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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2. 3월 17일, 국가폭력과 ‘죽음의 정치’, 인권에 대하여

 

조현연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지난 20세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2000년 ????한국 현대정치의 악몽-국가폭력????이라는 책을 쓰면서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전쟁과 혁명의 격변에서 시작해 혼돈의 시간을 거쳐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의 퇴락과 상실의 에토스로 마감된, 광기가 지배해온 야만의 시대.”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 출신인 브레진스키(Zbigniew K. Brzezinski) 교수는, 20세기에 정치적인 동기로 학살당한 사람은 1억 6700만명에서 1억 7500만명으로 추산된다고 말한다. 권력을 다루는 정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국가권력의 잘못된 행사가 얼마나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주는 수치가 아닐까 싶다.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의 결과가 거의 재앙에 가까운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정치의 세계다.

 

3월 17일 ‘오늘’의 주제는 국가폭력과 ‘죽음의 정치’, 그리고 인권에 대한 것이다. 국가 폭력이란 말 그대로 국가가 국민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말하는데 전쟁은 그중 가장 극단적이고 치명적인 예다. ‘죽음의 정치’란 국가폭력이 극단적으로 구사되어 급기야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버리는 정치적 현상이 항상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의미하며, 국가에 의한 직접 살인과 간접 살인으로 유형화할 수 있다. 전자는 국가가 죽음의 정치의 능동적 행위 주체이자 직접적인 가해자인 경우를, 후자는 국가가 죽음의 정치의 간접적인 가해자로 죽음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장하거나 살인 행위에 대해 무책임하게 방조 또는 묵인하는 경우를 뜻한다.

 

오늘 다루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대량학살이라는 20세기의 야만이 21세기에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웅변해준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드러낸 정인숙 피살사건은 일종의 의문사이자 국가폭력의 억울한 희생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끝으로 나치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기도 한 독일의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의 삶과 비운의 천재 작곡가 윤이상과의 인연을 통해 그 한 단면에 접근해보려 한다.

 


1. 2003년 3월 17일 이라크에 대한 48시간 최후통첩

 

1) 작전명 ‘이라크의 자유(Freedom of Iraq)’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항공기 테러(9·11테러) 사건이 발생한 뒤 국면 전환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던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2002년 1월 북한·이라크·이란을 이른바 ‘악의 축’으로 규정하였다. 그것은 악을 제거하기 위한 세계경찰국가로서의 노력이 아니라 전쟁의 예고편일 따름이었다. 아프간을 침공하여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린 미국은 9·11 테러 사건의 주범으로 알카에다를 지목하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그 조직과 협력 관계에 있다고 단정하였다.

 

9·11테러로 인해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의 주도 아래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를 제거함으로써 자국민 보호와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34개 동맹국들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이라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몇 차례 한 뒤, 마침내 2003년 3월 17일 48시간의 최후통첩을 보낸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무기 색출을 위해 이라크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으로 국제법에 따른 선전포고라는 공포의 카드를 꺼낸 것이다.

 

3월 20일 오전 5시 30분 바그다드 남동부 등에 미사일 폭격을 앞세운 침공이 시작됐다. 작전명은 ‘이라크의 자유(Freedom of Iraq)’. 어둠 속을 가르는 소름 돋는 금속음에 이어 섬광이 작열하는 섬뜩한 장면은 CNN으로 중계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정치적 탐욕이 뒤섞인 야만적 활극이었다.


2) 대한민국 파병 동의 : “전후 이라크의 신속한 평화 정착과 재건 지원”

파병 반대의 열기가 조금씩 고조되는 가운데, 미국의 요청을 거절한 프랑스나 독일과는 달리 노무현 참여정부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전쟁이 터진 다음날인 2003년 3월 21일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파병안을 의결하고, 오후에 국회 국방위원회까지 통과시켰다. 정부는 미국의 파병 요청을 거부할 의향도 용기도 없었다. 어차피 파병을 할 바에야 하루라도 빨리 보내야 명분을 살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뿐이었다. 정부의 이라크 파병 동의안은 그 목적으로 “전후 이라크의 신속한 평화 정착과 재건 지원”을 적고 있다. “파병을 했다고 반드시 미국에 굴종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이라크라든지 아랍세계와 적대적이 되는 것도 아니다.”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과,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유엔 헌장을 위반한 불법행위”라는 코피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발언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타당한 것일까?

 

3월 말 국회의원 53명이 파병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김창국)도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파병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국가기관으로서 부적절한 태도라고 지적했고, 한나라당은 국가인권위원회의 본분을 망각한 국론 분열 행위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으며, 자민련은 항명행위라고 흥분했다. 국회는 서둘러 4월에 파병동의안을 통과시켰고, 4월 17일 서희부대와 제마부대 선발대가 미연합군에 합류했다. 월간조선의 조갑제는 ‘파병 지지 4대 이유’로, 국제평화에 기여, 한미동맹 강화, 국익 확보, 국군의 훈련—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다. 해외파병은 군의 중요한 노하우—등을 꼽고 있다.

 

첨단무기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이라크를 점령한 미연합군은 사담 후세인을 축출하고 5월 1일 사실상 이라크에서 주요 전투 행위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라크 상황은 종전 선언 이후에 도리어 악화되기 시작했다. 9월이 되자 미국은 추가 파병을 요청하며 사실상 전투부대를 원했고, 2004년 2월 추가 파병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공식 명칭 이라크평화재건사단은 아랍어로 올리브란 뜻의 ‘자이툰’이란 별칭으로 불리었는데, 올리브의 상징은 평화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이라크 전쟁 자체를 침략전쟁으로 규정했다. 전투병력이나 치안을 유지하는 목적의 일체 행위를 미국과 같은 침략행위로 바라보면서, 국군의 파병은 절대 불가 원칙을 고수했다. 2003년 3월 21일 국회 앞 거리 기자회견에서 민주노동당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2003년 3월 20일. 세계는 ‘야만의 시대’를 맞이하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은 이라크 바그다드에 최첨단 미사일과 전폭기를 퍼붓고 있다. 역사상 가장 부도덕하고 비이성적인 침략전쟁 앞에 전세계는 경악과 전율에 몸서리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단연코 확신한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이라크의 석유자원을 독점하기 위한 ‘석유전쟁’이며, 친미정권을 수립해 중동지역의 패권을 독점하려는 ‘침략전쟁’이다. 국제법과 국제기구를 부정하고 국제질서를 파괴한 미국은 ‘세계 최강의 경찰국가’가 아니라, ‘세계 최대의 깡패국가’임이 분명해졌다.”

 

“노무현 정부 또한 전쟁 지지와 파병 결정을 지금 당장 철회해야 한다. … 노무현 정부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세계 평화를 짓밟는 침략전쟁에 동참하겠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라크전 파병을 강행하면서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은 심각한 자가당착에 빠져있을 뿐이다. 결국 노무현 정부의 전쟁 지지와 파병 결정은 부시 행정부의 더러운 ‘전쟁 범죄’ 행위에 동참하는 것이다.”


3) 전쟁 그 이후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가 세계 곳곳에서 이어졌으며, 민간지역에 대한 오폭 등으로 인해 민간인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비난의 강도도 더욱 거세졌다. 게다가 미국의 실질적인 목적이 이라크의 자유보다는 ① 이라크의 원유 확보 ② 중동 지역에서 친미 블록 구축 ③ 미국의 경기 회복을 위한 돌파구 마련 ④ 중동 지역 정치구도 재편 등에 있다는 이유로 각국의 비난이 쏟아졌다.

이후 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실패와 예상치 못한 사태들이 발생했으며 전쟁의 가장 큰 명분 중 하나였던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는 데도 실패했고, ‘9?11테러의 배후’ 혐의를 입증하는데도 실패했다. 전쟁의 여파로 이라크 내에 수많은 반군 조직이 생겨났고, 이들은 제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라크인들이 희생양이 되었다. 2010년 8월 오바마 정부는 이라크 주둔군 감축을 시작으로 2011년 12월 15일 미국에서 공식으로 종전을 선언하였으며 12월 18일 미군은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라크의 자유’ 작전은 ‘이라크의 폐허’로 끝나고 말았다.

 

7년간의 이라크 전쟁을 치루는 동안 4,400명의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고, 7,480억 달러의 전쟁비용이 소모되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치른 가장 값비싼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이라크 전쟁으로 미군 사망자를 뺀 이라크인 사망자 수는 최소 10만 명에서 최대 200만 명까지 거론되고 있다. (영국의 일요신문 옵서버의 2007년 9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2003년 이라크 전쟁 개시 후 이라크에서 사망한 희생자가 120만 명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국제사회는 7년간의 이라크 전쟁을 ‘이라크엔 혼란, 미국엔 상처만 안겨준 전쟁’이자, 민간인 집단학살과 인권유린을 특징으로 한다고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2. 1970년 3월 17일 정인숙 피살 사건.

 

1) ‘3공 요인백서’와 한국 현대사의 미스터리

박정희 정권의 독재통치가 막 뿌리 내리던 시기였던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도로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찰의 수사결과 발표에 따르면, 피살된 사람은 정인숙이라는 여인이었고, 범인은 운전사인 그녀의 오빠 정종욱이었다. 범인 정종욱이 사생활이 문란했던 여동생 정인숙에 대해 격분한 끝에 권총으로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장안의 신문에 대서특필돼 오던 정여인 피살사건은 3월 27일 이후에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가 작용한 보도통제 결과였다.

 

이 사건은 계획된 각본에 의한 타살이자 청부살인의 의혹을 받아 온, 대한민국 제3공화국의 권력층 스캔들로 비화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정인숙의 자택에서 발견된 포켓용 수첩과 장부에 적힌 내용은 가히 ‘3공 요인백서’라고 할 수 있었으며, 이 때문에 희대의 정치스캔들은 더욱 확대되었다. 정인숙의 수첩에는 박정희 대통령, 정일권 국무총리,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 장관, 차관급 인사들, 대한민국 국군 장성, 5대 재벌그룹 회장, 국회의원 등 주요 인사 27명을 포함한 권력 실세들 수십여 명 이름과 연락처, 일시와 장소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최고권력자를 포함하여 막강한 권력자들과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알려진 한 여인을 결국 비명횡사의 길로까지 몰고 간 이 사건은 박정희 시대 권력 상층부의 도덕적 파탄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언론은 한국판 ‘크리스틴 킬러’ 사건(‘프러퓨모 사건’)이라고 명명했으며, 야당인 신민당은 국회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면서 정치 문제화하였다. 1970년 5월 13일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기이한 ‘정책질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신민당의 조윤형 의원이 대정부 질의를 하면서 당시 세간에 유행되고 있던 정인숙 사건을 풍자한,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개사해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을 소개한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랑은 눈물의 씨앗’은 금지곡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사건의 전모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온갖 추측만이 난무했을 뿐이다. 정일권 국무총리의 이름이 수없이 거명되었고, 심지어는 대통령 이름도 거론되었다. 어느 나라든지 정치인과 고위층의 스캔들은 있게 마련이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정치생명이 끝나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문제가 정확히 밝혀지기란 어려웠다. 야당인 신민당은 이 사건의 배후로 정부 고위층의 개입 의혹을 제기했으나 유야무야 묻혀졌다. 정인숙 살해 사건은 정종욱의 단순 살인사건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진범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의혹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증거는 오직 정종욱의 자백뿐, 사건은 서둘러 종결되었다.

 

정인숙 살해 혐의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뒤 1989년 가석방으로 풀려난 정종욱은 당초의 진술을 번복, “동생과 관계했던 고위층이 뒤를 봐준다고 했다는 아버지의 회유로 거짓자백을 했을 뿐, 집앞에 있던 괴한들이 동생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2000년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의 인터뷰에서는 “‘국무총리실에서 심부름 왔다’는 저격수에게 동생이 살해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무튼 정인숙 사건은 ‘권력기관에 의한 살인’이라는 세간의 의혹을 잠재우지 못한 채 한국 현대사의 미스터리 사건이자 지금까지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다.


2) 김지하의 <오적 五賊>과 정인숙 피살 사건

1970년 새해가 밝았다. 정국 상황은 날이 갈수록 뒤숭숭해지고 있었다. 박정희 시대의 ‘반체제 저항시인’ 김지하는 이즈음 자신의 운명을 바꿀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상계> 편집장 김승균으로부터 ‘동빙고동에 오적촌이라는 곳이 있다더라. 여기에 대한 장시(長詩)를 하나 써 달라’는 청탁을 받은 것이다.

 

<사상계> 1970년 5월호에 발표된 김지하의〈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군 장성, 장차관 등 ‘다섯 도둑’을 통해 박정희 정권의 부패상을 통렬히 비판한 풍자 담시(譚詩)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시를 읽고 분노했으나 김계원 중앙정보부장은 소리없이 묻어 두는 게 낫다는 쪽으로 대통령을 설득했고 결국 잡지만 수거하고 판매 않는 조건으로 눈감아 주기로 했다.

 김지하는 다섯 도둑을 나라 팔아먹은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빗대 ‘오적(五賊)’이라 칭했다.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것다.”라는 설화조로 시작되는 오적. 빙고동 고급주택을 도둑촌이라 하면서, 정인숙 피살을 정치적 사건으로,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을 고위 공직자의 부패에서 기인한 것으로 묘사해 상류층의 타락상을 폭로했다. 

 

혁명이닷, 구악(舊惡)은 신악(新惡)으로! 개조(改造)닷, 부정축재는 축재부정으로!

근대화닷, 부정선거는 선거부정으로! 중농(重農)이닷, 빈농(貧農)은 이농(離農)으로!

건설이닷, 모든 집은 와우식(臥牛式)으로!
사회(社會) 정화(淨化)닷, 정인숙(鄭仁淑)을 철두철미 본받아랏!

 

그런데 당시 10만부씩이나 찍어 가두판매까지 하던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 1970년 6월 1일자에 다시 이 시가 실리면서 정치 문제로 비화됐다. <사상계> 대표 부완혁과 편집자 김승균과 김지하 등 세 명이 모두 ‘남산’으로 붙잡혀갔다. 대한민국의 극심한 부패상을 폭로하는 것은 ‘북괴 주장에의 동조’에 해당되는 것으로 반공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이같은 강경 조치는 <오적>에도 언급된, 당시 물의를 빚었던 ‘정인숙 사건’과 무관치 않았다. 육법전서를 넘어 이른바 ‘제7법’을 위반한 괘씸죄에 걸린 것이라는 항간의 소문도 나돌았다. 결국 정인숙 관련 <오적> 시 게재 이후 <사상계>는 다시 나오지 못했다. 통권 205호로 끝난 것이다.


3) 의문사한(?) 정인숙은 국가폭력의 희생자

정인숙의 죽음을 의문사라고 할 수 있을까? 의문사란 글자 그대로 죽음이라는 결과를 불러일으킨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밝혀지지 않은 외적 힘의 작용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을 개연성이 높은 경우를 말한다. 또 외부의 요인이 밝혀졌다 해도 그 목적이나 죽음에 이르게 한 과정 등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경우도 이에 포함된다. 이러한 의문사가 양산되는 사회는, 그 문제 해결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사회는 한마디로 인권 부재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의문사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 이 가운데 정치적 의문사란 국가의 직?간접적인 개입 의혹이 있는, 즉 ‘사인이 명백히 자연사로 확인되지 아니하고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사망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또 ‘타살당했음이 분명한 심적 및 물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에 의해 은폐?조작되어 사인조차 철저하게 묻혀버린’ 많은 죽음들을 말한다.

국가폭력에 의한 억울한 죽음은 대한민국 현대사 곳곳에서 발견된다. 민간인 집단학살 이외에도 박종철 고문치사와 법살(法殺)로서 죽산 조봉암의 죽음을 비롯해, 전태일의 분신과 같은 강요된 자살, 장준하·최종길 교수 등 민주화 운동가들의 의문사도 있다. 정치적 색채가 없으면서도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개인들도 있다. 진상이 밝혀진다면 정인숙이 그런 예에 해당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3. 2002년 3월 17일 루이제 린저 사망

루이제 린저(Luise Rinser)는 독일의 여류 작가로 전후 독일의 가장 뛰어난 산문작가로 평가받는다.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의 ‘정치적 동반자’로 불리던 그는 1984년 녹색당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낙선한 적도 있다.

 

그의 대표작 <생의 한가운데>(1950)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사랑과 좌절과 생에 대한 집념이 응축되어 나타난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고전으로, 여주인공 니나를 사랑하는 남자 주인공 슈타인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담은 작품이다. 독일에서만 100만부 이상이 팔릴 정도로 당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허무주의에 빠져있던 유럽 젊은이들을 여주인공 니나의 삶을 통해 열광시키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소설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의식깨나 있다고 생각하는 여성의 대부분이 자신을 여주인공 니나와 동일시할 정도로 이 장편소설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루이제 린저의 삶을 돌아보면, 1944년 남편이 정치적으로 불순하다는 이유로 징집돼 러시아 전선에서 전사하고 만다. 또 린저는 히틀러 정권에 반발했다는 이유로 작품 출판금지를 당했고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어 반나치스 활동으로 투옥되었으며, 1944년 10월 국가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종전돼 1945년 석방되었다. 린저는 일기형식인 <옥중기>를 통해 이때의 경험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 작품을 계기로 그녀의 문학세계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묘사하는 것에서 벗어나 인류의 세계사적 비극에 눈을 돌리게 됐다고 한다.

 

루이제 린저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배경에는 비운의 음악가 윤이상과의 각별한 인연도 있다. 린저가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전남편인 작곡가 카를 오르프를 통해 당시 독일에서 활동 중이던 작곡가 윤이상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윤이상이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납치되면서 그의 한국에 대한 시각은 나치시대에 체험한 극한의 공포정치와 겹쳐지게 된다.

 

동백림 사건의 요지는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면서 간첩교육을 받고 대남 적화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간첩으로 지명된 교민과 유학생은 서독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로 대한민국으로 송환되었다. 1967년 선고 공판에서 관련자 중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대법원 최종심에서는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없었다.

 

윤이상은 동백림 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투옥생활을 했지만 후일 고문에 의해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져 누명을 벗었다. 그럼에도 아직껏 근거없는 주장으로 그를 비난하고 욕되게 하는 이들이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후일 윤이상은 그의 자서전격인, 루이제 린저와의 대화 <상처 입은 용>에서 고향 통영에 돌아가 노년을 보내다 그곳에 묻히고 싶다고 소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책에는 윤이상이 작곡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에 얽힌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나비의 미망인>은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 고사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인데, 이 희극 오페라가 작곡된 곳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서울구치소 감방 안이었다. 동백림 사건이라는 거대한 간첩조작사건에 연루돼 사형 구형이 확실시되던 상황이었다. 이 작품에 대해서 윤이상의 미망인 이수자는 이렇게 말한다.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을 생각하면 참 신기합니다. 작곡가는 그 추운 겨울에 손이 얼어서 호호 하면서, 책상도 없이 심장 나쁜 사람이 엎드려서 한 음 한 음 써 갔답니다. 그런데도 연주를 하면 그런 어두운 구석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답니다. 오히려 희극적이고요.” 이렇게 완성된 오페라는 윤이상이 투옥중이던 1969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큰 호응 속에 초연되었다.

 

훗날 윤이상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옥중에 있었지만, 마음까지 갇혀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끔 나는 정말로 행복하기조차 했다. 나를 작곡이라는 일로 몰입하게 한 것은 작곡이라는 일 자체였다.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유로운 정신을 가두어둘 수는 있지만,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4. 맺는 글 : 거꾸로 돌아가는 대한민국 인권시계

1) 2004년 5월 10일 원희룡 의원은 한나라당 상임운영위원회의에서 “정확한 정보 제공과 정부의 입장 개진을 요구하고, 당내에서 본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며 이라크 파병 재검토를 촉구했다. 그러나 박근혜 당 대표의 답변은 “국회에서 통과된 것이기 때문에 그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는 고장난 녹음기의 재생이었다. “정부와 여당에서 문제가 있다고 논의를 요청해오면 논의를 할 수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역시 책임을 회피하는 답변이었다.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 대한민국은 박근혜 정부 집권 3년차를 경과하고 있다. 1964년 해외파병의 첫 테이프를 베트남 파병으로 끊은 뒤 50년이 흐른 2014년 3월 현재, 레바논 동명부대, 소말리아 청해부대, 아프간 오쉬노 부대, UAE 아크부대, 남수단 한빛부대, 필리핀 아라우 부대 등 총 6개 파병부대가 “세계평화와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맡은바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한다. 정말 우리의 위상은 성실한 임무수행 결과 말처럼 드높아지고 있는 걸까?

 

만약 미국으로부터 이라크 파병 요청이 온다면,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는 과연 어떤 판단과 결정을 내릴까? 선친의 예를 따라 선제적이며 적극적인 자세로 응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의 압박에 굴복한, 회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노무현 참여정부의 예를 따를 것인가? 짐작컨대 대한민국 헌법 제5조 ①항(“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의 헌법정신을 지키며 파병 요청 거부를 선택할 가능성은 없지 않을까 싶다.


2) 2015년 2월 국제앰네스티는 박근혜 정부 출범 2년을 맞아 국내 인권 상황이 후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2014/15 국제 앰네스티 연례보고서’). 지난 2008년 이후 국제 앰네스티가 연례보고서에서 경찰력 사용, 국가보안법 자의적 적용, 국가인권위원회 독립성 훼손 등 구체적인 인권 사안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적은 있지만 인권이 후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직접 표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고서는 “300명 이상이 사망한 세월호 참사에서 효과적인 재난대응 및 조사의 불편부당성에 우려가 제기됐고 국가정보원이 간첩 사건에서 증거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으며 정부의 권력 남용에 대한 우려가 나왔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김희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처장은 “그간 보고서에서 나온 적 없던 ‘후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면서 “전반적으로 인권 문제가 심각해지고 정부가 문제 해결을 위한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판단에 기초한 결론”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현행 법령 중 인권이란 용어를 포함하고 있거나 인권을 보장하는 법령 중 인권이란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의한 법은 국가인권위원회법이 유일하다고 한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제 1조는 “모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그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하고 민주적 기본질서의 확립에 이바지함”이라고 그 설립 목적을, 제2조 제1호는 “헌법 및 법률에서 보장하거나 대한민국이 가입 비준한 국제인권조약 및 국제관습법에서 인정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가 바로 인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집단으로 전락했고, 현 박근혜 정부에서도 이름에 걸맞는 역할을 전혀 못하고 있는 것은 여전하다. 국가인권위는 2014년 3월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로부터 ‘등급보류’ 판정을 받는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 2004년 ICC 가입 때 A등급을 받았고 2008년까지 같은 등급을 유지하다가 점점 추락, 급기야 낙제까지 하게 된 것이다.

 

한편 2015년 2월 국가인권위가 작성한 <자유권규약 제4차 국가보고서 심의관련 정보노트> 최종안에, 초안에는 있었던 세월호 참사, 사이버 사찰 논란, 집회·시위 현장에서의 경찰 채증, 쟁의 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및 가압류, 비판적 언론인에 대한 고소사건 증가 및 청와대의 언론인 고소, 군 영창제도, 공권력 집행 시 경찰 식별표식 불명 등 정치적으로 민감하거나 중요한 인권 현안을 삭제한 채 유엔에 제출한 것이 드러났다.

 

이것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인권침해 상황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며, 국민 인권 보호라는 기본적인 역할을 방기한 채 정권의 안위만을 위한다면 인권 최후의 보루로서 인권위원회의 존재 자체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다. ‘국가인권위원회=국가망신위원회’이자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인권시계’라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대통령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또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은 이런 국제적인 망신살을 창피하게 여기기나 하는 걸까? 그간의 행태를 보면 아마도 대한민국 인권상황을 악화시키는 데 일조한 것을 대통령에게 자랑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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