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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칼럼

  • [미래정치센터 칼럼] 누가 정치엘리트가 되는가?

이 승 환 (미래정치센터 기획실장)

 




1야당의 인재영입이 마무리 되어가고 있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를 시작으로 시작된 인재영입은 안철수 의원 탈당으로 침체된 당의 분위기를 붐-업하는 데 일조했다. 지나치게 성공한 사람만 불러들이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이런 영입 자체에 부정적일 이유는 없다. 모든 정치인이 처음부터 직업정치인일 수는 없다. 정치인은 그 이전에 다른 직업의 누군가였다.

 

자기 직업세계에서 성공을 거둔 이들이 정치의 무대에 불려나오는 것은 선거 자체가 갖는 귀족정(Aristocracy)적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선거(election)와 엘리트(elite)는 그 어원이 동일한 단어로, 고전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민주적 제도로 간주되지 않았다. 현대에 와서도 선거의 귀족정적 특징은 유지된다. 선출되는 사람은 선출하는 사람보다 무언가 더 뛰어난 개인으로 간주된다. 아니 그런 개인이어야 한다. 선출되는 사람은 지적, 도덕적, 경제적 역량이 뛰어난 유명인이다.

 

하지만 선거에서 시민 다수와 다른 모습의 엘리트만을 선출할 수밖에 없고, 의회가 그 엘리트가 속한 직업과 계급의 제한적 이해만을 대변하는 기관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다. 실제 근대 초 의회는 그런 모습을 띄고 있었는데, 의회가 민주주의의 기관이 된 것은 보통선거와 대중정당이 출현한 이후의 현상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투표에 참가하게 되고, 공천권을 행사하는 정당의 존재로 정치의 모습과 기능은 비로소 바뀌었다. 초등학교 교육경험이 전부인 노동운동가 룰라가 대통령이 되기도 하고, 인구의 8%에 불과한 흑인 출신의 사회운동가인 오바마가 대통령이 당선되기도 한다. 이것은 노동자당이나 민주당이라는 정당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정당은 자기가 대변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엘리트를 만들어 내며, 시민이 그들에게 권력을 위임할 기회를 제공한다.

 

한국의 정치엘리트들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직업적 정치인이 되는 한국적 경로의 특징은 그것이 매우 비좁다는 것이다. 19대 국회의원 직업군을 보면 판사와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 출신이 4.3%, 기업인 4.7%, 교수 등 학자가 8%, 관료가 5.3%이다. 하지만 이 조사는 19대 총선 당선 직전 직업을 묻는 조사이다. 재선 이상까지 보면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 비율은 15%까지 뛴다. 교수나 관료도 마찬가지이다. 대개 우리 사회에서 목소리도 크고 경제력도 큰 직업과 집단에 속했던 이들이 대한민국 국회의 ‘얼굴’들인 것이다. 사회의 엘리트는 곧바로 정치엘리트가 되며, 정치엘리트는 정당에 의해 특별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동일한 관점에서 한국 정당들의 인재영입을 바라보면 단지 그들이 성공한 엘리트라는 점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당이 약한 정치체제에서 사회엘리트가 정치 엘리트가 되는 방식의 문제이다. ‘정치를 하고 싶으면 정치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역설에 따라 엘리트들은 정치를 시작할 때 으레 비정치적 이력을 읊어야 한다. ‘정당에서 일하게 될 줄 몰랐다’거나, ‘정치 같은 일은 하지 않으려 했다’로 자신의 순수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리고 정치엘리트가 당연히 가져야 할 민중성을 벌충하기 위해 시장가서 떡볶이 사먹는 등의 어색한 일을 해야 한다. 시민들 입장에서 보자면 이 엘리트들이 이전에 무엇을 대표했던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그의 화려한 직업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정치와 시민의 사이의 거리는 계속해서 좁혀지지 못한다. 시민의 자기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도 점점 멀어진다.

 

이러한 경향은 2016년에는 세대배제라는 더 불길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종인, 윤여준 같은 70대의 노책사들이 전면에 나서 야당의 당권을 행사하는 것이나, 4-50대의 비정치적 엘리트 영입은 어쩌면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제론토크라시(오구마 에이지 게이오대학 교수의 개념으로 외부인과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는 고령자 지배체제)는 그보다는 더 아래에서 작동하고 있다. 20대 총선 예비후보 중 정당을 불문하고 40세 미만 출마자는 고작 40여명 규모라고 하는데, 이는 19대 총선의 80명은 물론 100명을 훨씬 넘겼던 17대 총선에 비하자면 거의 절반 이하로 떨어진 것이다. 성공 자체를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는 이제 자기 세대의 불행을 말할 대표조차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정당들은 애써 만들어진 청년 정치인들에게 “젊은 사람이 기회가 더 있잖아” 식으로 치어리더 취급한다. 사실 이런 제론토크라시에서 그 기회가 오기는 하는 걸까? 그리고 이런 정치가 평범한 시민들의 삶을 바꾸는 변화가 가능할까?

 

얼마 전 지역정치인 내 동료 한명은 이런 상황을 두고 “그냥 정당활동이 아니라 고시나 볼걸 그랬다”고 말했다. “그게 더 정치하기 쉬웠을 것 같다”면서. “그건 아니야”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다.



출처: http://www.justicei.or.kr/533?category=567220 [정의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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