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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작은 역사 이야기 '오늘'] 3. 3월 24일 ‘변화’와 ‘상상력’

 

조현연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죽음이라는 숙명적인 삶 속에서 사람들은 많은 상상을 하면서 살아간다. 또 어떤 때는 안정을 갈망하기도, 변화를 꿈꾸기도 한다. 3월 24일 ‘오늘’의 이야기 주제는 ‘변화’와 ‘상상력’이다. (1) 주어진 질서를 바꾸기 위해 사람들은 다양한 모색을 하다가 실행에 옮기곤 한다. ‘어제 속 오늘’의 역사에서 그것은 항명, 쿠데타, 시위와 농성, 선거 등으로 나타났다. (2) 이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상상력이란 어떤 의미인지를 ‘과학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쥘 베른과 ‘소셜 픽션’을 통해 찾아보려 한다.

 

1. 주어진 질서, ‘변화’를 위한 선택

 

1) 항명 : 맥아더의 38선 이북 진격 명령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을 지지하는 유일한 미국 장군이자 이승만 정부로부터 ‘수호자’로 숭배를 인물은? 바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맥아더는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갖고 있다. 하나가 대한민국을 공산화로부터 구원해준 수호천사로서의 이미지라면, 다른 하나는 38선 월경과 확전 주장으로 더 큰 참화를 불러들인 장본인으로서의 이미지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3월 24일 유엔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독자적으로 북진 명령을 내리면서 ‘중공’에 최후통첩을 한다. 확전을 원했던 맥아더는 만주에 원자폭탄 26개를 투하할 것을 요구했지만 3차 세계대전을 우려하면서 ‘명예로운 휴전’을 모색하던 트루먼 대통령이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그에 항명하면서 북진 명령을 내린 것이다.

 

당시 맥아더는 공화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있었다. 맥아더를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 간주한 공화당의 지도부는 “승리를 대체할 것은 없다”며 그의 강경론과 확전론을 적극 지지한 것이다. 맥아더의 인기 상승과 트루먼의 지지율 하락이 교차되면서 트루먼 행정부는 궁지에 몰렸다. 트루먼과 맥아더의 관계는 더 이상 최고 군 통수권자와 현지 사령관의 관계가 아니라, 숙명의 정치적 라이벌로 바뀌고 말았다. 4월 11일 새벽 결국 트루먼은 “맥아더가 미국을 또 다시 확전으로 몰아넣는 비극적인 잘못을 저질렀다”고 비난하면서, 맥아더를 유엔군 최고사령관과 미 극동군총사령관, 미 극동육군사령관, 그리고 GHQ 최고사령관직에서 해임한다고 발표했다.

 

<타임(Time)>지는 맥아더를 ‘영웅’으로, 트루먼을 ‘소인배’로 칭했고, 맥아더를 복권시켜야 한다거나 심지어는 트루먼을 탄핵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맥아더 해임은 ‘남북전쟁 이후 처음으로 미국에 헌정위기를 불러왔다.’고 표현될 정도로 혼란상을 가져왔다. 맥아더 청문회에 나선 민주당 의원들과 조지 마셜을 비롯한 군 수뇌부는 그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얼마나 형편없고 위험하며 독선적인 인물인지를 드러내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대통령을 꿈꿨던 맥아더의 진면목은 매일 3000만명이 지켜보는 TV중계 앞에서 적나라하고 폭로되었다. 청문회장에 선 ‘전설 속의 영웅’은 문민통제에 대한 불복종과 오판은 물론 거짓말까지 줄줄이 드러나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맥아더는 미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뒤로 한 채 은퇴한다. 미 의회는 전쟁영웅에 대한 예우를 참작해 청문회 공식 보고서를 내지 않았다.

 

3월 24일 맥아더가 중국 본토로의 확전을 언급하자 트루먼은 “대통령으로서 그리고 군통수권자로서의 나의 명령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더는 그의 불복종을 참을 수가 없었다.”면서 해임을 결심했다고 미국 합참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맥아더가 파면된 이후 자리를 이어받은 리지웨이 장군은 종전 후 40년이 흐르고 나서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싸워야 했는지 도쿄의 사령부가 알지 못했다는 점이 나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었으며 그런 상황을 만든 총사령관을 용서할 수도 없었다.”고 꼬집었다.

 

청문회를 통해 드러난 맥아더의 진면목을 소개하면 이렇다. 그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맥아더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 전쟁을 지휘하는 동안 한국에서 하룻밤도 보내지 않고, 전용기를 타고 전황을 살펴보러 잠시 들렀다가 곧바로 도쿄로 돌아간 총사령관. 대통령에게 경례하지 않은 처음이자 마지막 장군. 두 번씩이나 본국소환에 불응하는 기록을 세운 전무후무한 장군. 인천상륙작전 뒤 38선 돌파와 압록강까지 북진, 압록강 교량 폭격 같은 중요한 군사작전을 실행 후 추후 보고형식으로 승인받은 장군. 대외정책에 대해 공개 언급하지 말라는 대통령 훈령을 여섯 번이나 위반한 장군.


2) 쿠데타 : 1976년 3월 24일 아르헨티나 군사쿠데타와 ‘더러운 전쟁’(Guerra sucia)

1976년 3월 24일 아르헨티나 육군사령관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Jorge Rafael Videla)가 가톨릭교회의 암묵적인 지원 속에 국가위기를 해결한다는 명목 하에 쿠데타를 일으켜 이사벨 페론 정부를 무너뜨렸다. 이사벨 페론은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남편인 후안 페론이 급작스럽게 병사하자 부통령에서 일약 대통령이 되었다. (‘Don't Cry For Me, Argentina’라는 노래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국민적 영웅/몰락의 단초라는 상반된 평가 속의 에바 페론은 후안 페론의 두 번째 부인이다.)
 
국가 안보를 앞세워 권력을 장악한 군부는 군사평의회(Junta Militar)를 설치하고, 육군 참모총장 비델라를 총사령관 겸 대통령에 추대하였다. 그리고 중앙 의회와 지방 의회의 해산, 정당 해산, 법관의 교체, 노동조합 활동 정지를 골자로 한 ‘국가개조계획’(Proceso de Reorganizacion Nacional)을 발표하였다. 쿠데타 초기 국민들은 군부를 지지했다. 아르헨티나의 사회적ㆍ정치적ㆍ경제적 불안은 이사벨 페론 정부의 부패와 무능력 탓이며, 강력한 군부의 정치개입만이 사회 혼란을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환영한 것이다. 그러나 사태의 전개는 시민들의 기대와 크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손쉬운 안정을 희망한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오히려 역사상 최악의 정권을 자초했고, 군사정권 내내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군사평의회는 집권하는 동안 게릴라단체를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을 전개해 테러, 조직적인 고문, 강제 실종, 정보 조작을 자행한다. 페론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노동운동가, 인권운동가, 학생, 기자 등 정치적 반대파를 잔혹하게 탄압했으며, 이 기간 동안 동안 최소 9000명에서 최대 3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실종되거나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 인권단체의 비공식집계에 따르면, 이 기간에 희생된 사람은 강제 실종 3만명, 강제 입양 500명, 정치범 1만명이며, 정치적 망명자 또한 30만명에 달한다.

 

더러운 전쟁은 ‘콘도르 작전’의 일부로 시작됐다. 콘도르 작전(남미의 맹금인 콘도르에서 이름을 따왔음)은 1970~80년대 우루과이·브라질·아르헨티나·볼리비아·칠레·파라과이 등 남미 6개국 군사정권이 공동으로 벌인 정적 제거 사건을 말한다. 명분은 좌익 게릴라 척결이었지만, 반체제 인사를 무자비하게 색출하는 수단으로 악용됐으며 미국의 암묵적 승인과 중앙정보국(CIA)의 지원 아래 진행되었다. 아르헨티나 군부는 독재통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살해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 아래 전국적으로 340여 곳에 ‘죽음의 수용소’를 설치, 운영하기도 했다. 수용소는 주로 변두리 지역의 학교나 체육관 등 대규모 건물을 개조해 비밀스럽게 사용했는데,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변에만 이런 수용소가 한때 수십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콘도르 작전은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무제한의 국가폭력을 구사하면서 반인륜적 행위를 자행했다. 예컨대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정권은 콘도르 작전으로 구금·살해한 반체제 인사들의 자녀를 군인·경찰 가정 등에 강제 입양시켰다. 강제 입양된 갓난아이 중엔 자신의 아버지를 고문해 죽인 군인 가정에 입양돼 이 군인을 친아버지로 알고 자라다 20여년 만에 진실을 알게 된 경우도 있다.

 

여러 증언을 종합하여 전형적인 탄압의 양태를 재구성하면 이렇다. “한밤중 복면을 두른 일단의 무리들이 포드 팰컨 차량을 타고 용의자의 집에 들이닥친다. 강제 연행된 용의자들을 전국에 산재한 비밀수용소에 감금한 다음 정보를 캐내기 위해 온갖 고문을 하는데 대부분은 사망한다. 시신은 시립묘지에 한꺼번에 묻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바다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용의자로 체포된 사람들은 대부분 ‘전복 활동 동조자’라는 혐의를 받았으나, 내막을 알고 보면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수배자와 이름이 같거나 비슷한 사람들, 작전 시간에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거나 들른 사람들도 체포 대상이었다. 그리고 빈민가에서 활동하던 자원봉사자들, 이를 취재한 언론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쿠데타와 더러운 전쟁이 시작되기 14년 전인 1962년 3월 24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윤보선 대통령이 사표를 제출함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한다. 1년전 5?16군사쿠데타로 헌정질서를 파괴한 박정희 장군은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6호로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되어 정치활동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입법·행정·사법의 3권을 행사했던 비상통치기구로, 윤보선 대통령은 명목상의 대통령의 지위에 있었을 뿐 군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국정은 최고회의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박정희는 이후 이른바 ‘반혁명사건’들을 일으켜 군부 내 반대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한다. 한 예로 1961년 7월 3일에는 쿠데타 얼굴마담이자 형식적 1인자인, 정치적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육사 5기생 등 44명을 반혁명세력이라는 이름으로 체포하여 토사구팽시킨다. 당시 진행된 숙청작전은 미군의 지역작전 코드명에 따라 ‘텍사스 토벌작전’,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이 지역이 광활하고 사람이 거친 함경도를 ‘알래스카’로, 지역이 넓고 인물이 많은 평안도를 ‘텍사스’로 불렀기 때문이다. 아무튼 추대형식을 빌어 스스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된 박정희는 1962년 3월 24일 대통령 권한대행의 지위까지 차지한다.

 

‘반혁명분자’로 밀려난 이후 미국에서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하던 장도영은 훗날 “나의 조속한 민정 복귀 방침과 그들(박정희를 포함한 쿠데타 주체세력)의 장기집권 획책 간의 충돌이 결국 ‘장도영 반혁명사건’이라는 터무니없는 드라마를 연출하게 만들었다, 반혁명 사건은 날조된 연극”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러나 그는 자신을 숙청한 박정희에 대해서는 “다 지난 일이며, 더 이상 원망도 회한도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3) 시위와 농성 : 1964년 3월 24일 한일회담 반대 학생시위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젊은 사자들’로 상징되는 대학은 잠잠했다. <사상계> 장준하의 태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판을 쓸어버린 것에 대해서는 일정한 호감이 존재했고, 또 박정희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정리도 사실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동권 내부에서도 “박정희는 민족주의자이며 5.16은 민족주의 군사혁명이다.”고 주장하는 긍정론도 만만치 않았다. <사상계> 1961년 6월호의 권두언에서 장준하는 이렇게 말한다. 대단히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좀 길지만 인용해보자.

 

“4?19 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군사혁명은 단지 정치권력이 국민의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넘어갔다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민족적 죄악이 되는 것이다.…‘국가재건최고회의’는 시급히 혁명 과업을 완수하고 최단시일 내에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한 후 쾌히 그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엄숙한 혁명 공약을 깨끗이 군인답게 실천하는 길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군인의 위대한 공적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사상에 영원히 빛날 것임은 물론이요, 한국의 군사혁명은 압정과 부패와 빈곤에 시달리는 많은 후진국 국민들의 길잡이요, 모범이 될 것이다.”

 

1964년 봄이 오면서 대학 캠퍼스에는 저항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계기는 한일회담이었다. 한일 국교정상화, 한일회담의 윤곽이 드러났을 때 학생들은 분노했고 누적된 분노는 1964년 3월 24일 ‘3.24데모’로 터졌다. 그것은 서울문리대, 고려대, 연세대의 공개.비공개 조직이 함께 만들어낸 학생운동사의 기념비적인 연대투쟁이었다. 학내에 학원 사찰망이 깊숙히 침투해 있었고 프락치가 들끓었던 시절, 첫 봉화가 3개 대학에서 가능했던 것은 비밀유지 때문이었으며 동시다발식 데모방식은 1960년대 말에야 학생운동의 한 방식으로 정착된다. 조용하던 각 대학이 일제히 데모에 돌입하는 이 수법은 심재권(서울대 상대 69학번, 현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이 개발한 것이라 하여 훗날 ‘심재권 방식’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서울대의 3.24데모는 서울문리대의 비합법 조직인 한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위원장 김중태)가 주도하게 되며 합법 조직인 문리대 학생회(회장 김덕룡)와는 별개였다. 반면 고려대와 연세대는 총학생회와 일부 단과대 학생회 조직이 3.24데모를 실질적으로 이끈다. 3개 대학의 핵심 막후 라인은 서울대 김중태, 고려대 최장집, 연세대 정준성이었다. 김중태와 최장집(현 고려대 명예교수)은 고려대 토론회에서 만나 의기투합한 관계였고, 최장집과 정준성은 모친끼리 오랜 친구라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최장집과 정준성은 군중 동원력이 없는 이론가로 당국의 면밀한 주시를 받고 있어 전면에 나설 수도 없는 처지였으며, 따라서 연세대와 고려대는 학생회를 내세워야 데모가 가능했다.

 

서울문리대 3.24데모의 공식 주도그룹은 김중태의 투위지만 실질적인 멤버는 문리대 내 경북고 인맥이었다. 당시 서울대 학생활동의 주도권은 경북고 출신이 잡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4?19혁명을 있게 한 2.28대구의거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경북고 출신 중 비운동권 멤버들의 활약도 돋보였다. 서울대 학생회 총회장을 맡은 정정길(이명박 정부 때 청와대 대통령실장 역임)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의 전개 과정에서 단과대별 또는 학생회와 운동권 등 다양한 학내 의견 조율에 애를 먹다가 결국 총학생회를 데모에 합류시킨다. 아이디어가 많고 글재주가 뛰어난 박철언(‘6공의 황태자’)은 총학생회가 내는 각종 선언문 작성을 도맡았으며, 후에 법대가 단식농성에 돌입하자 합세하게 된다.

 

3월 24일 지금의 대학로에 있던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은 현승일(전 국민대 총장)의 지휘 하에 대오를 형성했고 4월혁명 기념탑 앞에서 당시로서는 이색적인 시위 문화 하나를 선보인다. ‘화형식’이었다. 이들은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화형식’으로 매국노 이완용과 이케다 일본 수상의 허수아비를 들고 불태우면서 “나라 파는 한일회담 중지하라.” “제2의 이완용을 소환하라.”고 외쳤다. 제2의 이완용은 바로 김종필이었다. 6월 3일까지 이어진 한일회담 반대시위의 문이 열린 것이다. 일부 고등학생과 시민의 호응을 받은 3.24 거사의 여파는 서울의 대부분 대학과 지방, 그리고 고등학교와 야당에까지 확산됐다. 5.16 쿠데타 후 처음으로 대규모 군중시위의 불이 당겨진 것이다.

 

며칠 뒤 3.24 시위의 의의를 두고 고려대학생들의 좌담회가 열렸다. 이 좌담회에서 “일본인상사니 매판자본이니 하는 것들이 하는 재미롭지 못한 것들이 벌써부터 발호하고 있어 일본에 의한 경제적 예속을 극히 우려하는 바입니다.”라면서 “결론적으로 이번 데모의 의의는 상실되었으며 정부에 아무런 반응도 주지 못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하겠습니다.”라고 분연히 말해 좌중의 동의를 이끌어낸 상과대 총학생회장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이명박이었다.


4) 선거 : 1992년 3월 24일 제14대 총선과 민중당

1987년 민주화 이후 권위주의 시절과는 달리 선거의 지위는 격상되었다. 당시 운동권은 선거를 둘러싸고 크게 세 입장으로 대별되었다. (1) ‘진보로부터의 이탈’로 마감한, 기존 야당에 들어가 합법적 정치공간의 교두보를 확보하자는 ‘재야입당’론, (2) 보수야당과의 민주대연합과 ‘정치적 대표체’론을 앞세우면서 진행된 ‘시기상조-반합법 전선체운동’론, (3) ‘독자적인 합법 진보정당’론이 그것이다. 진보진영 내 합법정당 건설에 관한 논의는 치열한 논쟁과 갈등과 대립을 반복하게 된다. 서강대 손호철 교수의 지적처럼 그 갈등과 대립의 정도는 꽤 오랫동안 생각 이상으로 심각한 후유증을 낳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 ‘진보정당’과 ‘비판적 지지’라는 두 단어는 87년 민주화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현실을 고민해 온 모든 사람들의 피를 끓게 하고, 열띤 논쟁에 혈압을 올리게 하는가 하면, 피를 나눈 한 때의 동지들이 서로를 증오하게 하고 ‘원수’가 되게 한 시대의 표상어들이다. 그래,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 이 문제를 될 수 있으면 피해가려고 노력해 왔다.” (손호철 2002)

 

세 흐름 가운데 독자적인 합법 진보정당은 두 계열이 1992년 총선을 앞두고 힘을 합쳐 <민중당> 이름으로 선거에 참여한다. 하나의 계열은 1990년 11월 10일 전국 51개의 지구당으로 창당한 민중당이다. 추진세력의 핵심은 87년 대통령선거 당시 백기완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했던 ‘독자후보파’라고 할 수 있으며, 주요 인사는 이러했다. 상임대표(이우재), 공동대표위원(김상기, 김낙중), 고문 백기완, 사무총장(이재오), 정책위 의장(장기표), 기획조정실장(정태윤), 제1노동위원장(김문수), 정치연수원장(지은희), 교수위원장(오세철).

 

다른 하나의 계열은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을 핵심 구성으로 하는, 합법정당으로의 전환의 불가피성과 민중당과의 통합을 통한 선거전략을 제시한 이른바 ‘신노선’의 <한국노동당> 그룹이었다. 즉 노동자계급이 중심이 되어 독자적인 합법정당을 건설하고 이러한 합법정당을 통해 의회민주주의의 정치공간을 활용함으로써 ‘민주적 계급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겠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국노동당(가칭) 창당준비위’ 위원장 주대환과 인민노련의 노회찬을 꼽을 수 있다. (독자적인 합법정당에 대해 당시 전노협의 단병호 위원장은 처음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가 후에 다시 중립적 입장을 취하는 등 중앙위원회 차원의 공식적 지지입장을 개진하지 못했다. 업종회의의 권영길 위원장은 시기상조론을 주장하였다.)

 

이들에게 시급한 과제는 다가오는 14대 총선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하는 선거정국에 대한 대응문제였다. 민중당과 한국노동당(한노당 창준위)는 우여곡절 끝에 1992년 2월 6일까지 총 15차례에 걸친 통합교섭을 마무리하고, 2월 7일 통합기자회견문을 발표했다. 정치적으로 명확히 구별되는 다른 두 세력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선거를 불과 50여일 앞두고 통합을 성사시킨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당 대 당의 통합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한국노동당의 주요 지도부가 구속 또는 수배상태라는 현실적인 상황에서 민중당의 조직기구와 지도부는 거의 그대로 관철되었다.

 

1992년 3?24총선은 민중당이나 한국노동당 모두에게 새로운 전환점을 창출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그러나 (통합)민중당은 51명의 후보를 내세웠지만 의석 획득에 실패했고 득표율에 있어서도 아주 저조한 결과(319,041표, 득표율 1.5%)를 얻었다. 선거가 끝나고 결국 민중당은 서둘러 해체과정을 밟게 되었고, 독자적 합법 진보정당이 다시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1997년 국민승리21과 2000년 민주노동당을 기다려야만 했다.

 

2. 꿈꾸는 상상력 : 쥘 베른의 <신비의 여행>

1905년 3월 24일은 프랑스의 과학 소설 분야를 개척한 작가, 휴고 건스백, H.G.웰즈와 함께 ‘과학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쥘 베른(Jules Verne)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작가 이름은 아마 생소할지 몰라도 그의 작품명은 대부분 알고 있거나 아니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서도 모험과 신비를 소재로 삼은 54권의 소설을 <경이의 여행>이라는 총서명으로 지칭한다. 이 가운데에는 <지구 속 여행>(1864), <해저 2만리>(1870), <80일간의 세계일주>(1873), <15소년 표류기>(원제는 <2년간의 방학>)(1889) 등이 포함되어 있다.

 

작가는 비행기나 잠수함, 우주선이 만들어지고 상용화되기 전에 이미 우주, 하늘, 해저 여행에 대한 글을 썼으며, 몇몇 작품은 영화화되기도 했다. 유네스코의 세계 각국 번역출판물에 대한 종합 목록인 국제번역물 색인(‘Index Translationum’)에 따르면 베른의 작품은 개인으로서는 세 번째로 가장 많이 번역되었다고 한다.

 

“쥘 베른은 우주적인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매우 드물고 아름다운 능력이다. 이런 재능을 이 정도로 소유한 사람이 제1급의 작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시인이자 놀라운 예언자이며 능력 있는 창조자였음을 어느 누가 감히 부인할 것인가? 과학자, 곧 연구자를 경이로운 것들을 노래하는 시인과 연결시킨 것은 다름아닌 ‘상상력’이다. 자연을 관찰하는 것, 감정들을 묘사하는 것, 그것은 과학과 시정(詩情)이 동시에 하는 역할이다.” (아나톨 르브라즈)

 

한 시대를 풍미한 베스트셀러 작가아자, 이후 한 세기가 넘도록 전 세계에서 보편적인 사랑을 받은 쥘 베른은 본격 과학소설(SF)의 선구자로도 평가된다. 이 장르에 해당하는 작품의 경우, 지금은 비록 적잖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당대에는 상당히 대담하고 기발하며 예언적인 작품으로 여겨졌다. 예컨대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보다 무려 한 세기 먼저 나온 <지구에서 달까지>(1867)와 그 속편인 <달나라 탐험>(1873)이 그렇다. 쥘 베른은 이런 작품을 통해서 잠수함, 입체영상, 해상도시, 텔레비전, 우주여행, 투명인간 같은 개념들을 사상 최초로 제안했거나, 또는 기존의 개념을 더욱 새롭게 했다. <해저 2만리>는 쥘 베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이 영화화된 작품이며, 네모 선장의 노틸러스 호는 이후 잠수함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쥘 베른의 작품은 뛰어난 상상력 못지않게 탄탄한 사실성으로도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단순히 기발한 상상에만 근거해서 이야기를 만들었다면, 그의 소설이 이처럼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백과사전이 있는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본인의 말마따나 쥘 베른은 철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아주 생생하게 배경을 묘사한다. 쥘 베른의 작품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영화와 연극, 애니메이션으로 각색되어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뛰어난 오락성과 탁월한 상상력으로 유쾌한 즐거움과 짜릿한 호기심을 자극한 그의 작품에 대해 작품성 운운하면서 쉽게 폄하할 수 없을 것이다.

 

“베른의 천재성은 놀라운 세계를 묘사했다는 것과, 인간의 위대한 드라마들을 상징으로 단순하게 표현해서 어린아이들조차도 그 상징들을 느낄 수 있게 했다는 점입니다. 아마 제가 지금 그 책들을 다시 읽는다면 감정이나 폭풍우, 대화재 등을 묘사하는 그의 방식에서 제가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새삼 발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쥘 베른의 책들을 읽고서 유년 시절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이며, 글을 쓰면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작가가 과연 있을까요?” (르 클레지오)

 

3. 소셜 픽션 : “상상해야만 변화가 가능하다”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이 ‘공상과학’이라면, 또 하나의 SF로서 소셜 픽션(Social Fiction)은 ‘공상사회’다. 소셜 픽션은 그라민뱅크 설립자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함마드 유누스가 제안한 개념으로 우리나라에서는 2014년부터 희망제작소 이원재 소장 등 먼저 상상한 몇몇 사람에 의해 확산되었다. 사회적 상상이라는 의미의 소셜 픽션은 인류가 우주여행과 같은 과학적 상상력을 현실화한 것처럼 사회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이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현실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뜻하는 용어라고 한다. 사회가 점점 더 살기 어려워지고 황폐화되면서 사람들은 현실에만 급급하게 되는데, 그때일수록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우리가 꿈꾸는 사회에 대해서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쥘 베른의 작품에서 보듯이 SF는 전형적인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중요한 점은 어느 순간 그 허황된 상상이 현실이 되는 걸 봐왔다는 것이다. TV, 자동차, 홀로그램, 컴퓨터 등이 모두 영화나 소설을 통해 뜬구름처럼 등장했다. 역사상 혁신적인 변화들의 경우 터무니없는 ‘상상’들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 상상을 사회에 접목해 보자는 것이 바로 소셜 픽션이다. 현실이라는 잠금장치를 해제함으로써 여백이 생기고, 이 여백에서 문제 해결을 시작할 여지가 생긴다. 누군가 좀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하면, 누군가는 그 상상된 사회를 실현하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좀 더 나은 사회가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염원과 열망을 담은 사회적 상상은 때로 거대한 변화의 싹을 잉태한다. 희망제작소 이원재 소장은 그 적절한 사례 가운데 하나로 스웨덴 복지국가와 그것을 이끌어낸 1919년 스웨덴 사민당의 예테보리 강령을 꼽는다. 100년 전 ‘잠정적 유토피아’를 꿈꾼 에른스트 비그포르스가 주도한 이 강령에는 놀랍게도 한달짜리 유급휴가, 출산수당, 평등한 교육기회, 압도적으로 누진적인 상속세와 소득세 등 지금의 스웨덴 복지국가의 골격이 상당 부분 담겨 있다.

 

“물론 1919년 당시 사람 중 이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빈곤과 격차와 장시간노동에 지친 국민의 염원을 담은 한 정치가의 상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 강령이 스웨덴 사람들의 집단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수십년 뒤 스웨덴은 실제 그런 나라로 변모한다.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지’에 대한 대담한 상상이 결국 복지국가로 가는 변화의 첫걸음이었다.”

 

“소셜 픽션이란 특정한 사회 이슈, 또는 공간을 주제로 제약조건 없이 이상적인 미래를 그리는 방법의 사회혁신 기획으로서, 사회적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때 상상은 공상이나 예측과는 달리 의지가 담겨야 한다. ‘이런 미래가 올 것’이라는 막연한 예측이 아니라, ‘이렇게 되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염원이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공유될 때, 사회는 변화하는 것이다.”

 

과거 한국전쟁이 끝난 뒤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의 상태에서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상상을 바탕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으며, 군사독재 치하 엄혹한 현실에서는 민주화에 대한 상상을 자양분으로 해서 세상을 바꿔냈다. 현재 우리의 현실이 암담한 것은 지금이 힘든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과 다른 사회에 대한 상상이 없기 때문이며, 설령 있더라도 이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셜 픽션이 사회에 대한 상상이라지만, 그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미래의 나에 대한 상상과 함께 가야 한다. 그리고 소셜픽션은 혼자 꾸는 꿈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모두가 함께 공유해야 가능한 꿈이다. 정의당이 꿈꾸는 세상을 담은 <신강령>이 많은 사람들의 의지와 염원을 모아, 더 나은 내일로 향해 나아가는 데 작은 실마리가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뜻하지 않게’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인터스텔라>로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아인슈타인. 어린 시절 학습 부진과 학교 부적응으로 인해 급기야 퇴학까지 당했던 그의 말로 이번 글을 맺을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인슈타인을 퇴학시켰던 그 학교의 현재 이름이 아인슈타인학교라고 한다.)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지식은 한계가 있지만 상상력은 전 세계를 둘러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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