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순 (진보정의연구소 사무국장)
그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낮게 엎디어 자칫하다간 키가 큰 사람들의 정수리에 맞닿을 정도로 바짝 내려앉아 있었다. 출근시간이 가까워오자 나는 공연히 진땀이 났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서점 앞으로 익숙한 얼굴들이 한 명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잠을 설쳤는지 얼굴이 두더지가 뒤집어놓은 밭고랑처럼 푸석푸석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아무도 가벼이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9시 10분 전, 지부장은 눈동자와 손가락으로 모인 인원을 점검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가자!”
전장에 나가는 어느 장수의 말소리가 이렇게도 진중하고 무거웠을까? 우리는 일제히 횡단보도를 건너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5층과 6층에 우리들의 일터가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리자 대여섯 명의 소장들이 마치 도열하듯 서 있었다. 생각보다 영업국에 모인 소장들이 몇 명 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구마다 영업국이 있었고 각 동마다 영업소가 1~2개가 있어 소장들만 모아도 족히 30명은 넘었다. 그 시간 대부분의 소장들은 영업국장의 지시로 이미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전철역 입구나 버스 정류장에 나가 있었다.
오늘은 회사에 민주노조가 들어선지 처음으로 파업을 선언한 첫 날이었다. 파업으로 돌입하기 한 달 전부터 ‘준법투쟁’의 일환으로 ‘정시 출퇴근’, 노동조합에서 나눠준 리본 달기나 사복근무만으로도 관리자들의 엄포와 회유로 그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는지 체험한 나로서는 아예 일손을 놓는 파업은 얼마만큼 험악한 분위기가 될지 두렵기까지 했다.
예정대로라면 우리는 아침에 모두 본사가 있는 시청역으로 출발했어야 하나, 어제 밤부터 아니 훨씬 그 전부터 과장과 소장들은 돌아가면서 담당직원들의 집 앞을 지키고 있는 등 조합원들의 행동에 제약이 가해지자 지부장은 영업국장과 담판을 지었다. 그것은 파업 첫 날 소속 조합원들과 함께 노동조합이 있는 본사가 아닌 영업국에 모여 다시 한 번 파업참가에 대한 회의를 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거의 매일 지부장을 불러 ‘파업참가를 반대하진 않는다. 다만 우리 영업국이 선두에 서는 꼴은 볼 수 없다.’며 엄포를 놓곤 하던 국장으로는 오히려 반갑고도 다행스러운 제안이었을 것이다. 파업 첫 날만 잡아 두어도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본인 또한 본사 인사과장에게 어느 정도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과장이 미리 준비해 둔 회의실로 들어갔다. 우리가 전부 회의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과장은 남직원으로 하여금 회의실 문 앞을 지키게 했고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을 지키고 있던 소장들을 불러들였다.
회의실에 갇히게(?) 되자 지부장은 앞에 앉은 조합원 두 명에게 눈짓을 했다. 그녀들은 미리 말을 맞추기라도 했는지 지부장의 눈짓에 맞춰 회의실 구석에 천장까지 쌓여있던 휴지나 행주가 들어있는 박스들을 옆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평상시 영업사원들이 고객 응대용으로 사용하곤 하는 물품이었다. 그것들을 모두 옮기자 아주 좁은 문이 하나 나왔다. 몸을 옆으로 비스듬히 돌려야만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문이었다. 그 밑으로 역시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먼지 덮인 비상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상시 회의실 청소를 담당하던 여직원들이 아니고서는 쉽게 알아챌 수 없는 비상구 표시 없는 비상구였던 것이다.
우리는 일제히 숨을 죽이고 한 명씩 가방을 챙겨 그 문을 빠져나와 전철역으로 향했다. 지부장의 지략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집결시간을 한 시간 가량 넘겨 도착한 장소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조합원들로 대한문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 조합원이 3,000명이었는데 그중 1,500명 이상은 모인 듯하였다. 저마다 가방 하나씩을 들고 메고 있어 얼핏 보면 여행객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현장에 나와 있던 노동조합 간부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남대문 앞에 있는 본사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조합원의 대다수가 여직원들이라 그런지 그녀들이 뿜어내는 활달함과 유쾌함은 파업이 주는 무게감을 조금은 덜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본사 앞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기다리고 있는 한 무리의 남성 관리자들의 모습이 보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서로가 팔짱을 끼고 건물 앞에 섰다. 조금 전까지의 유쾌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관리자들은 자기네 소속 여직원에게 나오라고 손짓을 하기도 하고, 혹은 욕설을 하기도 하고 어떤 관리자는 대담하게 손을 뻗어 무리 중의 누군가를 끌어내려고도 했다. 그들의 탄압이 거세지던 어느 순간 우리는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게 위해 일제히 앞사람의 허리를 꽉 잡고 본사 현관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들릴락 말락 작게 들리던 그 노래는 이윽고 가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마침내 거대한 합창이 되어 들려왔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1,500여명이 3~4줄을 맞춰 오르다보니 노래는 몇 순배를 돌았고 노래를 부르는 중간 중간에 누군가는 울음을 섞어 부르기도 했다. 때맞춰 가랑비까지 내리기 시작하여 분위기는 더욱더 비장해졌다. 행렬은 끝없이 이어져 계단을 이용해 8층 대강당에 이르기까지 노래 또한 끊일 줄 몰랐으며 파업을 저지하기 위해 모여든 관리자들도 감히 행동에 나서지 못했다.
나는 전율했다. 노래 가사에 전율했고 비장하고도 뭔가 모르게 서러우면서도 감격스러운 분위기에 전율했으며 층층마다 진중하게 울려 퍼지던 노래에 전율했다.
그날의 그 전율은 이후 입사 겨우 두 달 만에 파업에 참가하였다며 한 달 동안 말을 걸지 않던 선배의 부당한 처사도, 수습 딱지가 떨어지기가 무섭고 외따로 떨어진 영업소로 발령이 났을 때도 나를 푸르게 살아있게 했다.
노래의 마지막 단락,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는 두고두고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했고 그 선택에 대한 후회를 없애주었다.
광주항쟁이 낳은 그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정작 광주항쟁 기념식에서 거부당하는 일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들에게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부정되자 마치 지금까지의 내 삶이 또한 통째로 거부당한 느낌을 받았다면 너무 과한 것일까?
‘임을 위한 행진곡’은 노동자 민중들에겐 아리랑과 같은 곡이다. 천천히 읊조리듯 부르면 그것처럼 슬프면서도 애잔할 수가 없어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노래이며 팔뚝질과 함께 부르면 또 그것처럼 힘이 뻗쳐오를 수가 없는 노래다. 부디 노래에 덧씌운 어처구니없는 구실들을 말끔히 걷어내고 서로서로 입을 모아 뜨겁고 힘차게 부를 수 있는 푸르른 오월이 다시 오길 기대해본다.
출처: http://www.justicei.or.kr/344?category=567220 [정의정책연구소]