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에서 사회적 의제로 “경제민주화”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 경제민주화 추진방향에 대한 시사점
2012년 총선과 뒤이은 대선국면에서 ‘시대정신’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경제민주화는 사회적 의제 또는 사회개혁의 화두가 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히 한국의 보수진영이 수용할 것 같지 않았던 이 의제를 보수 후보가 자신의 것으로 내세움에 따라 이러한 평가는 더 공고해 졌다고 할 수 있다. “경제민주화”는 시장경제영역에 민주주의의 원칙을 “통합”(이 용어는 논란이 많을 텐데, 대표적으로 통합이 아니라 “확장”이라고 표현하는 입장이 있다. 통합이냐 확장이냐에 따라 자본주의시장경제시스템과 민주주의, 그리고 둘 간의 관계에 대한 해석을 달리한다)시키려는 것이며, 그것을 어떤 명확한 도달점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process)으로 이해하려는 표현이다. 경제민주화가 표방하는 사회적 과제는 민주주의의 심화·발전을 통해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양극화와 신빈곤, 그리고 경제력 집중문제 등 시장실패의 폐해를 해소함으로써 대다수 국민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든 중요한 구조적 변화들은 사회운동의 측면과 체제모순의 (일시적) 돌파구라는 측면을 갖고 있다. 또한 국제적 배경과 국내적 배경을 갖는다.
따라서 현재 한국에서의 경제민주화 요구도 ①전세계적인 반(反)신자유주의와 반세계화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그 흐름과 일정한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②특히 미국발 글로벌 경제위기이후 서구에서 시장에 대한 재규제(re-regulation)의 필요성이 사회적, 정치적 공감대를 얻고 있는 데서도 영향을 받는다. 이는 주로 체제위기에 대처하기 위해(금융시장과 시스템의 안정을 회복하려는 목적에서) 금융에 대한 개혁을 모색하는 국제적 정책공조와 관련을 갖는다. ③ 월스트리트 점령운동과 같은 불공정한(소수의 엘리트 세력이 엄청난 이득을 올리면서도, 자신들의 행동에 따른 결과로 인한 부실은 납세자에게 전가하는 것의 불공정함) 금융환경과 시스템에 대한 시민적 저항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적 배경은 한국경제의 특수성 때문에 경제민주화 요구의 일부만을 구성한다.
국내적인 배경은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정치민주화 25년의 사회경제적 결과에 대한 실망이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담론으로 나타났다. 이는 두 가지 복합적인 성격을 갖는데, 하나는 ‘밥을 제대로 먹여주지 못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이며 심판이다. 이것이 이른바 ‘민주화 세력’(산업화 세력에 대비되는)의 정치적 몰락이며 진보세력의 쇠잔으로 나타났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와 민주화의 완성(밥 먹여주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른 표현이 아닌 경제 ‘민주화’이다. 둘째, 경제민주화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80년대 초부터 정부정책차원에서까지 다루어졌고, 1987년 민주화 운동과정에서도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던 경제민주화는 그러나 대중적 핵심의제가 되지는 못했다(당시 경제민주화가 정치적 민주화에 함몰되면서 사회적 저변도 약했던 이유-물론 진보적 지식인 집단내에서의 논의는 뜨거웠다-는 따로 분석이 필요한 문제이다). 돌이켜 보면 1980년대 경제민주화의 주된 내용은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의 근절이었다. 그래서 민간기업에 대한 정부통제를 축소한다든가, 금융을 자율화하고 준조세를 폐지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게 제시되었다. 물론 노동3권의 보장, 지역간·산업간 격차의 해소, 사회적 기회균등의 과제도 제시되었지만, 전체적으로 평가하면 ‘공정한 시장질서’(시장기구 또는 가격기구의 정상화)를 확립하는 것이 1980년대 후반 경제민주화의 과제로 받아들여졌다. 이것이 현재 박근혜정부의 경제민주화 버전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게 아닌가 싶다(‘원칙이 바로 선 시장경제 질서 확립’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원리적으로 모순없는 아주 낮은 단계의 고전 자유주의적 경제민주주의 개념(사전적事前的 기회균등의 민주주의)에 가깝다. 따라서 현재 경제민주화는 1980년대 경제민주화 운동의 흐름을 또 하나의 배경으로 한다. 김대중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목표로 제시해 경제민주화에 대한 나름의 개념을 국정목표에 포함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확립만을 강조하고 경제력 집중 문제 등 시장의 실패에 대한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는 비중을 크게 두지 못했다. 즉,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결합’ 보다는 ‘병행’에 방점을 둠으로써, 신자유주의의 특징인 경제와 정치의 ‘분리’라는 인식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약점은 외환위기라는 상황논리 속에서 기득권 세력의 성장 논리앞에 개혁이 좌절하는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셋째, 경제민주화가 새로이 뜨는 것은 중소기업과 자영업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광범한 합세를 배경으로 한다. 사회경제적으로는 양극화와 증폭되는 사회적 갈등이 배경이다. 그래서 ‘1:99’가 설득력을 얻었다. 최상위의 독점대기업(집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자본분파까지 포함하는 경제민주화 요구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수용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다. 독점대기업(집단)이 시장의 가격기구를 왜곡시키고 사유화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힘(경제권력)을 갖고 있는 경우, 시장질서 자체가 불공정과 특권과 가격왜곡을 가져 오는 원인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시장질서 확립으로는 시장경제의 정상화와 경제성장을 꾀할 수 없다. 정부가 아니라 시장과 그 속에서 자유로운 기업이 바로 문제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민주화는 자본주의의 금과옥조인 사유재산제도의 수정까지도 포함하는 체제전체의 개혁요구로 발전한다.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이런 종류의 경제민주화는 사민주의적 경제민주화(미국의 뉴딜체제를 포함하여 수정자본주의 시대 혹은 혼합경제체제의 경제민주주의)였다. 따라서 작금의 경제민주화는 한국에서 사민주의 개혁의 조건이 갖춰지고 있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배경은 앞으로 추진해야 할 경제민주화의 방향과 과제에 대해 시사점을 준다. 1)경제와 정치의 이분법적 분리를 경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재벌문제는 정치문제이다. 후술하듯이 중앙은행의 금리결정은 시장논리에 따른 것인가? 정치논리에 따른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2)경제민주화는 대중의 생활상의 요구와 결합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정치적 민주주의의 발전과 상호 보완 및 강화하는 관계가 만들어 질 수 있다. 그래야 정치민주화와 경제민주화가 모두 지속가능해 진다.
*) 80년대 후반의 경제민주화 논의에 관해서는 다음 문헌 참고.
전철환(2002), 『경제민주화와 위기의 대응철학』, 지식산업사.
학현 변형윤 박사 정년퇴임기념논문집간행위원회(1992), 『경제민주화의 길』, 비봉출판사.
2. ‘복지 담론’과 ‘경제민주화’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
지난해 야권은 물론이고,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핵심 공약조차도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국민통합’이었던 것처럼(물론 경제민주화 공약은 선거 뒤에는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 불안하다), 경제민주화와 복지담론은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이 둘 간의 관계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경제민주화 없는 복지 가능한가”와 같은 질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경제민주화 없는 복지도 가능하다.
노동권 보장보다 노동조건과 임금 등의 실질적 혜택을 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라는 견해는 실제로 일부 재벌에서 실행되었다. 이 경우의 실질적 혜택은 시혜성 혜택이다. 노동자의 발언권도 없고, 집단적 교섭과 타협과정을 훈련할 수도 없다. 경제민주화의 핵심을 모든 주체가 평등하게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 힘의 균형과 상호 견제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보면, 시혜성 혜택이나 시혜성 복지는 경제민주화와 직접적으로는 상관없다. 또 한편 경제민주화와 상극이라는 신자유주의를 상징하는 IMF는 개발도상국에게 구조조정과 함께 복지확대를 권한다. 한국도 김대중 정부시기에 복지 확대속도가 매우 빨랐다. 그 이후에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지출 규모가 여전히 낮지만, 복지지출의 증가속도는 빨랐다. 신자유주의가 왜 복지를 필요로 하는가는 별도로 논의할 만한 주제이다.
그러나 시혜를 베푸는 측의 일방적 변심으로 철회될 수 없는 복지, 제도화된 복지, 지속가능한 복지를 원한다면, 경제민주화 없는 복지제도는 불가능하다. 복지제도가 도입되고 그것이 지속가능하려면 그 복지제도를 정당화해 줄 수 있는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 즉 이념의 변화가 있어야 하며 경제민주화는 그 이념의 역할을 담당하기에 제격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복지제도의 조직 원리는 평등과 참여라는 민주주의의 이념에 바탕을 둘 때 시혜가 아닌 권리로서의 복지가 만들어 질 수 있다.
따라서 경제민주화 없는 복지란 소득 및 자산소유의 불평등이나 양극화와 빈곤과 같이 복지 수요를 낳는 원인은 그대로 둔 채 사후에 조세 등에 의한 재분배를 통해 문제를 해소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매우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고, 계층·계급간 소득불평등이 심화될수록 그 비용은 갈수록 누적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비효율적이며 지속불가능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서로를 강화시켜주고 보완할 수 있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민주화 없는 복지는 지속가능하지 않고, 복지 없는 경제민주화는 공허하다.
경제민주화는 재분배 이전의 시장소득 자체에 영향을 주려는 것이므로, 경제민주화의 이념이 충분히 실현되어서 모든 국민이 완전고용과 힘의 균형에 의한 공정한 시장소득으로 충분한 소득을 얻을 수 있다면 사후적 복지의 필요성도 줄어 들 것이다. 이렇게 보면 특정계층으로의 소득집중과 계층간 소득불평등이 심화하는 조건자체를 바꾸는 일종의 선제적 복지라고도 할 수 있다.
3. 경제민주화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왜 의견이 분분한가?
: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이해와 경제민주화 논의의 특성
경제민주화를 이해하는 첫걸음으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간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크게 보아 두 견해가 대립하는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정합적이다’라는 견해와 ‘(진정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견해가 모두 성립하고 있다. 전자에 따르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 자율, 경쟁과 같은 기본원칙을 공유하므로 서로가 서로를 이끄는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 이 경우 민주주의는 각 개인의 자유로운 정치적 아이디어가 서로 경쟁하는 절차요 장소가 된다. 그리고 그 경쟁이 자유롭고 공정하고 주기적인 선거 등의 형태로 반복되기만 하면 민주주의이다. 이를 위해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가 중요하다. 반면 후자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인권과 평등을 추구하지만, 인권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재산권과 충돌하며, 평등은 시장경제가 초래할 수밖에 없는 불평등과 충돌한다. 특히 독점자본주의가 성립하면 양자 간에는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요인들이 누적된다. 개인이나 집단의 경제적 차이가 사회적 특권을 발생시킬 뿐만 아니라 그 특권을 인정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그리고 그 특권이 다시 정치경제적 권력을 형성하고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자 간에 존재하는 체계적 친화성이나 일관성, 혹은 체계적인 충돌과 모순을 한번에 깔끔하게 정리해 줄 논리나 개념틀을 사회과학, 특히 경제학에서 찾기 어렵다. 양자 간에는 공존가능한 부분과 긴장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고, 그 양태는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시기적으로나 지역적·국가적으로 다양하기 때문이다.
경제민주주의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복지국가 담론을 예로 들어 보더라도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주류적인 견해는 민주주의가 발전하면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초래하는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 즉 복지국가를 낳는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는 국가마다 다양한 유형이 있다는 사실과 자본주의에도 다양한 유형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진다. 그냥 생각만 해보면 다양한 유형과 다양한 유형이 서로 만나 이루는 조합은 굉장히 많을 것이고, 어느 조합에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서로 조응하고 또 어떤 다른 조합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민주주의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간의 조응과 공존을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민주화 논의는 굉장히 실용적, 실사구시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어떤 특정 시기, 특정 국가나 지역의 특정 문제와 집중적으로 관련을 맺게 된다. 계층·계급별로 느끼는 문제는 다를 수 있다. 그 때문에 경제민주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게 마련이고, 이번 대선에서 보듯이 과거에 전혀 다른 말을 하던 사람들도 갑자기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든다. 이렇게 보면, 앞에서 신자유주의 복지체계가 가능하다고 했지만, 신자유주의 경제민주화도 가능하다. 끝으로 사이비 경제민주화라고 할 수도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민주화의 내용과 특징만 간단히 짚어 두기로 하자. 시장기능의 정상화를 요구하지만, 독과점과 외부효과 등 시장의 실패를 억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마련에 소홀하고 재벌 등에 의한 경제력 집중이 시장경쟁 자체를 왜곡시키는 것을 막아야 하는 과제에는 눈을 감는다. 가장 큰 특징은 경제와 정치를 이분법적으로 분리시킨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중요한 표어는 “정치는 정치논리로, 경제는 경제논리로!”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민주주의를 관념적으로 구분된 정치적 영역에 가두어 둔다. 김대중 정부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론”이 왜 그렇게 IMF 개혁 프로그램에 무기력했으며, 오히려 친화적이기까지 했던 이유이다.
4. 경제민주화의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앞에서 경제민주화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간의 조응과 공존을 추구하는 것이며, 매우 실용적, 실사구시적인 경향을 갖는다고 했다. 그리고 비록 사이비라고 불렀지만, 신자유주의 경제민주화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사회가 직면한 치명적 문제들, 즉, 양극화, 갈수록 심화되는 소득과 자산소유의 불균형, 가계소득의 위축, 사회적 격차와 차별의 확대, 장시간 노동, 청년실업과 노년층의 빈곤, 일자리 질의 악화와 노동빈곤(working poor),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불공정 거래, 지역갈등, 자영업의 몰락 등을 일부라도 완화시키고 해소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경제민주화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단순히 시장에 민주주의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을 넘어 경제체제에 민주주의를 결합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민주화의 구체적 개념과 내용은 한 두 마디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재벌개혁뿐만이 아니라 투기금융 규제, 동반성장, 노동 및 산업 민주화, 복지와 증세 등 경제체제의 개혁에 폭넓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장경제 자체에 민주주의 원칙인 힘의 균형과 견제의 원칙, 책임의 원칙 작동되어야 하는 것이다. 중소기업과 대기업간에 힘의 균형과 견제, 대등한 파트너로서 자본과 노동간의 힘의 균형과 견제, 소비자와 생산자간의 힘의 균형과 견제, 주주(투자자)와 노동자간의 힘의 균형과 견제, 지역주민과 기업간의 힘의 균형과 견제........(강의를 들으시는 분 계속해 보세요). 또 앞에서 경제와 정치의 분리를 극복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극복에 중요하다고 했는데, 예를 들어 보자. 오늘날 가장 기본적인 경제변수라 할 만한 금리가 시장에서 결정된다고 누가 믿을까. 중앙은행이 정하는 금리가 기준금리 즉 기준이 된다. 그리고 중앙은행의 결정은 정치적이다. 환율은, 물가는 또 어떤가. 따라서 경제민주화는 기준이 되는 가격 결정의 방식을 투명하게 하고 민주화하는 과제도 포함한다.
이렇듯 서로 조응하는 경제체제와 정치체제의 각각의 변화에 대한 비전을 담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모호해 지는 것도 사실이다. 경제민주화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응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므로 신자유주의가 뭐냐는 문제가 모호한 만큼 꼭 그만큼 모호하다.
그래서 경제민주화에 대한 상상력을 끌어내고 그 내용과 구상을 발전시킬 사례를 찾아 연구하는 것이 유용하다.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와 지본주의간의 공존이 가장 많은 진전을 보인 시기와 지역은 전후 황금기(브레튼 우즈시기, 2차대전 이후~1970년대 초)이며, 사민주의 노선을 취한 서유럽이다. 여기에는 뉴딜이후 미국도 포함된다. 이는 곳 수정자본주의 혹은 혼합경제의 시기이며 지역이다. 다수의 연구가 이 시기에 서구 전반에 걸쳐 정책과 제도에 있어서 사민주의적 경향이 나타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패전이후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 단행되었던 일본의 경제민주화 정책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50년대와 60년대의 대호황은 자본주의의 전성기였다. 정치적인 견해차이는 단일한 사회 민주주의적 합의(social democratic consensus)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 합의를 좌우파 정당들은 대체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Armstrong, P., A. Glyn and J. Harrison,1991, Capitalism since 1945, Blackwell, 김수행 역,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 동아출판사, pp. 16-17.)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심지어 보수주의 정권이라고 해도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을 띠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1980년대 이후에는 대부분의 사회민주주의 정권들이 시장자유주의로 전환하였다.”(Dullien. S, et al. 2011, Decent Capitalism, Palgrave Macmillan, 홍기빈 역, 『자본주의 고쳐 쓰기』, 한겨레출판, p.64.)
“...자본주의 경제에서 나타나는 시장실패를 인정하고, 경제계획과 국공영기업, 그리고 정부의 시장 개입을 허용한다는 의미이다. 노조 결성 등 노동자의 권리가 인정되었고, 정부는 복지 서비스의 제공과 완전고용을 유지할 책임을 지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사회적 목표로서 복지 국가를 지향했기 때문에, 의료, 건강, 교육, 육아 등 사회복지 서비스가 시장의 논리(혹은 상품의 논리)가 아닌 정치의 논리로 다루어지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강했다. 이와 함께 정치 민주주의뿐 아니라 경제적 민주주의가 중요한 사회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실업율의 하락과 같은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간 산업이 국유화되었고, 노동자 지주제나 경영참가제도 국가별로 나타났다.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 제도적으로 허용되었고, 제한적이지만 친노동자 정책이 실행되는 경우도 많았다. 자본과 노동 사이에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적 합의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사회주의권의 성립, 그리고 1930년대 대공황, 그리고 전후 호황 등을 조건으로 급성장한 노동운동과 그것에 밀린 자본가 계급의 양보였다. 신자유주의는 서구사회에서 사회민주주의적 합의의 파기를 의미한다.” (유철규, “제9장 신자유주의”, 1절,『현대 마르크스 경제학의 쟁점들 』김수행?신정완(2002), 한울)
전후 자본주의는 경제민주화의 내용을 채우는데 중요한 상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물론 한국의 현재 과제가 무엇인가가 그 내용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서구의 예를 볼 때 한국은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하나는 복지제도의 정립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에 대한 동반자로서의 노동의 권리(노동자의 경영참가권, 이윤분배권)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 과제들은 서구가 장기간에 걸쳐 때로는 단계적으로 이루어 냈던 것이지만, 한국은 동시에 직면해 있다. 또한 경제민주화는 그 이념적 특성상 정치적 성향의 좌우 양극단으로부터 항상 공격을 받는다는 점은 기억해 두자.
5. 왜 재벌개혁인가?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재벌체제의 공과를 논하고, 현 단계 한국경제에서 재벌이 끼치는 폐해에 대해서 이미 많은 논의들이 전개되어 왔기 때문에 여기서 세세히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좌우를 막론하고 경제민주화를 거론할 때나 아니면 경제활성화를 이야기할 때 조차,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재벌개혁인 것도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야권이나 진보진영으로 눈을 돌릴 필요도 없다.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실천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참조하자). 이는 매우 당연한데, 한편에서는 재벌이 권력화되었고 이 권력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재벌이 그 공과를 따질 수 있는 단계를 훨씬 지나쳐 한국경제 침체의 주요인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독점적 지위를 지닌 대기업만 해도 그것이 갖는 사회적 영향력과 권력이 정당화될 수 없는데, 여기에 더해 한국의 재벌은 총수와 같이 특정 개인의 권력화까지 이루어졌다. 현대 사회에서 어떤 형태의 권력이든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민주주의뿐이다.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어떠한 권력도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정당화될 수 없는 권력의 으뜸이 바로 재벌이 갖는 경제권력이다. 문어발의 개수와 크기에서 경제에 대한 장악력이 워낙 크다보니, 재벌을 말하지 않고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이 한국에 존재할지조차 의문이다. 한국경제의 침체는 가장 보수적인 논자조차도 동의하는 것으로 내수의 침체에 기인한다. 이 내수의 침체는 중소상공인, 노동자, 자영업자의 경제적 위기가 표현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중소상공인의 적절한 이윤을 확보해 주고, 다수 노동자의 생계비를 유지하며, 자영업자의 소득을 적절하게 유지할 수 있는 방도를 찾는데 재벌을 빼고 이야기할 여지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하든 경제성장을 이야기하든, 재벌개혁은 가장 먼저 이야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금 일반적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국가권력으로부터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자유시장 개념은 분명 부르조아 혁명의 중요한 성과이다. 이에 따르면 국가권력을 장악한 정치집단과 경제력을 가진 시민사회의 구성주체는 분화되고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국가의 통제로부터 시장이 자유로울 때 이 경제가 번영한다는 믿음이 고전적 자유주의의 특징이다. 경쟁이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한다. 독점은 이에 반한다. 국가의 허가를 받는 독점권이나 보호 장벽은 경쟁을 억제하므로 경제적 번영을 막는다. 따라서 국가와 기업의 협력은 정경유착과 비효율, 그리고 부패로 이어질 뿐이다. 그러나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은 19세기후반에서 20세기 전반기를 거치는 동안 독점자본이 형성되면서 지탱하기 어려워졌다(비록 20세기 말에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며 기형적인 형태로 부활하긴 했지만). 독과점화에 따라 가격기구는 경직화되고 왜곡되었으며, 공황의 빈도와 심도도 깊어졌다. 국가의 자의적 개입이 아니라 자유로운 시장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독점이 시장의 작동을 막는 가장 위험한 요인이 되었다. 더구나 경제의 독과점화는 원칙적으로 모든 형태의 특권과 차별을 허용할 수 없는 민주주의와 병존하기 어렵다. 이렇듯 시장경제의 실패가 너무나 명백하게 드러나고 그것이 민주주의를 위협하여 정치적으로 용인될 수 없게 되면, 보완책으로서 체제의 붕괴를 막기 위한 국가권력의 행사(시장경제에 대한 통제)가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국가의 시장개입이 정경유착과 비효율, 그리고 부패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개입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장경제에 대한 국가개입이 정당화되는 유일한 길은 국민이 수용하느냐이고, 국민이 수용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하느냐이다. 구체적으로 그 개입이 얼마나 투명한가, 최소한 민주적 절차에 따랐는가, 의사결정에 있어서 민주적 성격을 갖추었느냐 등 소위 민주적 거버넌스가 갖추어 졌느냐이다. 경제민주화에 부합하는 국가의 경제개입이 갖추어야 할 첫째 조건이다. 둘째 조건은 경제민주화에 부합하는 재벌개혁은 사전적이고 구조적인 것이다. 집권당이 추구하는 재벌개혁은 경제력이 집중되고 경제권력 강화되는 원인은 그대로 두고 경제권력이 부당하게 행사되지 않도록 관리한다는 것인데, 이는 그대로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무척 비용이 많이 드는 방식이다. 이 때문에 곧 한계에 다다를 것이다. 따라서 재벌의 소유구조, 지배구조, 그리고 경제력이 집중되는 구조를 사전적으로 교정하는 개혁이 경제민주화에 부합한다.
이러한 재벌개혁이 한국경제의 침체를 막을 것인가는 사전적으로 답하기 어렵다. 그 이후의 경제체제는 어떻게 작동할 것이지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재벌개혁 없이 한국경제의 양극화와 그에 따른 침체를 막을 길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중소기업의 육성이 그동안의 중소기업정책(한국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중소기업정책을 갖고 있고, 중소기업 지원을 위한 재원이 모자라서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닌 것 같다)과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할 텐데, 기본원칙은 중소기업의 육성이 중소기업 노동자의 이해와 결부되도록 정책을 짜야 한다는 것이다. 인력이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모여들 수 있도록 히는 것에 최우선 정책목표를 둔다.
6. 왜 투기자본 규제인가? - 경제민주화에 부합하는 개방전략(FTA 전략, 세계화 전략)
2008년의 미국발 글로벌 경제위기는 시장근본주의에 입각한 맹목적 세계화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그 파탄의 계기가 되었다. 분명 나중에 가면 세계자본주의의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시장과 개방, 세계화에 대한 기존의 지배적 신념은 꺾이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대안적 세계화를 위한 근본적 숙고는 아이디어 차원에서나 현실적 기반에서나 난제로 남아 있다.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국내에서도 그렇다.
‘자본에 국적이 없다’는 좌우(극단적인 개방론자이든 국민국가 쇠퇴론자이든) 양극단의 논리에서 다 같이 나오지만 현실적이지 않다. 대니 로드릭이 잘 지적했듯이, 당분간 민주적 거버넌스와 정치공동체는 국민국가 내에서 조직될 것이다. 즉 가까운 미래에는 여전히 우리는 국민국가와 함께 살아야 할 것이다. (Rodrik, D.,(2011), The Globalization Paradox:Why Global Markets, States, and Democracy Can’t Coexist, 고빛샘?구세희 옮김(2011), 『자본주의 새판 짜기-세계화의 역설과 민주적 대안』,21세기북스, pp.344-46).
반면에 세계화를 거부하고 지역화를 추구하는 것도 보완적인 대안으로서 제한적인 설득력밖에 갖지 못한다. 세계화 자체를 부절하기는 어렵다. 시민과 노동자의 자유이동을, 세계적 연결과 통합을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문제는 자본에게만 압도적인 자유가 주어져 있는 현재의 세계화(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어떤 세계화로 바꾸고 관리할 것인가를 질문하는 것이 맞겠다. 어떻게 하면 일방적으로 자본편향적인 세계화를 노동과 자본에게 균형있는 세계화로 바꾸어 관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노동의 세계화를 확대하는 방안과 자본의 세계화를 억제하는 방법이 있겠는데, 국민국가와 함께 살아야 하는 현재의 조건에서 전자는 한참 난망하다. 그래서 후자의 길이 남는다. 자본의 세계화를 억제하는 것이 경제민주화에 부합할 여지가 있는 것은 정치적 공동체로서 국민국가내에서 민주적 의사결정의 여지를 넓혀 주기 때문이다. 현재의 세계화는 깊어지면 질수록 국민국가에 기반한 민주주의와 충돌한다. 세계화의 심화는 국민국가 내에서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를 실행할 여지를 없애간다. 예를 들어 국가간 투자협정이 개별 국민국가의 입법권을 어떻게 제약하는지 생각해 보라. 계층간 갈등의 민주적 해법을 얼마나 억압하는지 생각해 보라.
최소한의 민주주의 공간을 열어 두는 제한을 두는 세계화를 생각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없다, 현재의 세계화와 투기자본의 폐해가 초래하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경제민주화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결합을 추구하는 것이고, 우리사회에서 수용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어떤 형태로든 그 결과물로 사회적 타협을 내놓아야 한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핵심은 자본이동의 자유화이고 그 정점에 투기자본의 이동이 자리잡고 있다. 이 이동가능성이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고 권력이 된다. 외국자본유치를 위한 투자자권한 확대, 노동기준 악화경쟁, 법인세인하경쟁, 보건과 안전기준 완화 경쟁, 산업정책에 대한 제약들이 다 민주적 의사결정을 위협한다. 그래서 투기자본 규제는 재벌규제와 함께 경제민주화에 부합하는 경제개혁의 쌍벽을 이룬다. 걱정은 재벌규제와 투기자본규제가 서로 충돌하면 어쩌나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재벌과 투기적 금융자본의 결합이 진행되었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짧은 기간 동안 산업자본으로서 재벌의 이해관계와 금융자본으로서 투기자본의 이해관계가 어긋난 기간이 있었다. IMF의 입을 빌어 투기적 해외자본이 재벌해체를 요구했던 기간이다. 그러나 외자가 재벌독점체제로부터 생기는 이득을 직접 누릴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외자 스스로가 재벌개혁에 저항하는 유인이 발생한다. 따라서 한국경제의 개혁 및 규제대상은 재벌이 아니라 금융자본이고 투기자본이라는 주장은 한시적 수명을 다했다. 자유로운 자본이동과 그로 인한 ‘규제차익거래’의 가능성을 열어 둔 채, 국제(금융)자본과 재벌의 이해관계를 분리시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양자를 분리시키고 재벌과만 사회적 타협을 이루는 것도 극히 어렵다. 다만 자유로운 자본이동에 상당한 제약이 가해지면 다시 양자간 이해관계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고, 이에 근거해서 사회적 타협의 공간이 생길 수 있다.
“기업의 장기적 발전이나 고용의 유지, 중소기업과의 공존과 같은 국민경제의 발전에 관심을 두지 않는 기업은 재벌과 외자의 딜레마에서 총수의 국적과 무관하게 외자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형식적으로 기존 재벌총수이든 외자이든 상관없이 금융투기적 방법에 따라 단기적인 고수익만을 추구하는 기업은 재벌과 외자의 딜레마에서 외자에 속한다. 언제든지 사소한 수익성의 변화에도 우리 사회를 떠날 준비를 갖춘 혹은 그러겠다고 국민을 위협하는 기업은 투기성 자본이다. 결국 외자와 재벌 딜레마의 실(實)은 국적과 무관하게 이 땅에서 활동하는 기업에게 민주적 책임성과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외자와 손잡고 국내 재벌을 공격하거나 재벌과 손잡고 외국자본에 대항하는 전선을 치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국민적 요구를 대립시키는 것은 옳은 방식이 아니다.”(유철규, “재벌과 외자의 딜레마”, 2004)
7. 노동 없는 경제민주화는 허구인가?
그렇다.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주로 논의되었던 경제민주화 정책에 노동이 빠져 있다. 재벌개혁에 함몰된 측면이 있다. 경제민주화의 핵심취지 중 하나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 자신이 만들어낸 위기와 사회적 갈등의 증폭으로 파국을 맞기 전에, 시장경제 스스로가 해결할 수 없는 아니 오히려 키우기만 하는 시장경제내부의 문제와 갈등요인을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해소해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빨리 파국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경제민주화에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 또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신념이 확고해서 파국은 절대 올 수없다라고 믿는 사람도 경제민주화에 적대적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내부의 가장 중요한 갈등과 대립은 노동-자본 관계에서 나온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경제민주화의 핵심의제는 노동민주화일 수 밖에 없다. 뉴딜과 유럽의 사민주의, 일본의 경제민주화 등 이전의 경험에서도 노동민주화는 경제민주화의 핵심과제였다.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 노동민주화는 시장내부에 거대자본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대항력을 만든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를 통해 국가의 직접 개입의 필요성과 정치적 부담을 줄인다. 이를 위해 노동의 힘을 강화시켜야 했다. 자본과 노동간에 대등한 관계를 형성시켜 양자간에 민주적 타협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노동3권의 실제적 보장, 정부(공권력)의 계급 중립적 위치 입법화, 노조운동의 활성화, 노동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의 형성 지원, 독점 금지법 등 자본집중의 억제 입법, 산업민주주의 기반 조성, 노동자 재산 형성 지원, 노동자 지주제의 대폭적인 확대와 이에 기반한 노동의 경영참여권과 이윤균점권 확보의 기반을 형성하는 조치 등이 시행되었다.
현재 재벌체제라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노동민주화가 가리워져 있는 것이며, 이렇게 된 데는 노동의 분열과 약화가 원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노동의 대등한 권리와 참여없이 자본이 부여하는 시혜적 혜택을 확대하는 것은 경제민주화가 추구할 길이 아니다.
시장경제 내에 거대 독점 자본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힘을 만드는 또 하나의 길이 낙후 산업, 낙후 지역, 중소기업, 자영업 등 취약 자산계층의 성장 기회를 확보하는 것이다(미국의 지역재투자법 같은 것을 상기하자). 이는 당연히 경제 침체를 극복하는 훌륭한 수단이기도 했다.
한국의 양극화 문제에 대한 출구는 중소기업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끝날 수 없다. 목표는 중소기업에서 제대로 된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에 두어져야 한다. 중소기업 경영진이 알아서 늘어난 수익으로 임금을 올려주고 고용을 늘릴 리 없다. 이 연결고리들에 대한 대책이 하나의 패키지로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부는 우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예를 들어 최저임금인상과 4대 보험 지원 같은 것을 시행해야 한다. 정부와 한국은행의 중소기업지원 금액 가운데 과감하게 절반 이상을 일자리 연계로 올인하는 것도 좋다.
관련해서 자영업자 문제가 있다. 현재 자영업자의 매우 큰 부분 아마도 절반은 잠재적 실업자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듣기에 식당이 44만여개이고 치킨집이 3만여개, 노래방이 3만5000여개라 했다. 자영업자 부채는 300조를 훨씬 상회해서 400조에 가깝다 한다. 이들이 대량으로 무너지면 한국경제는 파탄난다. 그래서 중소기업의 활성화를 통한 제대로 된 일자리 만들어서 이들을 흡수해야 한다는 정책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회서비스 일자리는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중소기업의 숨통을 트는데 실제적 효과가 있는 재벌개혁이 있어야 할 또 하나의 이유이다.
장시간 노동이 자영업자의 생계와 얽혀 있다는 점도 숙고해야 한다. 야근 때문에 유지되는 치킨집을 보면 이런 악순환이 없다. 문제가 복잡하다는 어려움이 있지만 하나가 풀리면 다른 것도 풀릴 수밖에 없다는 장점도 있다.
8. 사회적 경제나 협동조합의 확대는 경제민주화와 부합하는가?
시민 가계의 소득을 확보해 주기 위한 사회적 타협이 경제민주화의 취지이다. 그럼으로써 내수 진작의 효과도 기대하는 것이다.
전철환(2002,『경제민주화와 위기의 대응철학』, 지식산업사)에 따르면, 영국이 추구했던 경제민주화 정책은 매우 단순했다. 하나는 공익사업의 확대와 누진세 제도의 채택이었다. 소수의 부자에 의해 소비되거나 축적될 부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 이 때 공공의 이익이라 함은 기회의 불균등을 완화하는 것이다. 둘은 노동조합의 활성화와 산업입법이었다. 하나의 집단이 경제적인 강제력을 사용해서 다른 집단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힘을 제한함으로써 교섭력의 불평등을 완화시킨다. 셋이 바로 공공기관이나 협동조합이 할 수 있는 사업 영역을 넓히는 일이었다. 이들 조직은 반드시 수익성을 목적으로 사업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익사업을 할 수 있다. 경제운용을 자본가와 그 대리인의 손에서 사회적 책임을 지는 공공기관과 협동조합으로 옮김으로써 불평등의 완화에 기여하게 한다.
물론 지금에 와서 한국에서는 어떤 형태의 사회적 경제나 협동조합을 만들고 이것이 어떻게 낭비적이지 않게 하며, 또 어떻게 사회적 기여를 하게 할 것인가에 바로 답을 주지는 않지만 참고할 가치가 있다.
한국은 전부 자영업에다 몰아넣었기 때문에 사회서비스 업종의 비중은 낮다. 그냥 단순 숫자비교로만 보면 제조업에서 빠져 나온(혹은 흡수하지 못하는) 인력을 사회서비스업에서 흡수해 줄 여지가 충분한 것이다. 어떻게 효과적으로 산업구조상 사회서비스업의 비중을 서구 수준으로 올릴 것인가 계획적으로 접근할 만하다. 한 시민 단체의 계산에 따르면 병상대비 간호사 숫자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수준으로 만드는데 9만 7000개 일자리가 생긴다고 한다. OECD 수준으로 보호자 없는 병원을 구축하는 데는 39만 명 분의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OECD 평균 수준으로 가려면 교사 6만명, 교육 행정지원 인력 4만명이 더 필요하다고 한다. 숫자 놀이만 하면 당연히 곤란한 일이 많이 생기겠지만, 여러 가지 방향을 조합하면 문제를 풀 수 있는 방안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는 것에 도움을 받기만 해도 그게 어디인가. 협동조합은 산업민주주의의 교육장으로서도 훌륭한 역할을 기대할 만하다.
9.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을 높이는 것은 경제민주화와 부합하는가?
솔직히 한국의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이 낮은 것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없다. 자본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정부의 입을 통해 자본은 끊임없이 고령화문제와 노동인력 부족의 전망을 내세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연금의 미래가 어떻다든가 한국의 잠재성장율이 어떻게 된다든가 국민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낮은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을 보면 헛소리가 많다. 아마도 때가 되면 자본은 스스로의 계산으로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을 높이려 나설 것이다. 기존 노동력의 노동조건과 임금을 낮추는 수단으로 삼을지 모른다. 미국의 성인 백인남성이 받는 실질임금은 2000년대 초에 1970년대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결국 맞벌이를 통해 기존 노동자의 임금을 묶어 놓는데 성공한 모양세다. 자본이 주도해서 여성 노동력을 끌어내기 전에 여성이 주체적으로 정치 세력화하고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풀어 갈 필요가 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지불해야 할 비용이 아직 큰 가 보다 짐작한다. 우선 여성노동력을 시장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교육, 보육문제를 풀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남성 노동자 혼자 벌어 살 수 없게 좀 더 상황이 변해야 하는 것일까.
10. (종합) 경제민주화와 대안적인 한국경제의 발전방향
경제민주화는 상상의 가공물이 아니다. 자본주의 역사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 다만 그 성격이 실용적이어서 개별 국가별, 시기별로 직면하는 다른 문제에 대해 창의적인 다른 해법을 요구할 뿐이다. 따라서 현실의 문제에 굳게 기반해야 하는, 그자체가 하나의 과정이며 운동이다. 경제민주화 개혁은 상이한 비전과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들 간의 정치적 충돌과정에서 타협에 의해 결정된다. 그게 현재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이다.
따라서 어떤 경제민주화에 부합하는 경제체제의 세세한 내용을 하나의 대안으로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지난할 뿐 아니라 헛수고가 되기 쉽다. 다만 현실의 다양한 경제민주화 운동들을 연결하고 묶는 작업이 중요하다. 아마 경제민주화 논리는 현실의 운동이 가는 만큼 가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굳이 한국경제의 발전방향을 이야기해 보라면 할 수 없이 조금이라도 하기는 해 보자. 그것은 지난 산업화시기를 거쳐 형성되어 온 구조를 뒤집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우선적인 과제를 몇 가지 든다면 국내 산업간 연관의 확대와 강화 및 내수 소비재 시장의 발전을 통해 경제의 내부적 ‘두터움’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외자에 대한 의존도를 적정 범위 안으로 조정해야 한다. 또 이미 사적 기업의 영역을 넘어서 사회화된 재벌의 생산력을 제도적 차원에서 사회화시켜 제도적 일치를 확보해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IMF가 주도한 구조조정과 이에 따른 한국경제의 전개는 이러한 방향과 또 한번 한국경제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내수산업이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산업간 연관은 더 약화되었으며, 국내 저축과 국내 투자의 연관성이 약해져서 외자 의존적 성격은 강화되었다. 사회화된 재벌의 생산력을 재사유화함으로써 제도적 불일치가 확대되었다. 연기금의 적극적 경영참여에 대한 요구, 계열분리제 도입이나 금산분리 제 강화 요구, 그리고 기업집단법 이슈가 제기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이러한 방향을 뒤집을 기회가 조금이나마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2008년의 미국발 경제위기와 총선과 대선을 거쳐 시대정신으로 형성된 경제민주화가 계기이다.
오늘날 경제는 지식기반경제라고 불릴 정도로 노동자의 지식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은 수준에 와 있다. 노동자의 지식과 창의력이 생산과정에서 온전히 발휘되기 위해서는 생산과정에 대한 노동자의 참여가 높아야 함은 물론이다. 하기 싫은 일 억지로 하는데 절대로 창의력이 나오지 않는다. 창의력은 헌신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으며,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실업의 위협과 노동자간 임금 경쟁으로는 노동자의 참여와 헌신을 이끌어 낼 수 없다.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모든 주체가 평등하게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민주화는 지식기반경제에 잘 부합하도록 꾸려나갈 여지가 크다. 그러려면 한국이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경제적 성과에 대한 국민의 기여와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국민을 시키는 일 하는 수동적 노동자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주주 자본주의는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의 기여에 걸맞지 않게 주주에게 과도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권리와 책임, 기여와 보상의 불일치를 확대시키게 된다. 노동자를 위시한 이해 당사자의 권리인정과 그를 통한 참여는 노동자의 창조적 노력의 역할이 갈수록 커지는 새로운 산업구조의 창출과 발전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내부적 발전 동력을 유지하는 경제일수록 초국적 자본에게는 더 매력적이다.■■
출처: http://www.justicei.or.kr/12?category=637807 [정의정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