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문명의 단두대'가 필요하다
[장석준 칼럼] 우리가 광장에서 배운 세 가지
장 석 준(미래정치센터 부소장)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대통령 퇴진 운동이 한 달이 넘었다. 벌써 다섯 차례나 주말에 광장이 열렸다. 이제 수백만이 모이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지금 우리의 일상은 혁명이다.
광장에는 논란도 있다. 그 중에는 차벽에 갇힌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는 항변이 있다. 노래하고 떠드는 게 혁명은 아니라는 불만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차벽에 갇힌 것은 광장이 아니다. 청와대가 차벽 속에 숨어 있을 뿐이다. 또한 바리게이트가 혁명의 유일한 장면도 아니다. 혁명의 보다 인상적인 장면은 축제다.
하기는 광장에 모인 얼굴이 수백만이니 광장의 얼굴도 여럿일 수밖에 없다. 그 중 어느 하나만을 뽑아내 광장을 덮으려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는 이런 오랜 관성에 맞서려고 광장에 나서는 것 아닌가. 저마다 자신이 광장에서 발견한 가장 소중한 무엇을 키워나가는 일, 그게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여야 하지 않을까.
내가 광장에서 찾은 가장 반가운 얼굴은 '민주주의의 학습장'이라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민주주의를 우리는 지금 거리에서 배우고 있다. 가르쳐줄 교사를 찾지 못하던 민주주의를 서로한테서 배우고 있다. 지난 한 달 동안 한국인들은 1987년 이후 30여 년 동안 잊거나 미뤄온 학습을 한꺼번에 몰아 하는 중이다.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 피의자 박 씨를 한낱 괴뢰로 만들었다는 사이비 종교의 내막? 평소 듣도 보도 못한 향정신성 의약품 이름? 이런 건 한 번 듣고 웃어넘기면 그만이다. 이런 곁가지 이야깃거리들 때문에 우리가 이참에 진짜 배워야 할 내용을 놓쳐선 안 된다. 이런 학습의 교란이야말로 '박근혜'를 낳고 죽이기를 주저하지 않는 보수 언론이 원하는 바다.
사회 국가로 나아가지 못하는 민주공화국은 부패한다
우리가 진짜로 배운 것은 무엇인가? 저마다 초점이 다르고 표현도 다르겠지만, 나는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하고 싶다.
첫째, 한국 사회에는 남아돌아서 썩어가는 돈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박근혜-최순실 일당은 전화 몇 번으로 재벌들로부터 수백억 원을 모았다. 이번에 세운 스포츠 재단 두 곳 외에도 그 동안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은 불법 재산을 다 합치면 도대체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안 된다. 박근혜는 지하 경제를 양성화하겠다더니 스스로 지하 경제의 역군으로 나섰다.
재벌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엄청난 잇속을 챙겼다. 눈물 삼키며 골목 깡패에게 상납금 바치는 영세 상인을 떠올리면 안 된다. 재벌들은 박근혜-최순실 일당에게 갖다 바친 돈의 수십 배에 달하는 이득을 보았다. 그래서 뇌물이라는 것이다. 정의당 부설 정책 연구소 미래정치센터의 추계에 따르면, 재벌들은 박-최 일당에게 808억 원(현재 알려진 것만)을 투자해서 약 3조7000억 원의 순이익을 거뒀다.
지배 블록 안의 일부가 박근혜로부터 돌아서는 바람에 이 사실들이 폭로되기 전까지 이 사회에서는 이런 거액이 대중의 눈길 닿지 않는 곳에서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이 돈이 다 어디에서 왔는가? 어느 강물을 흘러 바다로 모여야 할 돈이 땅 밑을 떠돌고 있는가?
박근혜가 2007년 대선 무렵부터 민 핵심 정책이 이른바 '줄푸세'다. 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바로 '세'운다는 것이었다. 세금을 줄인다니 많은 이들이 서민의 세금 부담을 줄여 준다는 이야기로 알아들었다. 그러나 겪고 보니 세금이 줄거나 아니면 늘어나야 할 만큼 늘지 않아 불어난 것은 재벌의 뒷주머니뿐이었다. 재벌들 뒷주머니에서 다시 수백억 원이 나와 '줄푸세'를 밀어붙인 박-최 일당의 뒷주머니로 갔다. 이게 '줄푸세'의 정치경제학이었다.
또 박근혜가 대통령 당선되자마자 한 게 세금을 더 걷을 수 없으니 자기가 선거 운동 중에 내뱉은 '복지 확대'니 '경제 민주화'니 하는 공약은 다 실현 불가능하다고 못 박은 일이었다. 덕분에 한국 사회에서 한창 부풀어 오르던 복지 국가의 꿈은 박근혜 정부 5년(이제 4년으로 줄어들려나)간 감금당하는 신세가 됐다.
박근혜 정부가 복지 확대 할 돈 없다고 하소연할 때 정작 거기에 쓰여야 할 돈이 다 어디로 흘러갔는가? 정치 모리배와 재벌의 복지에 쓰였다. 건전 재정을 위해 복지를 줄여야 한다고 떠들던 경제학자는 둘 사이의 돈 배달 심부름을 했다. 이 모두가 기업이 어려워서 임금을 묶고 하청 단가를 낮추고 비정규직을 늘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외환 위기 이후 20년째 듣고 있는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미련했다. 우리는 너무 소박하고 소심했다. 이 나라는 비정규직 임금 올리고 복지를 확대하는 데 쓸 돈이 없는 나라가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노동권 보장하라고 더 세게 밀어 붙이지 못하고 복지 확대하라고 더 강하게 들이받지 못해서 그 돈이 모조리 지하 경제로 간 것이다. 우리가 징수하지 못하니 저들이 마음껏 착복한 것이다.
이번에 제대로 배웠다. 사회 국가로 나아가지 못하는 민주공화국은 반드시 부패할 수밖에 없다. 이런 민주공화국은 한 세대가 안 돼 다시 왕과 귀족들의 나라로 뒷걸음질 친다. 부패와 퇴행을 막는 길은 단 하나, 민주공화국의 진화형인 사회 국가를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의 복지를 늘려 저들의 부패를 막아야 한다. 법인세를 늘리고 소득세 누진성을 강화하고 자산세를 신설해서 공공 서비스 확대가 됐든 시민 기본 소득이 됐든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 재벌들의 식상한 하소연에 흔들리지 말고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 인상에 나서야 한다.
문명화된 단두대(=선거 제도 개혁)가 필요하다
둘째로 우리가 배운 것은 권력의 목을 쉽게 벨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지금 국민 90% 이상이 반대하는 인물이 청와대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은 저희가 살려면 탄핵소추안이 빨리 가결돼선 안 된다는 말을 공공연히 내뱉는다. 이런 황당한 광경을 마주하며 우리는 이 나라 정치의 불문율 중 하나를 새삼 확인한다. 그것은 공직 선거 당선은 왕관이나 귀족 작위를 받는 일이며 다음 선거까지는 권력 앞에 거칠 게 없다는 것이다.
선거로 뽑히면 그나마 낫다.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 중 다수는 아예 선거와는 무관하다. 최태민 일가야 너무 황당하니 피의자 박 씨의 특수한 인격적 결함 탓이라 치자. 박근혜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신나게 칼자루를 휘두르던 자들, 즉 청와대의 현대판 환관들, 기획재정부 등 힘 있는 부처의 고위 관료들,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등은 몇 년 뒤에 돌아올 선거조차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다음번 꼭두각시만 보장된다면 말이다.
그래서 대통령 퇴진 운동이 시작되자마자 떠오른 상징이 있다. 이번에는 왕의 목을 확실히 베고야 말겠다는 결의의 상징, 바로 단두대다.
단두대라니까 너무 섬찟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문명화된 단두대가 있다. 선거가 그것이다. 선거는 본래 주기적으로 왕의 목을 베는 의식이다. 주권자인 시민이 권력의 목을 베는 (혹은 목숨을 너그러이 연장시켜주는) 문명화된 의식이다.
이번에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비선출직 공직자들의 권력을 모두 단두대 앞에 세워야 한다. 선출직으로 바꿔야 한다. 검찰총장도, 경찰청장도 이제 선거로 뽑아야 한다. 그래서 제 목구멍이나 상위 공직자가 아니라 오로지 유권자인 시민만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머지 행정부 고위 관료나 대법관, 헌법재판관, 공영방송 임원 등도 직접 선출이 아니라면 의회의 강력한 통제 아래 두어야 한다.
또한 선거로 뽑힌 자들도 이제는 언제 목에 칼이 들어올지 몰라 긴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실제로 무능과 비리가 드러나면 쉽게 쫓아낼 수 있어야 한다. 국민 95%가 반대하는 대통령을 집에 보내려고 수백만이 차디찬 겨울바람 맞으며 거리에 나서지 않아도 되도록 편리한 제도와 절차를 갖춰야 한다.
간단하다.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선출직 공직자의 소환제를 도입하면 된다. 그러면 하야 선언과 탄핵 의결을 기다릴 필요 없이 국민 소환 서명을 받아서 투표로 피의자 박 씨 같은 인물을 몰아낼 수 있다. 혹은 이런 제도의 존재만으로 제2, 제3의 박근혜의 출현을 막을 수 있다.
혹자는 그래서 내각제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맞는 구석도 있지만, 절반은 사기다. 서유럽 내각제 국가에서 정권을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은 내각제라서가 아니라 다당 구도라서다. 이들 나라에서는 100% 정당 명부 비례 대표제가 뒷받침하는 덕분에 좌부터 우까지 여러 정당들이 의회에 진출해 있다. 그래서 민심의 변동에 따라 쉽게 정당 간 합종연횡을 통해 기존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 정부를 구성한다.
핵심은 내각제보다도 선거 제도 개혁이다. 만약 현행 승자독식 선거 제도를 그대로 두면서 내각제로 바꾼다면 제왕적 대통령보다 더 끔찍한 제왕적 총리가 등장할 수도 있다.
우리도 이제 알만큼 알았다. 자꾸 '개헌', '개헌' 하는데 개헌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광장 시민의 편인 아닌지 가리는 리트머스 시험지는 '선(先) 선거 제도 개혁'을 말하는가 아닌가다. 선거 제도 개혁이란 곧 단두대의 날을 날카롭게 가는 일이다. 지금은 무슨 방도가 됐든 권력의 목을 베는 데 뜻을 함께 하는 자만이 우리 편이다.
광장의 힘이 일상에서도 지속될 수는 없을까?
셋째로 우리가 배운 것은 광장의 힘이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답게 만든다는 진실이다.
지난 한 달만큼 민주주의를 실감한 적이 있었던가. 정치인들이 이렇게 시위대의 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집회가 거듭될 때마다 집회에서 나온 요구의 뒤꽁무니를 따른 적이 없다. 모두 시민들이 광장을 연 덕분이었다. 광장이 열리자 여당 의원 중 그나마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이 혼비백산했고 야당 의원들이 생각이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재벌도, 보수 언론도 촛불 시민들의 눈치를 본다.
광장에서 시민들이 웅성대니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답게 돌아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장면이 예외적 순간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피의자 박 씨를 청와대에서 퇴거시킨 뒤에도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답게 돌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결국 광장의 힘이 일상에서 지속되어야 한다. 우리 삶 곳곳에서 광장의 촛불이 계속 타올라야 한다.
광장의 일상화…. 방향은 분명한 것 같은데, 아직 구체적인 모습은 잘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광장에 나선 우리들은 이 과제를 반드시 함께 토론해야 한다. 그것만이 4월 혁명과 6월 항쟁의 회한을 반복하지 않는 길이다. 당장 행동 계획이 나오지 않더라도 계속 물음을 던져야 한다.
사회의 여러 장소들 중에 가령 기업에 광장의 힘이 살아서 작동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노동조합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의 노동조합으로는 약하다고? 그럼 촛불 시민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해야 하지 않을까? 노동조합은 대기업 정규직만 위한다고? 그럼 다수의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입하는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노동조합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기업 안에 광장의 힘이 살아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 촛불 시민들이 권력을 흔들고 새로 세우듯 일터에서도 일하는 사람들이 결정권을 행사해야 하지 않을까? 독일의 노사 공동 결정제처럼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정도 되면 국가와 노동자, 소비자 대표가 지배 구조에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려면 그게 지금처럼 창업주 일가가 농단하는 것보다 못할까?
기업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학교에서도, 상가에서도, 동네에서도 광장의 힘을 구현할 조직과 제도, 무엇보다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 무리의 2류 정치인들과 재벌, 보수언론이 시민혁명의 성과를 낚아채는 일도, 다시 한 30년쯤 지나 또 다시 왕과 귀족을 몰아내려고 거리에 나서야 하는 일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5주 동안 이런 값비싼 교훈들을 배웠다. 아니, 지금도 배우고 있다. 그리고 더 배워야 한다. 이제부터 답을 만들어가야 할 물음들이 아직도 더 많다.
하지만 일단은 이런 집단적 학습 과정이 열렸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경이롭다. 이 희귀한 순간을 허투루 지나칠 수는 없다. 그러니 마땅히 우리는 더 많이 발언하고 더 진지하게 의심하며 더 확고히 결의해야 한다. 이런 우리 하나하나의 모든 행위가 이 경이로움을 이어가고 연장시킬 것이다.
출처: http://www.justicei.or.kr/656?category=567220 [정의정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