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정의연구소 블로그기자단] '자기결정권' 기획기사 "자기결정권을 잃은 대한민국의 ‘공부하는 기계’" 정지선 기자

<자기결정권 기획기사>

자기결정권을 잃은 대한민국의 ‘공부하는 기계’

 

‘조기영어, 선행학습’

 

나를 깨우는 것은 다른 아이들처럼 ‘○○아, 학교가야지!’가 아니었다. 집안에 영어노래가 울려 퍼지면, 그것이 나의 기상시간이었다.
‘영어는 조기교육이 중요하다. 수학공부는 선행학습이 중요하다.’ 내 어머니의 법칙이다. 
저학년 때는 원어민 선생님이 직접 찾아와 두 시간 정도 외국 게임을 했다. 조금 학년이 높아지자, 원어민 선생님이 운영하는 어학원을 다녔다. 덕분에 코쟁이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덕분에 발음은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조기유학을 보낼 형편까지는 안 되었기에 차선책이었다. 

 

피아노도 배우고 싶고, 미술도 배우고 싶었던 나는 어머니의 조기영어교육과 병행해야 했다. 스케줄이 연예인 뺨쳤다. 피아노 학원, 미술학원, 어학원, 수학학원에 수학 학습지와 한자 학습지까지. 한자는 왜 했는지 모르겠으나 초딩 시절에 4급까지 따놓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중등 수학 과정을 다 마쳐야한다는 어머니의 욕심은 강남 근처로 이사까지 할 정도였다. 피아노를 계속 배우고 싶던 나의 ‘의지’는 어머니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강남 근처로 옮기자마자 꽤나 유명했던 강남의 한 종합학원에 레벨 테스트를 보러갔다. 

 

 

 “여기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 아니에요.”

 

 

상담데스크에서 시험을 보고 싶다는 말을 건넨 다음에 들었던 첫 마디다. 어머니는 자존심이 상했다. 예상외로 좋은 성적이 나와 높은 반에 들어갔다. 그러나 들어가서 나의 삶은 지옥이었다. 초 6학년 학생들에게 이미 수학은 중 2~3학년 과정을 가르치고 있었고, 영어는 토익을 공부시켰다. 그 외 과목들은 한 학기 정도 선행학습을 하고 있었다. 외국인과  ‘Hi, how are you?’ 같은 말이나 주고받았던 코흘리개에게 토익은 무리였다. 열심히 해봤지만, 보충학습을 해야 하는 ‘문제아’로 낙인 찍혔다. 어머니는 자존심이 상했다.

 

 

‘강남에서 안 된다면, 강북에서 너의 가치를 증명하라.’

 

 

다시 살던 곳으로 2년 만에 중학생이 되어 돌아왔다. 이번에 어머니는 나를 외고에 입학시키기로 작정하셨다. 중학교도 근방에서 외고 진학률이 가장 높다는 곳으로 배정받아오셨다. 그 와중에 피아노를 더 배우고 싶다는 나의 ‘의지’를 표명하자, 어머니는 ‘방학에 시간 나면, 잠깐 배워라’고 응답했다. 나의 방학은 선행학습으로 학기 중보다 더 바빴다. 외고를 가려면, 내신 성적이 높아야하고, 입학시험 공부를 따로 해야 한다. 외고 대비 종합학원에 들어갔다. 그 때, 내 중학교에서 전교1등을 하던 남학생이 자기 어머니와 손을 잡은 채 그 종합학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동병상련. 내신 성적 관리는 물론, 영어 실력을 월등히 향상시키기 위해 단어를 하루에 100개씩 외우게 하던 곳이었다. 방학 동안에도 아침부터 내신 선행학습을 하고, 밤 12시까지 외고 대비를 위한 영어 공부를 시켰다. 제대로 못하면, ‘사랑의 매’가 어루만져줬다.

 

외고는 나의 목표가 되어야 했다. 수학보다 영어를 좋아해야했다. 피아노는 내 마음에서 멀어져야 했다. 나는 외고 입학에 실패했다. 어머니는 자존심이 상했다.

 

 

 ‘공부성적=나의 가치’
 
외고 입시의 ‘루저’가 된 나는 나의 ‘가치’를 증명할 길을 찾아야했다. 어머니의 ‘사랑’을 회복해야만 했다. 좋은 성적. 이것이 내 목표가 되어있었다.
착실한 선행학습 덕분에 나름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전교 탑5 점수를 원했다. 중학생 때는 손가락 안에 들었으니 고등학생 때도 당연히 들어야한다는 것이었다. 외고도 아닌데 무엇이 어렵냐는 것이었다. 영어와 수학은 점수가 좋았지만, 그 외의 몇 과목들에서는 부진한 편이었다. 과목 평균으로 내는 전교등수가 좋을 리가 없었다. 나의 가치를 올려야만 했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 무리가 형성되었다. 대학교를 졸업할 나이인 현재까지 연락하는 친구들이니 평생 친구라 할만하다. 처음 그 친구들에 대해서 어머니께 자랑스럽게 설명했을 때, 어머니는 첫 질문을 하셨다. 

 

 

 “걔들, 평균은 몇이니?”

 

 

학생이라면, 공부와 ‘=’ 되어야만 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한번은 성적이 크게 떨어졌던 적이 있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춘기 시절의 풍파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머니는 나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방문을 닫으셨다.

 

 

나는 다시 나의 ‘가치’를 증명해야했다. 공부는 나의 삶이 되어있었다. 피아노나 미술 쪽에 있었던 흥미는 ‘공부’를 위해 접었다. 공부와 삶이 일치할수록 나의 가치는 높아졌다. 다이어리는 플래너로 변했고, 빽빽하게 그날 해야 할 공부가 나열되었다. 학교에 살다시피 했던 고3수험생은 수능날, 가치를 보여줄 수 있었다. 
명문대에 우선선발이 되자, 어머니는 웃으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것을 본 내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당신의 자식이 명문대생이 되었다는 것에 만족하신 어머니는 드디어 자유를 허락해주셨다. 감옥에서 풀려난 기분이었다. 날개를 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새로운 친구들. 술. MT. 동아리. 여행. 신세계를 만난 듯했다. 낭만을 꿈꾸며 떠났던 유럽 여행에서 별 목표 없이 배낭만 맨 채 마음대로 다니는 외국인 친구들을 만났다. 오래 집에서 떠나있는 그들의 행색은 초라했지만,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그들은 집에 가고 싶을 때 간다고 했다. 좋은 브랜드의 외투를 입은 나는 빛을 잃었다. 내가 있던 곳은 우물이다. 우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대학생활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재미가 없어졌다. 친구들은 고시공부를 하러가고, 취직공부를 하러갔다. 내가 잘했던 건 공부였는데…. 장님이 된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방향키를 잃었다.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지?
어머니는 방학동안 바닷물 위의 부표마냥 부유하고 있는 나를 보고, 한마디 하셨다. 

 

 

“내가 너한테 투자한 게 얼마인데, 꼭 잘 되어야지!”

 

 

‘가치’를 증명해. 내게 들린 말이다.
 내 앞길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나는, 아직도 ‘가치’를 증명할 방법을 찾고 있다. 

 

 

△ 위 글은 실제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되었다. 어머니의 학구열에 자식은 스스로 앞길을 판단할 ‘기회’조차 잃어버린 채 ‘공부’에만 구속된 상태로 성인이 된다. ‘자기가 결정할 능력’을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고 자란 ‘나’는 자유가 되었을 때, 오히려 방황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다양한 장래희망과 무한한 상상력을 가져야할 어린 학생들이 학원에 내몰리고, 책상 앞에만 묶여있다. 자식들이 좋은 성적을 받을 수만 있다면, 부모들은 돈을 아끼지 않는다. 자식들이 무엇을 하고 싶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부모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 모든 생각을 공부로 모았으면 하는 ‘잔소리’로 그들의 입을 막고 눈을 가린다. 불행히도‘공부만 하면 되는구나.’라는 생각은 대학생이 되고나면, 쓸모가 없다. 얼떨결에 성인이 되어서야 이제 원하는 대로 하라고 등 떠밀린 학생들은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줄 모른다. 부모의 ‘잔소리’없이 알아서 헤쳐 가야할 앞길은 깜깜하기만 하다. 이런 수동적인 학생들을 양산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이 세대에서 자란 젊은 청년들은 이제 자신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고찰을 시작해야한다. 자신들이 ‘자기결정권’을 빼앗긴 채 자란 유년기 시절이 어떠했는지, 자신들은 ‘행복’했는지, 똑같이 대물림 하는 것이 좋을지.  물론 이렇게 몇 사람의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만으로는 사회 전체를 갈아엎기엔 부족하지만, 큰 변화의 시작점은 작은 변화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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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justicei.or.kr/449?category=671202 [정의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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