 항거한 4·19혁명의 아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묘지 가운데 서 있는 ‘4월학생혁명기념탑’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명 학생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 피어나리라.”


2) 1971년 제7대 대선과 박정희 후보의 3번째 당선

1969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출마를 위한 개헌 움직임이 진행되자 이를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시작되고 ‘3선개헌 반대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다. 7월 19일 효창운동장에서는 신민당 주도로 ‘3선개헌 반대 시국대강연회’가 개최되었다. 연사로 참여한 김대중,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15분이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20여 차례의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올 정도로 그의 연설은 대단한 명연설이었다. “대한민국에서 황소를 상징으로 한 공화당이 지금 미쳐가지고 국민주권을 때려잡을 3선개헌 음모를 하고 있는데, 미친 황소의 갈 길은 도살장뿐”이라고 운을 뗀 그의 연설은 이렇게 이어졌다.

 

“3선개헌은 무엇이냐? 이 나라 민주국가를 완전히 1인 독재국가로 이 나라의 국체를 변혁하는 것이여! 3선독재가 통과되는 날, 3선개헌이 통과되는 날에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하는 조문은 장사지내는 나라이다 이 말이오! 민주주의의 적은 공산 좌익독재뿐만 아니라 우익독재로 똑같은 적이오! 히틀러도, 도조 히데키도,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 음모에 의한 이 1인독재도 민주주의의 적인 데는 다름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한다 말이오! 아…이 나라가 누구 나란데! 이 나라가 박정희씨 나라요? 이 나라는 대통령은 바꾸어도 헌법은 영원한 것이오! 헌법이 박정희씨보다 위요! 박정희씨를 위하여 헌법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한다 이 말이오!”

 

9월 14일 새벽 민주공화당 소속 의원만이 모인 가운데 국회 제3별관에서 개헌안은 변칙 통과되었고, 10월 17일 국민투표로 가결된다. 이로써 박정희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다시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헌법 제69조 3항의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는 조항이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로 바뀌게 된 것이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선이 실시되었다. 후보자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신민당의 김대중, 국민당의 박기출, 자민당의 이종윤, 정의당의 진복기 등 5명이었다. 투표 결과 투표율 79.8%에 박정희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946,928표 차로 누르고 당선, 이듬해 유신독재 체제의 출범과 함께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정권의 독재성과 장기집권에 대한 비판이 선거의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였다. 김대중은 “이번 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반면에 박정희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라고 맞섰다. 하지만 박정희는 10월유신을 통해 1년 만에 자신의 약속을 파기하는데,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선제로 공약을 실현했다. 두 후보의 말이 모두 맞아 떨어진 것”이라는 야권발 비아냥이 있기도 했다.

 

7대 대선은 온갖 비방과 모략, 끊이지 않은 정치테러, 관권과 금권의 조직적인 개입 속에서 치러졌다. 금권타락선거와 관련해, 훗날 박정희조차도 한 사석에서 “67년과 71년 선거 두 번은 김성곤이 돈으로 치렀다”고 말할 정도였다. 선거가 끝나자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었다.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본인의 투표를 포함하여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투표가 선관위 관계자의 확인이 없다는 이유로 통째로 무효 처리된 사례를 회고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당선은 김계원에서 이후락으로 이어지는 ‘남산’ 선거사령부의 작품이기도 했다. 6개월 동안의 중앙정보부의 정권수호 공작이 마침내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김대중의 조직참모인 ‘선거판의 여우’ 엄창록의 격리, 향토예비군 폐지를 둘러싼 안보논쟁 유도, 박정희 유세장의 청중 동원, 이후락 주재의 고위 선거대책회의 운영을 통한 행정조직의 선거 개입, 박정희의 ‘마지막 출마’ 선언, 그리고 신민당 지도부 이간공작 등 핵심 선거전략은 모두 중정의 작품이었고 그 대부분은 맞아떨어졌다.

 

중정 같은 권력기구의 농간으로 낙선했다고 믿은 김대중 후보로서는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의 불만은 “이번 선거는 ‘암살선거’였다. 중앙정보부와 온갖 관권 금력이 총동원되어 야당후보인 나를 때려잡은 폭거였다. 나는 국민의 지지를 도둑맞은 것이 분명하다”는 말로 표현됐다. 김대중은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살겠다 갈아보자’, ‘논도 갈고 밭도 갈고 대통령도 갈아보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장기집권과 부정부패에 싫증내는 민심을 마구 흔들었다. 그 결과 구름 같은 청중을 모으고 바람을 일으켰는데도, 이후락 정보부가 승리의 월계관을 빼앗아 박정희에게 바쳤다는 것이다. 신민당도 “4.27선거는 중앙정보부에 의해서 계획되고 지령되고 감독된 완전범죄의 선거였으며, 전 국력을 동원하여 한 개의 야당을 때려잡는 소리없는 암살의 선거였다”고 하면서 부정선거의 사례와 근거를 제시했다.

 

선거 후 해외의 여러 신문들도 “김대중 후보는 정력적인 활동으로 전 국민을 사로잡아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평하면서, 김대중 후보가 형식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실제로는 승리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동아일보>의 71년 5월 1일자 칼럼은, “메뚜기 이마만도 못한 곳에서 이렇듯 민족분열을 꾀하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아무리 정치가 좋고 대통령 자리가 탐난다 할지라도 민족을 분열하여 가면서까지 일신의 부귀와 영달을 누려야만 할 것인가?”라고 하면서, 민족의 이름으로 지역감정을 조장한 사람들을 처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패배한 김대중을 이렇게 위로한다.

 

“김대중 후보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잘 싸웠다. 그는 청년 정치가로서 하늘이 준 그 도량과 그 식견과 그 수완과 그 웅변과 그 정직한 자세를 마음껏 발휘했다. 그는 지금 혜성처럼 광망을 우리 민족에게 비쳐주고 있으며 혼탁에 빠진 이 나라 정계에 큰 청량제가 될 것을 부탁해 마지않는다. 승패는 병가의 상사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싸움이란 이기고도 지는 수도 있고 지고도 이기는 수도 있다면 이번 김대중 후보의 경우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김 후보는 지금 전후의 착잡한 만감에 사로잡혀 있을지 모르나 하늘은 오히려 그에게 더 큰 대임과 대망을 안겨주기 위해 이러한 시련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3. 맺음글 : ‘마쓰시다 정경숙’와 좋은 정치인 육성

 

1989년 4월 27일 일본 마쓰시다 전기산업(현 파나소닉) 창업주이자 ‘경영의 신’이라 불린 마쓰시다 고노스케가 94세의 나이로 삶의 마감했다. ‘길은 잃어도 사람은 잃지 마라.’ 인간 중심의 경영관을 강조한 마쓰시다 회장은 앞서 살펴본 세계 14위의 거부인 베를루스코니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전기 한 품목만으로 570개 계열사와 29만 명의 종업원을 거느리는 마쓰시다 그룹을 맨주먹으로 일궈낸 그의 인생 역정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라 할 수 있다.

 

그는 스스로 ‘하늘의 세 가지 은혜’를 입고 태어났다고 말한다. 세 가지 은혜란 ‘가난’과 ‘허약한 몸’, 그리고 ‘못 배운 것’이다. 가난 속에서 태어났기에 근면해야 함을 배웠고, 몸이 허약했기에 건강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배우지 못했기에 세상 모든 것을 스승 삼아 배우는 데 매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불행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성장을 위해 하늘이 내린 시련이라 여기고 끊임없이 노력한 마쓰시다 회장. 그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안겨 준다.

 

공인재단법인 마쓰시다 정경숙. 실업가로 성공을 이룬 마쓰시타가 1979년 제2의 메이지유신을 일으킬 차세대 국가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해 사비 70억 엔과 마쓰시다 그룹 관련 회사들이 50억 엔을 투자해 설립한 정치학교다. “인재의 육성이야말로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는 일본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기치 아래 마쓰시다 정경숙은 설립 이후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원 등 정치가를 중심으로, 경영자, 대학교원, 언론관계자 등 각계에 다수의 인재를 배출해 왔다.

 

정경숙의 기본이념은 숙시(塾是), 숙훈(塾訓), 그리고 오서(五誓)에 담겨 있으며 그것은 정치지도자만이 아니라 사람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숙시는 ‘진실로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고, 새로운 인간관에 기초한 정치경영 이념을 탐구하며 인류의 번영 행복과 세계평화에 공헌하자’다. 숙훈은 ‘참되고 순수한 마음으로 중지를 모아 자수자득(自修自得,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는 지도자는 자기 스스로 길을 찾고 나아가야 한다)으로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고 나날이 새로워지는 생성발전의 도를 구하자’다.

 

정경숙의 숙생들이 지녀야 할 오서, 즉 다섯 가지 약속은 ①항시 뜻을 품고 성공할 때까지 계속 정진하는 소지관철, ②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헤쳐 나아가는 자주자립, ③보고 듣는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라는 만사연수, ④기존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창조하고 개척해 나아가는 선구개척, ⑤아무리 우수한 인재가 모여도 친화가 없으면 성과를 얻을 수 없다는 감사협력 등이다.

 

마쓰시다 정경숙이 우리에게 던지는 함의는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할 개혁의 힘은 무엇보다 잘 짜여진 교육과 훈련을 통해 좋은 인재를 육성하는 데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인재의 부족은 사람을 키우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리더십을 공고하게 했던 냉전시대 정치의 유물이다. 박정희식 통치스타일과 이른바 ‘3김 시대의 정치’는 그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 87년 민주화 이후 인재난에 시달린 역대 정부의 사례에서 잘 드러났던 것처럼 사람의 문제는 짧은 기간 안에 해결책을 찾기가 힘들다.

 

인재를 육성하지 않은 정치는 필연적으로 모든 분야에 비해 후진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 폐해는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게 마련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으로 단련되고 또 정치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개혁적인 신진 정치 리더들의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가능한 한 빨리, 제대로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각 정당이 해야 하는 핵심 과업이 맞다. 만약 그게 현실적으로 난망하다면 정당 바깥에서라도 추진해야 한다.

 

“성공할 때까지 계속한다면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다.” “청춘이란 마음의 젊은이다. 신념과 희망에 넘치고 용기로 가득해서 나날이 새로운 활동을 계속하는 한 청춘은 영원히 그 사람의 것이다.” 고노스께가 남긴 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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