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정치센터-경향신문 공동게재] 공무원, '머슴'아닌 '동료시민'
교육부의 한 고위공무원의 막말 논란이 결국 해당 공무원에 대한 파면 결정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민주주의 시민들을 ‘개·돼지’에 비유하고 ‘신분제’가 필요하다는 식의 말은 현재 우리 사회 고위층들의 인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여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연이어 최근 ‘천민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내세우며 아예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한 경제단체 산하 연구원의 주장은 단순히 뒷맛이 쓰다고 표현하기에도 모자란다.
지난 한 달여간 많은 시민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 이번 사태를 보면서 한 가지 유감스러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사건 당사자가 사용한 표현과 인식의 정도가 지나치게 심하다보니 이에 대응하는 시민들의 풍자 역시 거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감히 머슴이 주인에게 개·돼지라 하다니!”와 같은 조롱식 반박이었다. 사회지도층의 천박한 인식과 언행에 분노한 시민들의 풍자로서 이 정도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사건을 차분하게 정돈하고 사건이 의미하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짚어주는 역할을 해야 할 언론과 정치지도자들 역시 비슷한 표현과 시각을 서슴없이 꺼내는 것은 유감스러운 장면이었다.
여론과 별도로 언론과 정치는 날것의 조롱보다는 사건의 본질과 대안에 대해 논하는 공공재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일각의 조롱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100만명에 달하는 공무원들은 ‘주인’에 해당하는 ‘시민’들에게 복종하고 봉사만 해야 하는 ‘머슴’과 같은 존재들이어야만 하는가? 민주주의는 모두가 시민으로서의 책무를 지니고 공동체를 더 낫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공무원이라는 존재는 사회 유지와 발전을 위해 필요한 관료체제를 움직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또 한편 민주주의 사회의 중요한 동료시민들이다. 그들에게도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그에 따르는 소명의식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그들에게도 동료시민에 대한 시민적 책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누구나 정치와 행정에 참여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에서 출발한 고대 아테네의 예에서 보듯이 민주주의의 원리는 동료시민에 대한 책무와 권리의 인정에서 출발했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거대한 국가관료체제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위험성에 대한 비판과 견제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 체제 내에서 일하고 있는 또 다른 시민으로서의 공무원들에 대한 태도는 분명히 달라야 한다. 오랜 권위주의 정권을 경험한 한국의 진보와 보수는 모두 공무원들을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머슴’ 아니면 ‘차갑고 권위적인 관료’로만 상정해왔다. 이는 여야, 진보와 보수를 떠나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만나본 다수의 현장 공무원들은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사회공익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권력과 돈을 가진 소수의 사익에 행정이 좌지우지되는 것에 분개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무려 100만명에 가까운 공무원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의 공익을 수호하는 소중한 동료시민들로서의 존재다. 책임 있는 정치집단이라면 오히려 그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우리 사회에 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기울였는지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정당가입, 노동권마저 제한하는 현행법,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위한 지원에 대해 선거법 위반을 들먹이는 보수적 판결, 새로운 시도를 할수록 인사승진에서 손해 보고 권력에 줄 서게 만드는 경쟁주의 성과제도 등은 정직한 다수 공무원들의 고민과 목소리를 빼앗고 오직 ‘영혼이 없는 존재’로 남아있기를 강요하는 것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적 책무를 망각한 소수의 공무원들이 선민의식에 빠지고 천박한 언행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일간지 신문 한 귀퉁이에 넘쳐나는 사회복지, 소방공무원들의 영웅적 일화나 미담 사례는 관청의 홍보자료에만 그친다. 그들이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 소명의식을 느끼게 만들 어떤 제도와 대안도 없이 미담만을 조명하고 왜 너희는 저렇게 못하냐고 힐난하고 그들을 ‘머슴’이나 ‘영혼이 없는 존재’로 비하하는 것은 정치권력과 사회지도층의 무책임함이다. 공무원은 ‘미담’의 주인공들도 충성스러운 ‘머슴’도 아니다. 그들은 우리 공동체를 함께 가꾸어나가는 ‘동료시민’이어야 한다. 이제 그들에게 복종이 아니라 동료시민으로서의 책무를 요구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낡은 제도와 악습을 바꾸는 데 눈길을 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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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justicei.or.kr/585?category=679169 [정의정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